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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종 선암사

해남 달마산 미황사 다음으로 내가 향한 곳은 조계산 선암사였다. 순천보다 더 따스한 남쪽 해남에도 벚꽃이 피었으니 선암사 매화꽃을 볼 리는 만무했지만, 그래도 선암사가 워낙 조계산 깊숙이 자리한 터라 일말의 미련이 남은 터였다. 혹시 아는가. 운이 좋아 그 유명한 선암사의 활짝 핀 고매를 보게 될는지.

순천 낙안읍성 옆의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새벽같이 일어나 선암사로 향했다. 그 전날 대흥사를 갈 때만 하더라도 느지막이 꽤 게으름을 떨었건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때가 때이니만큼 선암사는 많은 이들이 매화를 보기 위해 아침부터 북적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인파와 마주치기 전에 어서 가서 조용한 산사를 느껴보리라.

상사호의 봄
▲ 선암사 가는 길 상사호의 봄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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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에서 조계산 가는 길은 생각보다 꽤 멀고 아름다웠다. 7년 전 봄이던가? 그 때는 비가 와서 그랬는지 선암사 가는 길이 마냥 지루하게만 느껴졌었는데, 이번에는 길가의 화창하게 핀 벚꽃들이 상사호의 풍경과 어울려 꽤 볼만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아침 햇살 덕분인가? 아님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벚꽃들이 이제야 무성해져서 그럴 수도.

선암사계곡으로 들어섰다. 역시나 너무 이른 시간 때문인지 주차장에도, 매표소에도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고운 산새소리와 맑은 시냇물 소리만이 나를 반겨주고 있을 뿐.

태고종과 조계종
▲ 선암사 분규 태고종과 조계종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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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선암사 58년 분규 원만종식 종언'이라고 쓰인 커다란 현수막들이었다. 그 내용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현수막 중 하나는 사찰의 중심 대웅전의 현판마저 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참으로 의아해했을 테지만 선암사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어쨌든 선암사는 1954년 '대처승은 사찰을 떠나라'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문이 발표된 이후 계속된 조계종-태고종 분규의 가장 대표적인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산 너머 송광사와 함께 수많은 고승들을 배출해 낸 대찰이건만, 역사의 장난으로 서로를 소 닭 보듯 했을 두 사찰의 스님들 마음은 어떠했을까. 본디 하나였던 불교가 두 종파로 나누어져 그 긴 세월 동안 반목의 역사를 거듭했으니, 선암사의 입장에선 태고종-조계종 분규의 종식만큼 중요한 일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두 종단이 힘을 합쳐 선암사의 재산권을 가지고 온 대상이 바로 MB 정권 아닌가.                  

선암사의 뒷마당 조계산

곡선이 아름다운 보물 400호
▲ 선암사 승선교 곡선이 아름다운 보물 400호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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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산 선암사
▲ 선암사 일주문 조계산 선암사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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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올랐을까. 승선교가 보였다. 조선 숙종 때쯤 만들어졌다는 승선교는 그 명성만큼이나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시내 양쪽을 이어주고 있었는데, 앙상한 나뭇가지를 배경으로 한 그 모습이 결코 낯설지 않았다. 아마도 승선교를 찍은 대부분의 작가들이 선암사 매화를 찾아 이맘때쯤 사찰을 찾았기 때문이리라.      

지리산 화엄사의 불이문과 비슷한 모양의, 멋들어진 일주문을 지나니 선암사가 그린 극락세계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밀조밀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호쾌한 모습의 선암사. 비록 담은 두르고 있었지만 선암사는 그 호방한 기상으로 사찰의 영역을 절 뒤편 조계산까지 확장하고 있었다. 영주 부석사가 소백산맥을 앞마당으로 삼고 있다면, 선암사는 뒷마당으로 조계산을 두고 있는 형상이었다.

사찰을 둘러보는데 있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오랜 세월에 빛이 바랜 단청과, 그 단청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전각의 오묘한 조화였다. 평소 다른 사찰들을 둘러보면 오래된 구조물과 원색의 단청색이 부조화를 이루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는데, 선암사의 그것은 세월의 먼지를 그대로 겹겹이 쌓음으로써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색창연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선암사의 고색창연함
▲ 선암사 원통각 선암사의 고색창연함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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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세에 물든 이들의 입장에선 사찰의 세를 자랑하기 위해서라도 그 낡은 단청을 색칠하고픈 욕심이 들만도 하건만, 선암사는 그 오랜 세월을 어떻게 견뎌 왔을까. 옛날 건 뭐든지 바꿔버리고자 했던 새마을의 광풍도 이곳에선 사찰의 고색창연함에 넋을 잃어 제 할 일을 잊어버렸던 것일까.

이유가 어쨌든 그렇게 남겨진 고찰의 옛스러움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할 말을 잊게 만들었다. 너무도 빠르고 급하게 사느라 지쳐 있는, 그리고 조금이라도 주름이 보이면 인위적으로라도 피부를 펴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에게 고찰은 있는 모습 그대로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고 있었다.

벚꽃과 선암사
▲ 선암사 풍경 벚꽃과 선암사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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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 대신 닭, 매화 대신 벚꽃
▲ 선암사 수양벚꽃 꿩 대신 닭, 매화 대신 벚꽃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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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우전과 각황전 길
▲ 선암사 선매화 무우전과 각황전 길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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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을 지나서 들어선 사찰의 중심. 무우전과 원통전 사이에 만발한다던 홍매화와 백매화는 끝물이었고 그 유명한 600년 고매는 꽃잎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뭐가 그리도 급했던 것일까. 7년 전에 찾아왔을 때도 고매만이 그 자태를 보여주지 않더니, 이번에도 고매의 매화꽃 향기는 맡을 수 없었다. 별 수 있는가. 저 멀리 흐드러지게 핀 수양벚꽃을 위로 삼으며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꽃잎은 다 떨어지고
▲ 선암사 고매 꽃잎은 다 떨어지고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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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는데 그 유명한 선암사 뒷간이 눈에 띄었다. 그 아름다운 곡선으로, 혹은 남녀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구조의 재래식 화장실로 유명한 선암사 뒷간. 용변이 급하지도 않으면서 괜스레 한번쯤 들어가 여기저기 구경해본다. 혹자는 눈물이 나면 이곳 선암사의 해우소를 떠올린다고 하지 않던가. 어쩌면 해탈을 바라는 사찰에서 해우소는 매일 자신을 버릴 수 있는, 그래서 미련이 남아 자주 들리는 그런 장소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나면 사찰의 해우소만 순례하는 것도 꽤 괜찮은 테마일 듯.

뒷간
▲ 선암사 해우소 뒷간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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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선암사를 뒤로 하고 낮은 비탈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분명 내리막이었건만, 마냥 가볍지 않은 발걸음. 보지 못한 매화에 대한 미련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극락에서 홍진으로 향하는 나그네의 편치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오늘 저 속세에서는 또 어떤 번뇌가 나의 마음을 어지럽게 할까. 부디 시대의 욕망에 휩쓸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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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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