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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성은 누구에게나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푸근하고 친근감이 가는 동네다. 어느 식품회사는 아예 라면 이름에 이 지역명을 사용하기까지 했을 정도다. 예로부터 산수가 온화하여 자연 재해가 없고 각종 물산이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고장, 편안한 고장이라 여겨져 왔던 곳이다. 그래서 동네 이름이 '안성(安城)'인가 보다.

 

안성은 호반의 도시라고 할 정도로 크고 작은 저수지들이 많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 '섬'에 나왔던 멋진 분위기의 고삼 저수지도 그중 하나), 한우들을 먹여 키우는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호밀밭 목장, 노래경연이 펼쳐지는 정겨운 오일장터, 모내기가 한창인 풍요롭고 풋풋한 연둣빛 농촌풍경등은 신록의 오월에 그 어디보다 자전거 여행하기 안성맞춤인 곳이기도 하다.

 

고속, 시외버스를 타고 안성에 가는 방법도 있지만, 이번 여행땐 수도권 전철 1호선에 애마 자전거와 같이 타고 평택역까지 간 다음 안성을 향해 달려가 보았다. 도심과 농촌, 국도와 지방도, 하천길을 지나는 다양한 길이 여행자를 맞이하고, 그만큼 다양한 풍경을 접하며 풍성한 여정을 경험한 길이었다. 참고로 안성여행은 매달 2일, 7일로 끝나는 날 떠나면 더욱 좋다. 안성시내 한가운데서 크게 펼쳐지는 안성 오일장을 만날 수 있어서다.      

 

전철은 평택역까지 거의 두 시간을 달려가 멀리 여행 떠난 기분을 들게 한다. 음악을 들으며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깨에 뭔가 닿는 느낌이 든다. 정체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단잠에 빠진 나이 지긋한 아저씨. 아가씨와 달리 아저씨의 머리는 왜 그리 무거운지. 어떻게 떼어놓을까 궁리를 하고 있던 차에, 건너편에 앉은 몇 명의 승객들도 과연 내가 어떻게 대처할지 자못 궁금한 표정들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구세주처럼 날 구한 건 우렁차게 울리는 아저씨의 휴대폰 벨소리였다.   

 

 

푸르른 호밀밭에서 안구정화를 하다. 

 

평택역은 버스터미널, 기차역, 전철역까지 모여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과 상가들로 무척이나 붐비고 번화하다. 역 앞 넓은 광장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외국인들을 구경하고 평택대학교 방면을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신나게 달린 지 채 십여 분도 지나지 않아 도심 한편에 연둣빛의 너른 들판이 나타난다. 눈부신 햇살아래 농부, 농모님들이 논에 모를 심고 밭일을 하고 있다. 

 

사람이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이루어낸 수많은 것들 중에서 논보다 위대한 창조물은 없었다던 최수연 사진작가의 인상적인 사진집 <논-밥 한그릇의 시원(始原)>에 나오는 그 풍경들이다.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우리의 유전자 속에 각인되었을 논과 밭이 이제 10~20년이 지나면 저 농부들과 함께 스러져버릴 운명에 놓여 있다. 내 다음세대의 자전거 여행자는 어떤 풍경을 마주하며 이 길을 달리게 될까 궁금해진다.

 

안성시 공도읍에 들어서 동네에 있는 '만정자전거포'를 찾아간다. 몇 년 전 이곳에 도착해서 안성목장을 찾을 때 길을 알려준 곳으로 백발이 성성한 주인 아저씨가 아직도 자전거포를 꾸리고 계신다. 이름도 정겨운 가게를 둘러보면서 모른척하고 안성목장 가는길을 다시 물어본다. 공도읍 버스터미널 건너편 길을 따라 20여 분 쭉 가면 목장이 나오는데, 차로 가는 길과 달리 오솔길 같은 길도 좋고 시골풍경과 함께 넓게 펼쳐진 초록의 배밭 과수원이 목장에 앞서 먼저 맞이해 준다.


커다란 축사 안에서 무료하게 서있는 소들과 눈을 맞추며 30만 평이나 된다는 안성목장 호밀밭으로 들어간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땐 청보리밭으로 알았던 푸르디 푸른 호밀밭 사이에 미국에서 건너왔다는 키 큰 버드나무 미류(美柳) 나무는 여전히 그림같고 낭만적이다. 산책로를 걸으며 부는 바람에 춤을 추듯 파도가 치듯 일렁이는 진초록 빛깔의 호밀밭을 보노라니 정말 '안구정화'를 제대로 하는 기분이다.

 

사람들에게 기분좋은 느낌을 전해준 호밀은 곧 목장에 사는 소들의 사료로 쓰이고, 여름이 오면 호밀밭은 옥수수밭으로 바뀐다고 한다. 연인, 가족 단위의 관광객은 물론 사진가들에게도 유명한 출사지로 인기가 많아서 그런지 내년엔 안성농협에서 팜랜드라는 관광지로 조성하면서 입장료도 받는다고 한다. 이 호젓하고 평화로운 풍경이 많이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   

 

 

안성 오일장에서 펼쳐지는 '나가수' 공연

 

중앙대학교와 대덕면 사무소를 지나 처음 나오는 갈림길에서 옥산교, 안성경찰서 방향으로 우회전을 한다. 차도에서 벗어나 편안한 라이딩을 즐길 수 있는 안성천 산책로를 타고 안성 오일장터가 있는 시내까지 갈 수 있다. 새하얀 백로가 명상을 하고 있고 이름모를 새들과 나비들이 지저귀며 날아다니는 풋풋한 안성천길은 바로 옆에 동네가 들어서 있어 7,80년대 하천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안성농민슈퍼'에서 간식과 음료수를 사 먹다가 운좋게도 발견한 우전 대장간, 신창 정미소, 고바우 만화방, 연탄 직매소···동네 구경을 안 할 수가 없게 하는 반가운 풍경들이다. 골목길에 서니 나같은 외지인에겐 귀한 장면들이 많아 흥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지나치는 동네 주민과 아이들은 그런 내가 더 신기한 표정이다.    

