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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올해 나이 예순 넷인 우리 아빠는 아직도 '골드 액세서리' 앞에서 마음이 요동치신다. 젊은 시절에는 더 많은 것들에 눈빛이 흔들리셨다. 당연히 자식들 먹이고 가르치는 삶의 무게는 엄마 어깨 위에만 있었다. 그렇다고 아빠가 인간이 가져야 할 덕목인 미안함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셨다.

 

딸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입맛 없다"를 체감해 보지 않은 사람, 날 것과 익힌 것, 육류와 채소를 차별하지 않고 먹는 엄마만이 당당하게 외식메뉴 결정권을 가지셨다. 언젠가 아빠는 "나는 레스토랑 한 번도 안 가 봤다이" 하며 진심을 보인 적 있지만 대놓고 엄마한테 주장한 적 없으시다. 식구들이 밖에서 먹는 음식은 오로지 회나 주꾸미, 낙지였다. 

 

우리 엄마 조여사는 음식 앞에서는 아내도, 엄마도 아닌, 오로지 '자연인 조금자'로만 존재하신다. 당당하며 거침없이 드신다. 엄마 어릴 때에 외가는 일꾼을 몇 사람이나 두고 농사를 짓는 집이었다. 먹을 것 인심이 후한 집. 많이 대접해 보고, 다양하게 먹어 본 경험이 풍부한 엄마는 음식을 만들 때도 통이 크다.

 

김장철도 아닌데 혼자서 배추김치 100포기쯤 담가서 딸들 셋과 서울과 광주에 사는 동생네 집에 부치신다. 딸네 집에 올 때도 빈 손으로 오는 것은 부끄러운 일, 무엇이든 해 오신다. 나물이 저장 식품도 아닌데 한 달 내내 먹어도 될 만큼 해 오신 적도 있다. 나는 기쁨을 넘어, 극도로 감정 절제한 무표정이 되었다.

 

"엄마, 100일 동안 같은 음식만 먹으면 곰도 사람이 된다고. 그냥 좀 와!"

 

3년 전 봄부터는 엄마도 시골의 보통 어머니들처럼 쑥떡을 하신다. 그때 나는 둘째 임신 중이었는데 7개월째부터 조산으로 대학 병원에 누워 있었다. 엄마는 평일에는 영광 법성포에서 굴비를 엮고, 주말에는 내가 입원한 병원으로 오셨다. 엄청나게 많은 주사바늘을 꽂고 있는 나를 보면서 혼자 속으로만 생각하셨다.

 

'저러코(저렇게) 주사를 맞는디 애기가 온전하끄나?'

 

어느 날 엄마는 임신 여성에게 쑥이 좋다는 얘기를 들으셨다. 새벽 2시부터 오후 7시까지, 프리랜서로 하루 평균 세 탕의 일을 하니까 쑥 캘 수 있는 때는 저녁, 들판에 있는 쑥은 방앗간에 납품하는 '알바'를 하는 할머니들이 다 훑고 지나간 시간. 엄마 아빠는 할머니들이 공략할 수 없는 산에 올라, 몇 날 며칠 쑥을 뜯으셨다.

 

내가 둘째 낳은 뒤 엄마는 주말마다 우리 집에 오셨다. 아기 빨래를 하고, 밥 하고, 청소를 하고, 그 외 시간들은 아기를 안고 계셨다. 일생 단련된 강인한 팔뚝으로 우리 둘째를 들여다보면서 좋아하셨다. 아기가 건강하지 못했다면, 평생 그걸 짊어지고 살 딸의 운명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만으로도 지옥에 드나들었던 조여사는 말씀하셨다.

 

"사는 것이 이러코(이렇게) 기쁠 수가 없다이."

 

올 봄에는 먼저 쌀 20kg을 씻어서 물에 담가 놓고 집을 나섰다. 고추 심는 때여서 들판은 농약을 한 뒤라 이번에도 다시 산으로. 하필 비 온 뒤였다. 엄마는 40kg 짜리 '크다 큰 차대기' 가득 뜯어온 흙탕물 쑥을 '말강물'이 나올 때까지 씻으면서 힘에 부치셨다. "내가 진짜 늙었는가비야. 내 맘처럼 몸도 젊은 지만 알았는디…" 하며 잠깐은 헛헛해 하셨다.

 

엄마는 쑥을 씻다가 방앗간에 전화를 넣어 기계를 멈추지 말라는 '미안스런' 부탁을 하셨다. 완성된 떡은 그 즉시 택배로 딸네 집, 동생네 집으로 부치셨다. 당신 직장 사람들이랑 나눠먹을 생각을 미처 못 하셨다. 떡을 돌리지 않은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의 직장 동료들은 아직도 "조금자 언니, 떡 언제 한다요?"라고 묻는다.

 

나는 지난달에 친정집에 다녀왔다. 부모님은 외손주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가셨다. 그 뒤로 친정집 아파트 미끄럼틀은 우리 둘째가 "한 번 더" "한 번 더" 타자고 조른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산책길에서 본 포구의 흔한 갈매기들은 우리 둘째가 "갈매기다!"하며 오래도록 쳐다본 사랑스런 미물이 되었다.

 

그 뒤로 한 달, 엄마는 당신 생업에 지장 받을 정도로 외손주가 보고 싶어지셨다. 우리 집에 전화할 때마다 "느그 작은 아들은 지금 뭐 하신디야?"라고 물으신다.

 

"아따, 놀이터에서 느그 작은 아들이 미끄럼 타고 "한 번 더" "한 번 더" 한 것이 막 생각난다이. 일 하고 올 때는 "갈매기다!" 한허고(한 없이) 쳐다보던 것이 생생해야."

 

 

며칠 전에 엄마가 우리 집에 오셨다. 고추장 굴비와 함께. 지난해 10월부터 올 봄 3월까지, 엄마는 굴비 200마리를 베란다에 내놓고 말리셨다. 아빠랑 둘이서 말린 굴비를 두드려서 뼈와 살을 분리시켰다. 그리고 살은 찢어 고추장에 매실액, 마늘, 깨를 넣고 고추장 굴비를 만들어오셨다. 귀찮고 힘들어서 당신네 둘이서만 먹는다면 절대 하지 않으셨을 음식.

 

나는 일터에서 돌아오는 엄마 뒷모습을 본 적 있다. 배낭을 메고, 빨간 장화를 신고, 오로지 씩씩하게만 걷던 조여사. 기골이 장대하고 통 큰 당신의 유전자는, 딸들에게 물려주지 않은 이기적인 우리 엄마. 나는 까닭 없이 어깨에 힘이 빠지고 몸이 땅으로 꺼지는 날에는, 조여사가 만드신 반찬을 먹는다. 조여사의 힘찬 뒷모습을 생각한다.

 


태그:#엄마 조여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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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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