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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시비로, 대구 중구 달성공원에 있다.
▲ 상화 시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시비로, 대구 중구 달성공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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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화두다. 그것도 천천히 걷는 길이 대세다. 제주도 올레길 등 각 지자체마다 길을 개발하느라 무척이나 분주하다. 물론 아름답고 유서 서린 옛길을 복원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것이 뜻같지 않으면 풍광 등 장점이 있는 새길을 개척하는 데에도 전혀 망설임이 없다.

대구가 내놓을 만한 '자연의 길'은 대구시 수성구 파동에서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을 오가는 헐티재 고갯길이다. 개울과 나란히 붙은 채 이별 없이 줄곧 함께가는 길의 '강 같은' 자연스러움, 길을 따라가며 쉼없이 피고 자란 꽃과 나무들의 순수함, 고갯길이면서도 아주 정상 부분만 제외하면 대체로 굽이가 완만하고 평탄하여 길손의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주는 단아함, 그리고 일연 스님과 신라 법흥왕의 자취가 남아 있는 용천사와 봉기리3층석탑(보물 제 113호)의 역사성이 이 길의 자랑거리다.

그렇다면 대구가 뽐낼 만한 '역사의 길'은 어디일까. 단연 '상화의 길'이다. 앞산 달비골 아래부터 화원까지 이어지는 대도로 일원의 공식 명칭이 '상화로'이지만, 그 길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주변의 아스팔트 차도들이 복개도로 끝자락에 있는 상화의 묘소 덕분에 상화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그 길들은 달리는 내내 그저 복잡하고 시끄러운 도시 도로의 인상만 줄 뿐 상화의 '숨결'이 살아 움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밝은 햇살이 고택 가득 들어왔다. 그러나 엄혹한 식민지 시대를 산 상화는 이런 따스함을 느껴보지 못했으리라.
▲ 상화고택 밝은 햇살이 고택 가득 들어왔다. 그러나 엄혹한 식민지 시대를 산 상화는 이런 따스함을 느껴보지 못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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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공원에서부터 상화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우리나라 옛성의 축조 방식을 잘 말해주는 역사유적인 탓에 국가사적 제 62호로 지정되어 있는 달성공원에 가면, 호랑이도 있고 코끼리도 있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시비인 '상화시비'가 있다. 1948년의 일이다.

상화는 이미 18세인 1919년 대구의 3.1운동 모의에 가담했다가 발각나 서울로 달아난 끝에 도피 생활을 한다. 22세인 1923년에는 일본 유학 중 광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일인들이 조선인을 대량 학살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귀국, 김기진 등과 함께 무산계급 문예운동체 '파스클라' 결성, 카프 발기인 참여(1925년), 절창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는 등 (1926년) 민족적 항일문예 운동에 뛰어든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발표 때문에 시대정신의 상징이었던 동인지 <개벽>은 판매 금지 처분을 받는다. 상화는 1928년 독립자금 마련과 관련하여 대구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고, 1936년에는 독립군 장군인 형 이상정을 만나러 만주로 건너가기도 한다. 하지만 귀국하는 길로 바로 체포되어 일제로부터 큰 고초를 겪는다.

1939년에는 2년간 교사로 근무했던 교남학교를 그만둔다. 나라를 빼앗긴 약소민족은 주먹이라도 세어야 한다면서 학생들에게 권투를 가르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독립군 장군인 형을 만나러 만주에 다녀오는 등의 반일 행동을 일삼는 민족시인 이상화를 일제가 가만 방치할 리는 없는 일이었다.

일제는 불량선인이 학교 교가의 가사를 작성한 것은 문제라며 상화의 가택을 수색하고, 그의 시 원고와 고월 이장희의 유고까지 압수한다. 1943년 4월 25일, 상화는 <국문학사>를 저술하려던 뜻도 이루지 못한 채 고생 끝에 얻은 병 때문에 현재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84번지에 보존되어 있는 '상화고택'에서 숨을 거둔다.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에 있다.
▲ 독립군 장군 이상정(상화의 형)과 민족시인 이상화(오른쪽)의 묘소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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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상화고택에서 문학제와 상화시인상 행사

상화고택에서는 해마다 '이상화 문학제'와  '상화 시인상 시상식'이 열린다. 올해는 5월 20일(금) 오후 6시부터 시작된다. 주최는 이상화기념사업회(회장 윤장근).

