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10년 5월 1일 노동절,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2009년 쌍용차의 파업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저 달이 차기 전에>가 상영됐다. 경쟁 부문에 올라 다른 영화들과 경합을 벌인 작품에 대해 관객들의 관심도 높았는데, 당시 영화를 선정한 전주국제영화제 유운성 프로그래머는 관객들에게 "메이데이(노동절)에 의미 있는 작품을 본다"고 말하며, 영화 상영에 의미를 부여했다.

 

다가오는 28일 개막하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영화제가 열리는 현장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130여 일 째 시내버스 파업 중인 민주노총 전북본부가 영화제 행사장 등지에서 시위를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2010년 12월 8일부터 임금·근로여건 개선, 해고·징계 중단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이어왔다.

 

그런데 전주국제영화제 측이 민주노총 시위에 앞서 영화제 행사장 주변에 먼저 집회신고를 마쳐 논란이 일고 있다. 영화제 측은 지난 6일 영화제 기간 동안(4월 28일~5월 6일) 영화의 거리를 비롯 개막식이 열리는 소리문화의 전당과 그 근방에 있는 전주동물원, 덕진공원 거리 그리고 인기작 상영이 이뤄지는 전북대 문화관 주변에 대한 집회신고를 마쳤다.

 

민주노총 측은 "합법적인 방식으로는 영화의 거리 행진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영화제 조직위 관계자는 "아직 특별히 준비된 것은 없지만 영화제와 관련된 캠페인을 벌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주국제영화제, 집회신고 선점... "행사 보호 위한 불가피한 조치"

 

영화제 측은 행사 보호를 위해서는 집회신고가 불가피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민주노총 전북본부 측은 "전주시가 영화제를 앞세워 적극적인 사태 해결에 나서지 않은 채 행사 차질만을 우려하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민주노총 측은 집회신고를 할 수 없지만, 영화제 행사장 내에서 시위를 강행하겠다는 방침이다. 

 

19일 민주노총 전북본부의 한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전주국제영화제가 집회 신고를 선점한 것은 송하진 전주시장이 영화제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는 것과 관련 있어 보인다"고 주장했다. 4개월이 넘게 시내버스 파업이 진행 중인데도 사태 해결에 나서지 않은 시장이 노동자들의 시위가 예고되자 영화제 행사를 위해 집회신고를 선점했다는 주장이다. 이 관계자는 "시에서 개입하지 않았으면 영화제 측이 먼저 집회신고를 했겠냐"며 불만을 나타냈다.

 

하지만 전주국제영화제 측은 집회신고 선점은 전주시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영화제 측이 고민 끝에 행사의 안정적인 진행을 위해 취한 조처라는 입장이다. 이와 함께 영화제 측은 주변 상인들도 민주노총의 집회 예고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고 밝혔다.

 

전주국제영화제 홍영주 사무국장은 "집회신고에 대해 전주시로부터 어떠한 지시나 간섭을 받은 일이 없다"며, "영화제의 안정적 행사 운영을 위해 생각해낸 부득이한 방법"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영화제가 민주노총과 대립하는 모양새로 비치는 것은 부담 된다"며 지난 13일 민주노총 전북본부를 직접 방문해 영화제의 사정을 전달하면서 이해를 구했고, 민주노총 측으로부터도 영화제를 방해할 의도는 없다는 뜻을 전달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상영관 주변에서는 집회가 어렵겠지만 영화제가 치러질 고사동 영화의 거리 입구 광장에서는 집회가 가능하며, 영화제도 하고 집회도 하면서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 전주국제영화제의 기본인식"이라고 덧붙였다.  

 

"수천 명 생존권 벼랑인데, 대립각 세우는 영화제 유감"

 

 

그러나 민주노총 전북본부 측은 "그쪽에서 이해를 구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양해를 한 것은 아니라"며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민주노총의 한 실무 관계자는 "영화제 측이 세세하게 구석구석 장소마다 집회신고를 해놨기에 강력하게 항의했고, 이 때문에 영화제 관계자가 방문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제 측이 메이데이 전야제 행사를 위해 영화의 거리 입구 한 곳에서만 집회가 가능하도록 양보하겠다고 했으나 한 군데만 양보 받고 싶은 생각이 없어 거절했다"면서 "600명이 넉 달이 넘게 파업을 하고 있고 가족들까지 포함해 수천 명의 생존권이 벼랑에 있는데,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전주시가 국제영화제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유감을 나타냈다.

