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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처음 본 앵두 나무, 그러나 "이게 앵두야~" 지식 자랑이 폭발하는 우리 둘째.
▲ 이게 앵두야~ 생애 처음 본 앵두 나무, 그러나 "이게 앵두야~" 지식 자랑이 폭발하는 우리 둘째.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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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째 꽃얄리군은 350만 년 전에 에티오피아에서 살았던, 화석으로 복원된 이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 사람 '루시'를 모른다. 그런데도 그녀가 살았던 모양새는 잘도 알고 있다. 자주 쪼그려 앉아서 손이나 나무 꼬챙이로 맨 땅을 파헤쳐 본다. 걷다가 나무 열매를 마주치면 오로지 본능만 앞선다. '루시'의 아들이 되어 "이거 땄어요" 하며 자랑 한다.

둘째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이거 <스타킹>에 나가야 되는 거 아니야?' 하고 고민했던 내 모성은 막 불타올랐다. 주말에는 어머니 텃밭에서 손톱만한 고추를 몽땅 따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다. 그 며칠 뒤, 안양에 사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김미영님이 서천에 앵두를 따러 왔다는 거다. 평일이라 달려갈 수 없었지만 '오! 바로 이거야' 하는 느낌이 왔다. 

6월 4일 토요일, 충남 서천군 문장면 북산리 앵두마을로 가는 길에는 따로 표지판이 없었다. 모내기가 한창이라 들에서 일하는 분들이 마을이 어디쯤에 있는지 알려주었다. 열매가 있는 나무들은 사람을 떠 보며 헷갈리지 않게 해줘서 좋다. 마을 들어서기도 전에 "나, 앵두나무요~" 하고 서 있는 곳에 멈추었다.

앵두가 지천... 야생으로 돌아간 느낌이네

'루시'적 삶의 본능은 둘째 아이에게만 있지 않았다. 남편과 나도, 큰 아이 제굴도 차에서 내리자마자 손을 뻗어 따고 봤다. "이게 앵두, 이게 앵두야~" 조잘대는 꽃얄리군 눈높이에 열매가 가득 열린 가지를 내려주었다. 아이는 앵두가 손에서 쉽게 뭉개지자 즉각 타임머신을 타 버렸다. "손 씻어줘요. 빨리 씻어줘요" 할 뿐이었다.

열매가 있는 나무들은 사람을 떠 보며 헷갈리지 않게 해 줘서 좋다.
나무가 말했다. "나, 앵두 나무요~"
▲ 앵두나무 열매가 있는 나무들은 사람을 떠 보며 헷갈리지 않게 해 줘서 좋다. 나무가 말했다. "나, 앵두 나무요~"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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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얄리군의 엄마가 '루시'가 아니라고 밝혀지는 순간부터 앵두 따기는 좀 시들해졌다. 물론, 남편과 큰 아이는 석기시대의 <체험, 삶의 현장>을 더 하고 싶어했다. 타인의 영역에 들어온 이상, 필연적으로 결투를 해야 하는 수컷의 본능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걸까? 무사와는 영 거리가 먼 남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앵두나무, 이렇게 따 먹어도 되는 건가?"
"그러니까…. 동네 들어가서 어르신들한테 물어볼까?"
"그러는 게 맞을 것 같은데."

나는 둘째 꽃얄리군이랑 마을로 들어갔다. 첫 집에서 만난 어르신은 마당에 서서 양치질을 하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오다가 앵두나무 있기에 따 먹었는데요, 그래도 돼요?"
"점잖게 따 먹어야지, 점잖게. 가지까지 다 꺾어서 도망가면 안 되고."
"그럴게요. 애기 보여주려고요."
"동네로 와. 이 길(마을 안으로)로 들어가면 이층집이 보여. 거기 큰 앵두나무가 우리 거니께 따 먹어. 점잖게."

집 울타리에도, 빈 집 터에도 앵두나무가 있었다. 내 어릴적 기억으로 앵두나무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감나무나 밤나무처럼 키 큰 나무가 아니었다. 그래도 각자 집 뒤안(뒤뜰)이나 집안 우물 옆에 있어서 확실히 '남의 것'이었다. 이 마을의 50년, 100년 묵은 200그루 앵두나무는 사람 손 타기 쉬운 곳에 있는데도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2층집은 찾았지만 "첫 들머리 집 어르신네 앵두나무가 나일세!" 하며 다가와주는 나무는 없었다. 모든 앵두나무의 키는 알맞게 크고, 열매는 탐스러웠다. 나무 아래서 그냥 주저앉아 있는데 2층집에 사는 할머니가 큰 대야에 낫을 넣고, 허리춤에는 주전자를 차고 나오셨다. 처음 본 우리에게 파격적인 인사말을 건네셨다.

"앉아 있지 말고, 앵두 따 먹어유."

이 마을 저 마을 통틀어도 좀처럼 할 수 없는 아기 구경.
할머니들 웃음소리가 커집니다.
▲ 앵두 나무 아래서 삼각 관계 이 마을 저 마을 통틀어도 좀처럼 할 수 없는 아기 구경. 할머니들 웃음소리가 커집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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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든이신 할머니는 앵두 따는 소임을 잊고 우리 둘째만 봤다. 마을 아래쪽에서 할머니 한 분이 더 오셨다. 이 마을에서도, 저 마을에서도, 좀처럼 할 수 없는 아기 구경. 두 분 사이에 낀 아이가 "세 살",  "이거(이 할머니)하고 저거(저 할머니)하고 똑같네, 쌍둥!"이라며 지식 자랑을 하자 할머니들은 큰 소리로 오래 웃으셨다.