이상화 문학제는 식전행사인 아미국악단의 풍물로 시작되어 추모시 낭송(문태영 시인), 음반제작기념 시노래(시노래풍경 진우), 춤과 소리로 이루어지는 국악 한마당(권미희), 동요 메들리(이춘호) 등으로 구성된다.

1985년 제정된 상화 시인상의 올해 수상자(26회)는 송재학 시인이다. 수상 시집은 <내간체를 얻다>. 1986년 등단한 송재학 시인은 그 동안 <얼음시집>, <살레시오네 집>, <푸른빛과 싸우다> 등의 시집을 발간했고, 김달진문학상, 대구시협상, 대구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한 중견시인이다.

송재학 시인은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상화의 낭만주의는 설마 도저한 허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살과 뼈의 노래처럼 보여집니다. (중략) 그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상화시인상 역시 그런 상화의 지향성에 대한 깨우침으로 저에게 다가옵니다'하고 행사 리플릿에 수상 수감을 밝혔다.  

사진은 올해의 상화시인상 수상자 송재학 시인(왼쪽)과 행사 리플릿이다. 행사는 5월 20일 오후 6시부터, 상화고택에서 펼쳐진다.
▲ 대구에서는 해마다 상화문학제가 열린다. 사진은 올해의 상화시인상 수상자 송재학 시인(왼쪽)과 행사 리플릿이다. 행사는 5월 20일 오후 6시부터, 상화고택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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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대표적 '역사의 길'로 달성공원의 상화시비- 계산동의 상화고택- 달성군 화원읍의 상화묘소로 이어지는 길을 추천했다. 이 길은 일제 강점기를 불꽃처럼 살다가 해방도 보지 못한 채 스러져간 민족시인 이상화를 통해 나라와 민족공동체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답사로이다. 이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국민적 지지를 완벽하게 얻은 시인의 길인 만큼, 찾아오는 외지인들에게 자랑스레 내놓아도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상화의 길' 답사 여정 예시

걸어서 갈 길과 차량을 이용해야 할 길을 구분하고, 답사하는 김에 같이 밟아볼 만한, 민족의식 고취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들을 추가하여 여정을 정해보면 아래와 같다.

(1) 달성공원 상화시비 (이후, 상화고택까지는 걸어서 답사)
(2) 서문시장 (대구지역 3.1운동 최초 거사지)
(3) 계성학교 (대구지역 3.1운동 거사 계획지, 독립선언문 인쇄 등)
(4) 3.1운동로 (계성학교 건너 선교사 사택 옆길)
(5) 상화고택 (대문을 마주하고 서 있는, 국채보상운동 주역 서상돈 고택도 방문)
(6) 상화 묘소 (차량으로 이동)

대구지역 3.1운동시 가장 먼저 만세소리가 터져나온 곳.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준비한 계성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은 학교 담장 너머에 있는 서문시장의 장날을 활용하여 거사를 터뜨렸다.
▲ 서문시장 입구 대구지역 3.1운동시 가장 먼저 만세소리가 터져나온 곳.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준비한 계성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은 학교 담장 너머에 있는 서문시장의 장날을 활용하여 거사를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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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은 학교 건물 지하에서 독립선언문을 인쇄하였고, 학교 담장 너머에 있는 서문시장의 장날에 사람이 운집하는 것을 활용하여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 대구3.1운동 거사 계획지 계성학교 계성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은 학교 건물 지하에서 독립선언문을 인쇄하였고, 학교 담장 너머에 있는 서문시장의 장날에 사람이 운집하는 것을 활용하여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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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시장을 출발한 3.1만세운동 시민들은 계성학교 건너편의 선교사 사택 일대를 관통하는 길을 지나 상화고택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이 길을 3.1운동로라 부른다.
▲ 3.1운동로의 선교사 주택 서문시장을 출발한 3.1만세운동 시민들은 계성학교 건너편의 선교사 사택 일대를 관통하는 길을 지나 상화고택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이 길을 3.1운동로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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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 선생의 고택이다. 그의 묘소는 대구시 수성구 범물동에 있다.
▲ 상화고택과 대문을 마주하고 서 있는 서상돈 고택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 선생의 고택이다. 그의 묘소는 대구시 수성구 범물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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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화의 길'에 추가할 수 없는 안타까운 부분

