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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상인 비로봉(철탑이 있는 곳)과 동봉의 겨울 모습
▲ 팔공산 비로봉과 동봉 최정상인 비로봉(철탑이 있는 곳)과 동봉의 겨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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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지인들은 "대구" 하면 섬유도시(17.8%), 사과(17.2%), 보수성(15.9%), 덥다(12.3%), 그리고 팔공산(6.4%)을 떠올린다고 한다(영남일보 2011년 5월 3일). 섬유와 사과는 이제 대구와 거리가 멀고, 보수성과 더위는 자랑거리라고 할 수 없으니, 팔공산밖에 남는 게 없다. 왕년에는 '교육도시'도 대구의 이미지였는데, 그건 이제 아주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팔공산, 외지인들에 널리 알려져 있다는 그 팔공산은 과연 어떤 곳인가.

팔공산은 대구의 북쪽머리 산이다. 남쪽머리 산은 비슬산이다. 개교한 지 105년이 넘어 대구경북 지역 교육사의 산 증인 역할을 하는 계성고등학교의 교가도 이를 증명한다.

'앞에 섰는 건 비슬산이요, 뒤에는 팔공산 둘렀다.'

팔공산은 앉은 면적이 122㎢나 되고, 능선의 길이만도 20km나 되는 광활한 규모를 자랑하는 대구 지역의 명산이다. 그래서 둘레에 여덟 고을을 둘렀다는 뜻에서 산 이름이 '팔공산'이 되었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팔공산이라는 이름이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인데, 그 당시까지만 해도 공산 둘레에는 해안(解顔, 지금의 불로동 북쪽 일대), 하양(河陽), 신녕(新寧), 팔거(八居, 지금의 대구시 북구 칠곡 일대), 부계(缶溪) 등 다섯 고을[縣]만 있었기 때문이다. 

송림사 우측 도덕산(연경동에서 도덕암으로 오른 봉우리)에서 바라본 팔공산의 풍경이다.
▲ 도덕산에서 바라본 팔공산 송림사 우측 도덕산(연경동에서 도덕암으로 오른 봉우리)에서 바라본 팔공산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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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공산이었는데 '팔'이 덧붙어 산 이름이 팔공산으로 바뀐 까닭을 동수대전의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동수대전은 왕건과 견훤이 크게 대결한 공산싸움을 말한다. 이 혈투를 동수대전이라 부르는 것은 동화사 앞에서 싸움이 벌어졌다는 뜻이다. 동수(桐藪)가 곧 동화사의 신라 때 이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순절한 신숭겸, 김락 등의 여덟 장군을 기리는 뜻에서 팔공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 이 전투에서 여덟 장군이 순절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대구은행 사외보 <향토와 문화 제1권>에 '팔공산의 지명 유래'를 쓴 문경현 전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팔공산 이름이 "사대주의 모화(慕華)사상가들이 중국의 지명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중국 안휘성 봉대현 동남쪽에 있는 팔공산에서 북조 전진왕 부견과 남조 동진 효무제 사이에 대전투가 벌어졌을 때 부견이 참패를 했는데, 왕건이 견훤에게 처참하게 진 것을 이에 비견하여 산 이름을 그렇게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녕 그렇다면, 이제는 팔공산에 본 이름을 찾아주어 '공산'이라 부르는 것이 어떨까.