어릴적에 친구네 집 앵두 좀 먹어 본 남편은 한웅큼씩 먹어야 맛있다고 내 손바닥 가득 앵두를 따서 줬다. 입안 가득 든 앵두씨를 일일이 골라내어 뱉고 있으면 어쩐지 좀스럽다. 한꺼번에 뱉어야 하는데 그걸 품위 있게 하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걸 아직 모른다. 나는 남편을 향해서 뱉고, 남편도 나한테 그랬다.

앵두나무는 따로 농약을 치지 않는다. 잎이 말려들어 가면 꼭 누에나 송충이 같다. 큰 아이는 따 먹던 앵두 잎에 왕 벌레가 있다고 착각하고는 마음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그래서 차에서 내리지 않고 있었는데 밖에서 노는 식구들 소리가 재밌게 들렸나? 다가오는 큰 아이에게 나는 앵두 씨를 확~ 뱉었다. 순간, 굳어지는 소년의 표정, 나는 '쩔었다'.

"제굴, 좋아하는 사람끼리 씨 뱉고 그러는 거야."
"……."
"엄마가 '포도 씨앗의 사랑' 읽어준 적 있던가? 거기서 나오잖아. 서로 얼굴에 포도씨 뱉는 거, 우리도 수박씨 뱉는 거 해 봤잖아."
"……."

앵두는 한 웅큼씩 먹어야 맛난다는 설이 있다네요...^^
▲ 앵두는 한 웅큼씩 앵두는 한 웅큼씩 먹어야 맛난다는 설이 있다네요...^^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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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되어가는 아들은 어렵다. 주말에 친구를 데려와 거실을 차지해 버릴 때면 쫓아내고 싶다. 3700여 년 전 함무라비 법전에도, 아들이 잘못하면 한 번은 봐 주고, 다음에는 쫓아내라고 했다. 자기 얘기도 금지, 사진도 찍지 말라고 하면서, 일기장에다 엄마는 1년에 열 번도 요리를 안 한다고 진실하게 써 버리는 것은 확실한 제굴만의 잘못일까.

나는 둘째 아이 손을 잡고 마을을 걷다가 앵두를 따고 있는 최정숙 할머니를 만났다. "사진 찍어도 될까요?"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절한다. 이 할머니는 달랐다. "찍어, 얼마든지유" 하며 앵두가 탐스럽게 열린 쪽을 찾아서는 자세를 잡아주셨다. 심지어 우리 아이에게는 앵두 가지를 끊어서 주기까지 하셨다.

앵두 마을의 모델 인심 1인자!
▲ 최정숙 할머니 앵두 마을의 모델 인심 1인자!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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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시세로 1킬로그램에 11.000원.
서천 장에서는 못 삽니다.
▲ 앵두는 말려서 팔아요! 작년 시세로 1킬로그램에 11.000원. 서천 장에서는 못 삽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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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시천면에서 스무 살에 시집와 앵두 마을에서 54년을 사셨다. 앵두꽃은 벚꽃 보다 더 일찍 피는데 진해 벚꽃보다 더 예쁘다고. 그 때 되면 마을 전체가 얼마나 이쁜지 보러오라고도 하셨다. 앵두가 익으면 열흘 안에 따야 한다. 비는 앵두 수확의 '웬수', 그보다 더 큰 적은 부지깽이 손도 빌려야 하는 모내기철과 겹친다는 점.

구경거리 앵두가 아닌 것이다. 마을에 와서 나와 우리 집 남성 동지들이 먹은 앵두 개수는 300알도 넘을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앵두를 살 수 있냐고 물었는데 안 판다고. 말린 것만 파는데 작년 시세로 1kg에 1만1000원, 어떤 집은 300만 원 어치를 팔았다고 하셨다. 가까운 서천장에 내다 팔지 않고, 서울에 있는 약방에서 알아서들 사간다고.

최정숙 할머니는 낯선 사람들을 귀찮아하지 않고 반가워 하셨다. 전라도 말투를 쓴 당신 때문에 손녀랑 딸이 실컷 웃은 얘기를 두 번이나 해 주셨다. 마당에 말리는 앵두 사진을 찍고 나오니까 할머니가 다시 한 번 모델이 되어주셨다. '지금, 여기'가 가장 좋다하면서도, 나이가 훤히 보이는 사진 속 내 모습을 못마땅해 하는 나는, 할머니한테 감동 먹었다.

돌아오는 차 안, 큰 아이는 침묵 권법을 쓰며 휴대폰 게임을 했다. 먼먼 옛날 '루시'는 자신의 아들이 언제 소년기에 들어섰는지를 정확하게 눈치 챘을까. 식구 앞에서는 잘 웃지 않는 소년의 특성, 실로 아찔하다는 그 세계를 들은 적 없는 둘째 아이만이 열 살 많은 제 형을 '찌럭찌럭' 건드렸다. 큰 아이가 피식, 웃었다.   

앵두는 점잖게 따야 하지만 아가가 예쁘면
가지를 끊어서 줄 수도 있슈~
▲ 이것은 설정! 앵두는 점잖게 따야 하지만 아가가 예쁘면 가지를 끊어서 줄 수도 있슈~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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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서천 앵두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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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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