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트로이목마의 모습
 트로이목마의 모습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서양의 역사는 트로이 전쟁에서부터 시작된다. 서양의  모든 나라는 자신의 역사 첫머리에 그리스 역사를 놓는다. 사실 유럽 각국은 9세기까지 자신들의 역사라고 내세울 만한 게 별로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 로마 역사를 자신들의 고대사로 받아들인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학도 트로이 전쟁에서 시작한다. 서양 최초의 문학작품이 트로이 전쟁을 노래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이기 때문이다. 트로이 전쟁에 대해 알지 못하면 서양의 역사나 문학에 대해 문외한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 의미로 보면 트로이전쟁은 큰 의미를 지닌다. 단순히 그리스문명과 소아시아의 트로이문명간의 에게해 패권 전쟁이라고 볼 수 있지만, 크게 보면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동․서양이 나눠져 있는 상태에서 동양과 서양간의 최초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로마시대에 모임과 시낭송, 음악 연주에 활용된 오데이온. 일종의 원형극장이다
 로마시대에 모임과 시낭송, 음악 연주에 활용된 오데이온. 일종의 원형극장이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성문을 열고 목마를 끌고 갔을 걸로 추정하고 있는 길
 성문을 열고 목마를 끌고 갔을 걸로 추정하고 있는 길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트로이는 에게해와 흑해를 잇는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해협)의 입구에 해당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어 번영을 누려왔다. 이러한 트로이의 번창은 좁은 에게해를 배경으로 하는 그리스로서는 눈엣 가시였다.

트로이전쟁은 동지중해의 패권을 둘러싼 그리스 반도의 국가들과 트로이를 중심으로 하는 이오니아 지방 국가들 사이의 분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지중해의 패권은 지금의 시리아, 레바논 등 당시 이오니아로 일컬어지는 지역에 있던 국가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결국 아테네 등을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 국가들이 승리를 했다.

트로이 전쟁의 원인은 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남긴 황금 사과를 두고 헤라와 아프로디테, 아테나가 서로 다투다가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심판을 내려 아프로디테가 주인이 되었다.

트로이성의 상상도
 트로이성의 상상도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그 대가로 파리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의 사랑을 얻게 해 주었다.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과 함께 트로이 원정길에 나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스군의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 트로이군의 헥토르와 아이네이아스 등 숱한 영웅들과 신들이 얽혀 10년 동안이나 계속된 이 전쟁은 오디세우스의 계책으로 그리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스군은 거대한 목마를 남기고 철수하는 위장 전술을 폈는데, 여기에 속아 넘어간 트로이군은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 놓고 승리의 기쁨에 취하였다. 새벽이 되어 목마 안에 숨어 있던 오디세우스 등이 빠져 나와 성문을 열어 주었고 그리스군이 쳐들어와 트로이성은 함락되었다.

트로이전쟁이 실제로 존재했을까?

에게해에서 마르마라를 거쳐 흑해로 들어가는 길목인 다르다넬스 해협은 예로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수많은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그리스를 침략하러 가던 페르시아 대왕 크세르크세스도, 아시아를 정복하려던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바로 이곳을 지나갔고, 제1차 세계대전 때도 이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비교적 안전하고 잔잔한 에게해에 비해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마르마라 바다와 보스포러스 해협을 거쳐 흑해로 가는 물길은 비바람이 치거나 안개가 끼고 바람과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하다. 흑해 역시 예로부터 거친 바다로 유명했다.

유적층이 겹겹이 쌓인 발굴 현장
 유적층이 겹겹이 쌓인 발굴 현장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트로이에서 발굴된 유물들.
 트로이에서 발굴된 유물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다르다넬스 해협은 예로부터 해적이 나타날 확률이 높아서 선원들에게는 공포의 뱃길이었고,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두 개의 바위가 지나가는 배를 산산조각 낸다는 신화는 선원들의 두려움을 자아내는 이야기들이다. 이런 신화가 바로 <일리어스>와 <오디세이아>의 배경이 됐다.

트로이를 보려면 유적지 입구에 조그만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는 트로이의 아홉 개 층의 도시를 그린 도표와 설명이 나온다. 트로이성의 배경인 히사를르크 언덕에는 기원전 3600년부터 기원 후 1500년까지 5100년 동안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홉 개의 도시가 차곡차곡 쌓여있는 사진이 있다.

트로이는 처음부터 요새화된 도시였다. 역사가들은 초기 청동기 시대의 이주민이 건설한 제1트로이부터 기원 후 400년까지를 제9트로이 시대로 보고 있다. 그동안 여러 차례의 지진이 발생해 트로이에 피해를 입혔고 수차례의 전쟁이 있었지만, 그 전쟁이 10년 동안 계속되었었는지, 전쟁의 양상이 호메로스가 그려낸 대로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일리아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실재했는지는 모른다.

호메로스가 남긴 서사시는 문학이지 역사가 아니다. 아마도 그는 당시의 트로이를 둘러보고 장소에 얽힌 모든 이야기와 인물들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해 멋있는 서사시로 만들었을 것이다.

