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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여순사건의 흔적      

팔마체육관 뒤에 자리한 위령탑
▲ 순천 여순사건 위령탑 팔마체육관 뒤에 자리한 위령탑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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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에서 마주친 현대사의 비극은 나의 발걸음을 순천으로 이끌었다. 여행 본래의 목적지는 순천만의 일몰이었지만 그거야 나중에 처자식과 함께 관광 차 와도 되는 터, 이렇게 혼자 자유롭게 다닐 때 여순사건의 자취를 따라가고자 했다. 그것이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여수, 순천 지역에 대한 예의인 것 같았다.      

벌교에서 자동차로 30분 내달려 도착한 순천. 문제는 그곳에 여순사건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비록 여순사건이 여수에서 발발해 순천으로 확대되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순천에서도 많은 민간인들이 죽는 등 그 피해가 크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이곳에서는 그 아픔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걸까?      

그것은 아마도 여순사건이 가지고 있는 특징 때문일 것이다. 즉 제주 4·3항쟁을 진압하라는 정부의 명령에 국군 제14연대가 반기를 들며 시작된 여순사건은 거의 전 도민이 관련된 제주 4·3항쟁보다 그 규모가 작고, 이후 빨치산과 연관되어 이데올로기적인 색체가 더 강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이 그 역사적 실체 자체를 언급하기 어렵다.      

혹여나 여순사건을 좌우대립에 의해 일어난 민족의 비극이라고 이야기 했다가는 여순사건의 주체를 비호했다며 빨갱이로 몰릴 가능성이 매우 농후한 것이다. 그러니 여순사건의 흔적이 지워질 수밖에.      

슬픈 일이었다. 많은 희생자를 냈던 비극적인 사건이 시시비비는 차치하고서라도 제대로 기록되지 않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간다니. 그것은 결국 우리가 온고지신의 기회를 잃었다는 것이며, 그만큼 비극적인 역사가 재현될 가능성이 높아짐을 의미한다. 어쨌든 우리 사회는 아직 분단구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바, 역사의 퇴행을 항상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그 명칭조차 통일되지 않았다
▲ 여순사건의 개요 아직까지 그 명칭조차 통일되지 않았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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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에서의 여순사건 흔적을 찾아 겨우 도착한 곳은 팔마 체육관 뒤에 서 있는 여순사건 위령탑이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세워져 있던 위령탑은 한 마디로 생뚱맞았다. 탑이라 하면 보통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열린 공간에 세워지는 기념비이거늘, 이건 구색만 맞추려고 한 건지 위령탑은 체육관 뒤 구석,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한 위령탑. 결국 그것은 순천지역에서 여순사건 관련자 유족들이 가지고 있는 위상이었다. 하기야 아직까지도 여순반란사건이냐 여순사건이냐 하면서 그 명칭마저도 통일시키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니던가. 그 위령탑을 세운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아직 남아 있는 여순사건의 흔적들     

위령탑을 보고 난 뒤 곧장 여수로 향했다. 순천은 썰렁한 위령탑 밖에 없었지만, 여수는 여순사건이 발발한 곳으로 그 피해가 컸던 만큼 최소한 흔적만은 남아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아픈 만큼 상처는 깊은 법 아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여수에는 형제묘, 만성리 학살지 등 여순사건과 관련된 여러 유적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여순사건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 엇갈리는 만큼 그 관리상태가 얼마나 양호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어쨌든 순천과 달리 여수는 그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니 그들의 충격과 아픔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스산한 모습의 여수 형제묘
▲ 형제묘 스산한 모습의 여수 형제묘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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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형제묘는 검은 모래사장으로 유명한 만성리해수욕장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순사건 당시 군경에 의해 학살된 수백 명의 희생자 중 그 시신을 찾을 수 없는 125명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형제묘. 그 이름은 '죽더라도 형제처럼 누워있으라'는 유족들의 바람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형제묘라. 비록 죽은 이들을 위해 붙여졌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저 이름은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시신을 찾을 수 없었던 유족들이 저 봉분을 만들면서 형제보다도 더 끈끈한 관계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감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억울함만큼 가장 확실한 기제가 있던가.      