사대적 이름 '팔공산' 대신 우리 이름 '공산'으로 부르자

공산은 본래 신라 5악의 하나였다. 동악(토함산), 서악(계룡산), 남악(지리산), 북악(태백산), 그리고 중악(공산)이 바로 그것. 신라는 이 다섯 산의 산신에게 공식적으로 제사를 지냈으니, 이 다섯 산은 신라 사람들에게 영산(靈山)이었다. 그들은 특히 공산을 신라 국토위 중심에 있는 가장 신령스런 산으로 숭배하였으므로, 아버지와 같이 여겨 부악(父岳)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염불암은 동화사에서 동봉으로 오르는, 팔공산의 대표적 등산로의 중간 지점에 있다.
▲ 동화사 염불암 염불암은 동화사에서 동봉으로 오르는, 팔공산의 대표적 등산로의 중간 지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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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에 오르는 길의 대표는 동화사에서 염불암을 거쳐 동봉과 비로봉으로 걷는 등산로이다. 영천 은해사에서 오르는 길, 갓바위를 거쳐 능선을 일주하며 동봉에 이르는 길, 부인사에서 서봉으로 오르는 길, 그리고 가산산성을 거쳐, 또 수태골을 타고, 케이블카 아래로 등등 숱한 길이 있지만, 그래도 대표격 등산로는 동화사에서 염불암을 거치는 바로 그 길이다. 왜냐하면, 공산에 온 이상 동화사를 둘러보지 않고 하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동화사는 임란 당시 사명대사가 승병을 지휘했던 곳이다. 지금도 그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고, 초상화인 그의 진영(眞影)도 보관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동화사는 문화재의 보물창고이다. 경내로 들어가는 옛길 들머리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 좌상(보물 243호), 오르막을 거슬러 올라가 금당암 앞에서 만나게 되는 당간지주(보물 254호)와 부도(보물 601호),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인 금당암 뜰의 3층석탑(보물 248호), 비로암의 3층석탑(보물 247호)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244호) 등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기타 문화재들도 군집을 이루고 있다. 볼품없이 크기만 할 뿐 예술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지만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데에는 금메달 몫을 하는 통일대불도 동화사에 들른 이상 아니 볼 수는 없다.

오른쪽 바위에 '보물'인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 동화사 입구 오른쪽 바위에 '보물'인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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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에는 동화사 말고도 고찰이 많다. 그 중 가장 도드라지는 절이 파계사이다. 동화사에서 그리 멀지 않다. 이 절은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220호인 영조대왕 도포가 발견된 곳으로 조선 후기의 이른바 왕실 원당(願堂) 사찰이었다. 원통전에는 보물 992호인 목조관음보살좌상이 있고, 한참 가파른 등산로를 걸어 올라가야 들어갈 수 있는 부속암자 성전암에는 영조가 11세 때 쓴 자응전(慈應殿)이란 편액도 보관되어 있다. 

동화사와 파계사 중간 지점에 있는 부인사도 한 번 쯤 가볼 만한 곳이다. 이 절은 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가 몽고의 2차 침입 때(1232년, 고종19) 불에 타 없어져 버린 것으로 유명하다. 또, 선덕여왕의 초상을 모시는 사당인 선덕묘(善德廟)가 지금도 남아 있고, 해마다 음력 3월 보름에 선덕여왕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도 이름이 높다. 아마도 신라 당대에는 선덕여왕의 원당이 아니었을까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건물들이 전란 중에 모두 방화되어버린 탓에 하나같이 새로 지었기 때문에 지금은 예스러운 맛을 느낄 수가 없다.

가산도 팔공산의 한 봉우리이지만 눈에 보이는 산자락은 첩첩산중이다.
▲ 가산산성에서 바라본 팔공산 가산도 팔공산의 한 봉우리이지만 눈에 보이는 산자락은 첩첩산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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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에서 가볼 만한 명소로는 송림사도 있다. 가산산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송림사에는, 절보다 훨씬 더 이름이 높은 전탑이 있다. 보물 제189호. 그리고, 비록 문화재로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대웅전에 있는 삼존불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목조불상으로 알려졌으며, 대웅전 편액도 숙종의 어필(御筆)로 추정되어 호기심을 끌고 있다.

송림사 맞은편 산길로 들어가 30분 정도 올라가면 도덕암에 닿는다. 이곳도 한 번은 가볼 만하다. 대단한 문화재가 있지는 않아도, 팔공산 자락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점이 바로 도덕산 정상이기 때문이다.