상화가 교사로 근무하면서 아이들에게 항일정신을 고취했던 교남학교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상화가 아이들에게 걸었던 꿈의 흔적은 그가 퇴직한 이후인 1942년에 교남학교가 수성동으로 옮기면서 함께 사라졌고, 학교는 1988년에 또 다시 만촌동으로 이전하였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민족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은 지금의 대구시 수성구에 있는 속칭 '들안길' 일대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 길은 술집과 식당, 모텔 등으로 가득찬 현대판 유흥지가 되어버려 도저히 답사로로 추천할 수가 없다. 비록 (들안길 끝인) 수성못 둑에 새로운 상화시비를 하나 세웠지만, 그것으로 어찌 휘황찬란한 홍등의 늪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민족시인 이상화가 바라보며 울분을 토했던 '빼앗긴 들'. 당시엔 일제에 빼앗긴 들판이었는데 지금은 술집, 모텔 등에게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 '빼앗긴 들'의 요즘 풍경 민족시인 이상화가 바라보며 울분을 토했던 '빼앗긴 들'. 당시엔 일제에 빼앗긴 들판이었는데 지금은 술집, 모텔 등에게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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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화의 길' 외에 대구에서 볼 수 있는 역사적 길들 

'상화의 길' 이외에 대구에서 가볼 만한 역사적 길은 '왕건의 길', 그리고 '국채보상로'와 '3.1운동로'가 있다. 그러나 왕건의 길은 그가 견훤에게 대패하여 도망치고 대신 장군 신숭겸이 순절한 사실(史實)에 붙은 전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길이다. 즉, 왕건의 길은 패전의 쓰라린 상처에 불과한데다, 왕건 본인이 우리 역사에서 크게 추앙받는 인물은 못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길은 흠결없이 추천받을 수준은 아니라는 뜻이다.

국채보상로는 역사상 의의로 보아 국가적으로도 대단한 길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수성구 범물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국채보상공원의 주역 서상돈 선생의 묘소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 관련 유적이 없고, 국채보상공원과 기념비(대구시민회관 앞) 또한 근래에 조성된 것이기 때문에 답사의 의미는 실로 미미하다. 물론  몇 년 전부터 행정기관과 민간에서 논의를 하고 있는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건립되면 사정은 많이 나아지리라.

3.1운동로는 대구지역 삼일운동의 모태인 계성학교, 처음 만세운동이 시작된 (계성학교 담장 너머의) 서문시장, 행진로인 선교사 사택단지 옆길, 그리고 상화고택과 서상돈고택을 지나 시내로 이어진다. 이 길은 교육적으로 아이들과 한번은 반드시 걸어야 할 길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정말 대단한 길'이라고 중언부언 자랑할 만큼, 타지에는 절대(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그런 길 수준은 아니다.

사진은 장군을 기리는 표충사와 그 뒤로 보이는 왕산. 왕건이 넘어서 도망을 쳤다고 해서 왕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왕건 대신 순절한 신숭겸 장군 유적지 사진은 장군을 기리는 표충사와 그 뒤로 보이는 왕산. 왕건이 넘어서 도망을 쳤다고 해서 왕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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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공원의 주역 서상돈의 묘소는 대구 수성구 범물동 끝의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다.
▲ 서상돈 묘소 국채보상공원의 주역 서상돈의 묘소는 대구 수성구 범물동 끝의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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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2011대구방문의해, #이상화, #서상돈, #빼앗긴들에도봄은오는가, #계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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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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