게다가 형제묘는 쉽게 찾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국가가 설립한 진실화해위원장 명의 안내판을 찾아 볼 수 있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은 금기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여순사건 희생자의 억울함을 조금만 언급 하더라도 빨갱이로 몰리는 야만의 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곳에서 만난 이들이 응당 형제처럼 끈끈한 사이가 될 수밖에.  
  
주변에 널려 있는 무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형제묘에 서린 묻힌 자와 묻은 자들의 원한 때문? 어쨌든 형제묘와 그 주위는 스산하고 서늘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에 와서 원한의 한숨을 쉬었는지 아래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그 어느 곳보다도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언제쯤 그 원한이 풀릴 수 있을는지.      

여수에 남아있는 여순사건의 흔적
▲ 만성리 학살지 여수에 남아있는 여순사건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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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무언
▲ 위령비의 뒷변 유구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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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묘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만성리 학살지가 있었고 그곳에는 여순사건 희생자위령비가 세워져 있었다. 순천의 위령탑과 마찬가지로 절벽 한 귀퉁이에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이 썰렁해 보였지만, 그래도 바로 이곳이 많은 민간인들이 묻힌 학살지라고 하니 영령들을 위로하는데 있어서는 제 격인 듯 보였다.

위령비의 백미는 비의 뒷면에 적혀 있는 구절이었다.

1948년 10월 19일 …… 2009년 10월 19일.

그것은 61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긴 세월을 버텨야 했던 유족들의 마음이었다. 아직까지도 차마 앞에 나서 자신들의 억울함을 이야기 못하는 그들. 과연 그들의 원한이 풀리는 건 언제쯤일까? 정녕 통일이 되어야 좌우익 대립으로 빚어진 민족사의 비극들이 제대로 빛을 볼 수 있는 것일까?  

일제가 뚫은 터널.
▲ 마래터널 일제가 뚫은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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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디 좁은 공간
▲ 마래터널 내부 좁디 좁은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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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리 학살지 옆에는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마래터널이 그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바닷가 낭떠러지를 생짜로 뚫은 마래터널. 단단한 토질 때문에 공사가 어려웠던지 터널은 차 1대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고, 터널 중간 중간에 마련된 빈 공간에 반대편 차선의 차량이 잠시 정차할 수 있는 구조였다. 결국 이 터널도 주변 지역의 수탈을 위해 일제가 뚫었을 터,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고생했을까.      

결국 마래터널이나 만성리 학살 모두 이 땅의 민중들이 얼마나 고된 삶을 살아 왔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었던 격동의 세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던가. 살아남은 자로서, 그리고 그 후손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억울한 희생의 전말을 밝히는 일일 것이다.      

흥국사 대웅전
▲ 석양의 흥국사 흥국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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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달이 보인다
▲ 초저녁 흥국사 저 멀리 달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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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 여수 흥국사를 잠깐 들렀다. 이미 서산에 해가 기우는지라 사찰을 여유 있게 돌아볼 수 없음이 아쉬울 뿐이었다.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영취산 진달래와 함께 사찰을 둘러보리라.

어차피 '나라가 흥(興)하면 절도 흥하고 이 절이 흥하면 나라도 흥할 것이다'라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흥하기는커녕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으니, 사찰 역시 지금 보다는 나중에, 나라가 다시 흥할 때 둘러보는 것이 낫겠거니.      

여수를 빠져나오는데 여천공단들의 수많은 불빛들이 시큼한 냄새와 함께 시야에 들어왔다. 보기 드믄 장관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의 불편함은 어쩔 수 없었다.

저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일제 강점기와 해방정국을 거쳐 산업화까지 이르는 거센 역사의 파고는 가장 약한 고리인 민중들을 그 희생양으로 삼지 않았던가.

일제 강점기 때는 마래터널공사의 부역자로, 해방정국 때는 여순사건의 빨갱이로, 산업화 때는 근로의 역군으로 산화해 간 이름 없는 수많은 민초들. 그분들께 심심한 애도를 드리고자 한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정국 그리고 산업화
▲ 근대화의 이면 일제 강점기와 해방정국 그리고 산업화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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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여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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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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