또, 도덕암 경내에 있는 모과나무도 이곳의 자랑거리이다. 수령 800년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된 모과나무로 여겨지고 있다. 모과나무 뒤편에 있는 어정수(御井水)는 고려 광종이 직접 찾아와 마신 후 병이 나은 약수로 이름이 높지만 지금은 물이 메말라 있어 안타깝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목조 불상이다.
▲ 송림사 불상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목조 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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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의 흐르상 송림사와 도덕암을 본 후 찾아야 할 가산산성도 빼놓을 수 없는 팔공산의 명물이다. 사적 216호인 가산산성은 찾기 쉬운 곳에 (전문가들의 심미안을 기준으로는 아주 형편없어졌다고 맹비난을 받고 있지만, 일반인 보기에는) 그럴듯하게 복원되어 있어 근래 들어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잦아진 답사지로 부각됐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 곱게 닦여진 임도를 줄곧 따라 걸으면 비교적 본래의 형태가 살아 있는 내성(內城)의 동문도 볼 수 있다.

물론 더 멀리 가면 중문을 거쳐 서문과 북문도 눈에 담을 수 있다. 그러나 동문을 제외하면 크게 윤곽이 뚜렷하지가 못하니, 발길을 서문과 북문까지 디딜 필요는 별로 없다. 특히 눈이 쌓인 날이면 북문은 찾을 길도 묘연하다. 다만 중문은 꼭 그 아래를 지나갈 가치가 있다. 가산바위에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가산바위에 오르면 팔공산 능선과 대구 시내가 한눈에 '팍' 들어오는 장관을 만끽할 수 있는데, 어찌 이곳을 놓칠 것인가.

특히 하얗게 눈이 내리다가 문득 그친 날을 잡아 두어 시간 가산산성 경내 임도를 주욱 걸어 가산바위 위에 올라보라. 백설과 햇살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경관을 구경하는 즐거움은 가히 천하일미라 이름 지어도 절대 지나치지 않다!      

갓바위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경산 와촌, 영천 은해사에 닿는다.
▲ 갓바위 갓바위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경산 와촌, 영천 은해사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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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팔공산 관광의 최대 명소는 단연 갓바위이다. 머리에 갓을 쓴 형상 때문에 본 이름인 '관봉 석조여래좌상'보다도 흔히 '갓바위로 불리는 이 부처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높아 엄청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팔공산 중의 한 봉우리인 관봉 정상에 있는데 대구 쪽과 경산 쪽(선본사)으로 올라가는 길이 대표적인 답사로이다. 해마다 수능시험을 앞두고 수많은 학부모가 기복 신앙의 차원에서 이곳에 올라 간절히 애절히 비는 모습을 보노라면, 한국적 교육열의 의미와 종교관의 진의가 무엇인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팔공산 힘찬 줄기를 두루 볼 수 있는 곳을 추천하면

팔공산 자락을 두루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산속으로 들어가면 전체 경관을 볼 수가 없으니 진정으로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곳을 꼭 찾아야 하고, 또 올라야 한다. 팔공산에서는 한티재 뒤편, 가산바위 위, 용수동 당산, 신무동 교육연수원 앞, 용암산성 옥천 유적, 초례봉 정상, 도덕산 정상 등이 바로 그곳이다. 만약 그대가 이런 곳까지 두루 찾아 팔공산의 참모습을 낱낱이 보았다면, 중악의 신령으로부터 "이제 그만 하산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으리라.

신무동(대구시교육청 연수원 아랫마을)에서 바라본 팔공산. 사진 가운데에 비로봉의 철탑이 보인다.
▲ 신무동에서 바라본 팔공산 신무동(대구시교육청 연수원 아랫마을)에서 바라본 팔공산. 사진 가운데에 비로봉의 철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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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제2 석굴암 가는 길에 바라본 팔공산
▲ 한티재에 바라본 팔공산 군위 제2 석굴암 가는 길에 바라본 팔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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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너머에 있는 은해사는 행정구역상 대구는 아니지만(경북 영천) 그래도 대구시민들이 즐겨찾는 명소이다. 불에 타버려 오래된 전통 건물은 없지만, 부속암자인 거조암에 가면 '국보'를 볼 수 있다(거조암 자체가 국보).
▲ 은해사 거조암 팔공산 너머에 있는 은해사는 행정구역상 대구는 아니지만(경북 영천) 그래도 대구시민들이 즐겨찾는 명소이다. 불에 타버려 오래된 전통 건물은 없지만, 부속암자인 거조암에 가면 '국보'를 볼 수 있다(거조암 자체가 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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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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