 

오일장이 열린다는 안성종합버스터미널에 겨우 도착했지만 장터의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는다. 이상하다 했더니 오일장은 시내에 있는 구버스터미널 혹은 안성시장 부근이라고 터미널안 관광안내소 직원이 알려준다. 허무함에 팍팍해진 허벅지를 주무르며 안성시내로 들어서니 비로소 오일장날다운 북적임이 멀리에서도 느껴진다.

 

매달 2일과 7일마다 열리는 안성 오일장은 조선후기까지 전주, 대구와 함께 서울의 관문으로 3대장에 들었을 만큼 규모가 컸던 시장이라고 한다. '한양장보다 한 두 가지는 더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물건이 많고 싸기로 유명했던 장터였다고 하며, 예로부터 장인이 많았던 고장답게 주문대로 유기(놋그릇)를 잘 만들어 내 '안성맞춤'이라는 말을 탄생하게 한곳이다.

 

이렇게 유서깊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 안성장도 주변에 이마트와 하나로마트등 대형유통마트의 잇따른 개장으로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고 한다. 오일장의 두 터줏대감격인 안성시장과 중앙시장을 돌아보다 실제로 하나둘 문을 닫은 불꺼진 가게들을 보니 정감가는 재래시장이 희귀해진 서울처럼 돼가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오일장터의 한구석에서 요즘 인기리에 방영중인 TV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 버금가는 분위기의 노래판이 벌어지고 있다. TV와 다른 점이 있다면 막걸리를 얼큰하게 드셨는지 무대 위의 가수들을 무색하게 하는 막춤 추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출현. 오일장의 방청객들은 열창을 하는 가수들에게 손뼉을 치느라 막춤꾼을 보며 웃느라 바쁘다.

 

 

복을 불러오는 호랑이 마을

 

안성 오일장에서 국화빵, 순댓국밥, 잔치국수 등 풀코스로 배불리 식사를 하고 차량통제를 하는 경찰관 아저씨에게 물어물어 호랑이 벽화 마을이 있는 금광면을 향해 핸들을 돌린다. 길은 1차선의 차도 겸 농로로 마을버스와 경운기가 차례대로 지나가는가 하면, 양옆으로 모내기가 절정인 연두색 들판이 풍요롭기만 하다. 얼마 안있어 '두리마을'이라는 표지석이 보이는데 이곳에 호랑이 벽화마을인 '복거마을'이 있다. 

 

안성시 금광면 복거(福巨) 마을의 본래 이름은 복호리다. 동네를 둘러싼 산의 모양이 호랑이가 엎드린 형상이라는데서 유래한 마을이다. 이런 비슷비슷한 농촌마을 7개가 모여 두리마을이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 사이사이 작은 길을 따라 짖거나 반기는 동네 개들의 마중도 받고 축사의 소들과 눈인사도 하면서 설렁설렁 여유롭게 동네 한바퀴를 돈다. 문 열린 어느 집 마당위로 까맣고 날쌘 몸매의 작은 새가 바쁘게 왔다갔다 하기에 자세히 보았더니 글쎄 담 한쪽에 귀여운 새끼들이 꼬물대고 있는 제비집을 오가는 것이다. 가까이 가서 보려는데 눈치없는 마당의 개들이 짖어대는 통에 떨어져서 구경만 했다.    

 

담벼락에 호랑이, 소, 두루미, 주민들의 모습이 재미나게 그려진 복거마을은 아예 자전거에서 내려와 걷게 하는 곳이다. 익살스러운 표정의 담배 피우는 호랑이, 담벼락의 창문 구멍을 이용한 소의 얼굴등 그림들이 농촌마을의 모습과 잘 어울려 흐뭇하고 보기 좋다. 정답고 진귀한 풍경을 보러 외지인들이 많이 찾아오는데도 주민들의 표정이 불편해하지 않고 밝아서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수령이 족히 백년은 넘었을 마을의 수호신이 분명한 거대한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누워 쉬다가 눈을 뜨니 하늘을 가린 나무속이 울창한 밀림같다. 그속에선 쉴 새 없이 새소리들이 들려오고 느티나무는 어찌나 풍채가 큰지 사진 속에 다 담기지도 않는다. 아담하고 소박한 마을에 이런 압도적인 느낌의 나무가 살고 있다니 신기하다. 눈이 마주친 동네 주민분에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덕에 동네 인근에 있는 물 맑고 풍광 좋다는 금광저수지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주민 할아버지는 남사당패 이야기도 해주셨는데 주말마다 공연을 하니 꼭 보라고 일러 주신다. 남사당패는 조선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서민층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유랑 연예단으로 그중 안성 남사당이 가장 유명했다고 한다. 남사당패 사상 유일무이한 여자 꼭두쇠이자 천민 신분으로 정3품의 벼슬까지 올랐던 바우덕이는 안성의 대표 재인(才人)이다.    

 

가까운 거리에 고향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정경을 간직한 곳이 있다는걸 감사히 여기며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안성종합버스터미널로 향한다. 버스에 싣기 위해 접어놓은 자전거를 신기하다며 들었다 놨다 하는 버스 기사님들과 농담을 주고 받으며 서울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휴일 하루가 마치 1박 2일처럼 길고 풍성하게 느껴지는 고장이다.   

 

덧붙이는 글 | 5월 22일에 다녀왔습니다.
안성시청 문화체육관광과 (031)678-2495


태그:#자전거여행, #안성, #안성오일장, #복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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