 

이 관계자는 "영화제 측은 시와 관련이 없다고 강조했지만 우리는 시장이 조직위원장이니 만큼 (영화제 조직위가) 관변조직과 다를 바 없다고 보고 있으며, 집회신고 선점도 그런 바탕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독립영화인들 비판, "영화제 측 행동 '비겁한 꼼수'"

 

행사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는 해도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의 집회신고 선점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중점에 둔 독립 대안 영화들은 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영화제 행사를 통해 대중과 적극 소통하려는 노력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전주영화제를 통해 상영되는 독립 다큐에는 사회현실을 비판적 시각으로 다룬 작품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2009년 쌍용차 사태처럼 비정규직과 노동 현장의 갈등이 있는 곳에 독립영화인들은 카메라를 들이댔고, 영화제는 이런 영화들의 작품성을 평가해 왔다.

 

이 같은 흐름은 올해에도 이어질 예정인데, 영화제 측이 보이고 있는 행동은 이런 영화제의 내용적인 면과는 배치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영화제의 한 관계자는 "영화제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좌우 편향이 없는 문화행사이며, 영화를 통해 사회 문제들이 충분히 다뤄지고 영화제를 통해 약자의 이야기들이 함께 나눠질 수 있기를 바란다"며, 영화제가 가지고 있는 기본 성격이나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러나 독립 영화계 인사들은 영화제 측의 대응이 과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조선명탐정>을 제작한 독립영화사 청년필름 김조광수 대표는 영화제 측의 행동에 대해 "비겁한 꼼수"라고 비판했다.

 

이번 영화제에 다수의 작품을 출품한 독립영화 배급사의 한 관계자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고 말했다.

 

과거 국내 최대 규모인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행사장 주변에서 영화 정책과 관련된 1인 시위나 영화제 프로그램에 반대하는 집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영화제 측은 항상 공권력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했지 이를 막거나 방해한 일은 없었다는 점에서 이번 전주영화제의 행동과는 비교가 된다.

 

전주시 신고 선점 개입 논란... 시청 "영화제 측에 신고 요청한 적 없어"

 

한편, 일부 관객들은 전주국제영화제가 시내버스파업을 둘러싼 전주시와 민주노총 간 갈등 중간에 끼어 있어 도리어 피해를 입고 입다며 파업 문제를 해결 못한 전주시 측을 비판했다.

 

한 관객은 영화제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린 글을 통해 "설마 영화제 쪽에서 집회신고를 했겠어요? 보나마나 시에서 제멋대로 해놓고 영화제를 볼모로 세운 거지. 애꿎은 영화제만 피 보게 생겼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또 다른 관객은 "영화를 보고 즐기는 것과 누군가의 생존권이 걸린 문제는 비교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영화제를 통해 버스 파업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 소식을 당연히 사람들이 알 필요 있다"는 의견을 보였다. 

 

'시청 다니는 친구에게 사정을 알아봤다'고 주장한 한 관객은 "시 쪽에서 파업 노동자들에 맞서 대리인을 세우기가 뭐하니까 영화제를 방패삼아 대립하고 있는 셈"이라 주장하며, "영화제 지원금을 준다는 이유로 전주시와 전북도 등 행정당국이 영화제를 볼모로 해서 부당한 압박을 가하고 있어 영화제 쪽이 더 곤란해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 관객은 이어 "영화제와 파업 노동자들이 한판 대동의 마당을 펼쳤으면 좋겠다. 기껏 해 봐야 또 다른 비정규직에 불과한 영화제 조직위와 계속 고통 받고 있는 버스 파업 노동자간의 대결로 치닫지 않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전주시청의 한 관계자는 이런 의혹에 대해 "민주노총이나 외부에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시에서 집회신고를 하라고 시켰다거나 영화제에 압박을 가했다는 주장들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민주노총의 집회를 막기 위해 어떤 협의나 요청도 영화제 조직위 측과 한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어 "영화제 쪽에서 집회신고를 선점한 것도 민주노총의 항의로 뒤늦게 알았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또 "행사가 많아 시청이 영화제 조직위 측에 이래라 저래라 지시할 겨를도 없다"면서 "민주노총의 집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시위가 예정된 곳에 설치됐던 시설물들을 다른 곳으로 옮겼고, 영화제를 찾는 외부 관객들이 불편을 겪지 않도록 전주시도 여러 방안을 고심하고 있을 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태그:#전주국제영화제, #JIFF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