도로와 도로가 만나는 접점에 개 한마리가 보인다. 죽은걸까? 터키의 개들은 예방주사만 맞으면 된다고 한다. 길거리에 배짱 좋게 누워 차가 빵빵 거려도 귀찮은 듯 눈만 게슴츠레 떴다가 도로 잠잔다.  그야말로 개천국. 개판이다.
 도로와 도로가 만나는 접점에 개 한마리가 보인다. 죽은걸까? 터키의 개들은 예방주사만 맞으면 된다고 한다. 길거리에 배짱 좋게 누워 차가 빵빵 거려도 귀찮은 듯 눈만 게슴츠레 떴다가 도로 잠잔다. 그야말로 개천국. 개판이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아홉 개 도시의 트로이 복원도. 트로이 박물관에 비치돼 있다
 아홉 개 도시의 트로이 복원도. 트로이 박물관에 비치돼 있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서양 문학의 최초이자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기원전 8세기경에 구전으로 성립되고, 기원전 6세기경에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추정되므로 지금으로부터 무려 수천 년 전의 작품이지만, 이 작품들이 지닌 감동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줄어들지 않는다.

물론 단순히 오래 되었다는 사실 하나에만 경탄이 집중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토록 오래 된 작품이 그토록 짜임새 있는 구조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경탄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 시는 사고하는 방식에 있어 신의 눈이 아닌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함으로써 인간주의적 접근을 시도한 최초의 작품이며, 냉혹한 사실주의적 표현으로 유럽 서사시의 모범으로서 라틴 문학을 거쳐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 아이의 꿈이 신화를 역사 속 현실로 바꾸어

어릴적 꿈을 실현시켜 신화를 역사적 현실로 바꾼 하인리히 슐리만
 어릴적 꿈을 실현시켜 신화를 역사적 현실로 바꾼 하인리히 슐리만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하인리히 슐리만은 일곱 살 때 가난한 목사였던 아버지가 사 준 책에서 불타는 트로이 성의 그림을 보고 언젠가는 그 성을 찾겠다는 꿈을 꾸었다. 14세에 아버지가 교회 헌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로 교회에서 쫓겨나 학업을 중단한 그는 사환, 선원, 회사원, 은행가를 거쳐 36세에 백만장자가 된다.

이때부터 슐리만은 고고학자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그리스어를 배운 그는 1864년 마흔 둘의 나이에 트로이 땅을 처음 방문해 히사를르크 언덕을 트로이라고 믿는 영국인 고고학자 프랭크 캘버트를 만났다.

이때 슐리만은 이곳이 옛 트로이 자리라고 확신하고 발굴하기로 마음먹었다. 히사를르크는 터키어로 '요새가 있는 곳'이란 뜻이었고 주변 경관이 호메로스가 노래했던 트로이성과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1873년 5월 31일, 슐리만은 석조건물 아래층에서 무엇인가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발굴에 참여한 인부들의 도굴을 우려한 그는 인부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혼자서 보물들을 파냈다.

'프리아모스 왕의 보물'이라 생각하며 그가 파낸 보물은 금관, 금  귀걸이 등 8750개의 금 구슬과 금단추, 은제 꽃병, 금으로 만든 두 개의 황금 잔 등이었다. 마침내 신화가 현실로 드러난 셈이다.

남편 직장의 연차를 얻어 패키지 여행을 왔다는 수필가 김양희씨. 보스포러스해협에서 고대 그리스 여류 서정시인인 사포에 연민을 느끼고 히에라폴리스에서는 로마 병사의 함성과 원형극장에서 공연을 준비 중인 무희들의 웅성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고. 내가 만난 한국 관광객 중 가장 열심히 메모를 한 분이기도 하다.  이스탄불 유람선에서 부부가 창밖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남편 직장의 연차를 얻어 패키지 여행을 왔다는 수필가 김양희씨. 보스포러스해협에서 고대 그리스 여류 서정시인인 사포에 연민을 느끼고 히에라폴리스에서는 로마 병사의 함성과 원형극장에서 공연을 준비 중인 무희들의 웅성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고. 내가 만난 한국 관광객 중 가장 열심히 메모를 한 분이기도 하다. 이스탄불 유람선에서 부부가 창밖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그는 트로이 발굴 당시 비과학적 방법으로 발굴해 '리시마코스' 시대에 세워진 아름다운 성벽 일부가 영원히 사라지게도 했고, 자신도 모르게 트로이의 일부를 없애 버리기도 했다. 슐리만을 둘러싸고 칭찬과 비난이 수없이 엇갈렸지만, 일곱 살 때의 꿈을 잊지 않고 평생을 바쳐 아무도 믿지 않았던 트로이 전쟁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임을 밝혀낸 슐리만의 공적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곧 어린이날이 온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와 교사는 어린이들의 꿈과 상상력을 키워나가도록 도와줘 꿈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희망제작소'와 '전남교육' 및 ''문화촌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터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