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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러스다리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러스다리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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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오지의 문화는 낮고 서구 유럽의 문화는 높은가? 상투를 틀고 담뱃대를 물고 에헴! 하며 다니던 조선의 문화는 낮고 양복을 입고 우산을 들고 다녔던 영국 신사의 문화는 높은가? 문화란 높낮이가 아닌 가치의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폭이 요체다.

이스탄불은 인천공항에서 12시간을 날아가야 할 만큼 먼 곳에 있는 터키 제일가는 도시다. 많은 사람들은 터키가 유럽인지 아시아인지 궁금해 한다. 왜냐하면 터키의 영토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터키 영토의 97%는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이고. 불과 3%만이 유럽 대륙의 끝인 발칸 반도 남쪽에 있다.

이스탄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김새는 서유럽 사람들의 모습과는 약간 다르다.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섞여 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양과 서양의 혈통이 만나 조화롭게 살기 때문이다. 어떨 땐 중국의 서쪽 실크로드 도시인 카스에서 만났던 사람 같기도 하고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만난 사람의 얼굴 같기도 하다.

톱카프 궁전에 수학여행 온 터키 초등학생들이 카메라를 보고 환영의 손을 흔들고 있다
 톱카프 궁전에 수학여행 온 터키 초등학생들이 카메라를 보고 환영의 손을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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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학생들은 학교에서 자신들의 조상이 몽골 초원에 살던 튀르크족이며, 이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서쪽으로 이동해 세운 셀주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자신들의 역사라고 배운다.

하지만 지금의 이스탄불은 튀르크족이 이동해 오기 훨씬 전부터 수천 년 동안 유럽인들이 그리스, 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을 세우고 살았던 곳이다. 그 결과 그리스 로마 유적과 유물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시아와 유럽 대륙이 만나는 곳. 비단길을 통해 동양과 서양을 이어 주는 길목.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수도로 1500년 이상 동서양의 찬란한 문화를 보존해 주는 곳이며 동서 문명의 교차로인 터키를 가장 잘 압축해 보여주는 도시가 이스탄불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골든혼의 끝자락에 아크로폴리스를 만들고 도시국가인 비잔티움을 세웠으나 페르시아인과 로마의 침략을 받아 파괴되기도 했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렸다.

이후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면서 천년의 역사를 가진 비잔틴제국은 멸망하고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제 터키 땅은 기독교 중심의 비잔틴 문화권에서 튀르크족의 이슬람 문화권으로 자리를 넘겨줬다.

그 후 1923년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면서 터키 공화국이 수립된 후 수도의 지위를 앙카라에 넘겨주었지만 여전히 이스탄불은 1000만 명 이상이 살고 있는 터키 제1의 도시이다.

이스탄불에 가면 과거 로마의 영화와 오스만 제국의 흥망이 교차되는 거리이자 동서양 문명의 충돌과 압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아흐메트지구를 찾아가 보자. 도시 중심으로는 흑해와 마르마라해, 골든혼으로 흐르는 보스포러스 해협이 있다.

세 개의 바다가 만나는 접점에 손가락처럼 길게 뻗은 천혜의 도시에는 작은 분수 연못을 사이에 두고 성소피아성당과 블루모스크가 마주 보고 서 있어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기묘한 느낌을 받는다. 

비잔틴 문화의 꽃, 성소피아 성당

"솔로몬이여, 우리는 당신을 이겼노라!"

5년여에 걸친 대역사 끝에 드디어 성당이 완성되던 537년 12월 27일,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감격에 겨워 소리 높여 외쳤다. 성당 건축에는 유명한 수학자였던 안테미우스가 수석 건축기사를, 기하학자인 이시도루스가 조수를 맡았고, 목수 1000여명과 노동자 1만여 명이 작업에 동원되었으며 최고의 건축 자재를 썼다.

 비잔틴 문화의 절정을 보여주는  성소피아 성당 내부 모습
 비잔틴 문화의 절정을 보여주는 성소피아 성당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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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성당이 완성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예루살렘의 성전보다 더 아름다운 성당을 지었다"며 솔로몬을 이겼다고 소리쳤다. 성당은 예배에 참가한 사람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정사각형으로 몸체를 만들었다. 그 위에 하늘을 상징하는 커다란 돔 지붕을 올리고 몸체의 벽과 돔이 만나는 부분에는 아치형 창문을 만들고 색유리로 장식했다. 성당 내부의 벽면은 화려한 모자이크화로 장식했다.

성소피아성당은 이후 이슬람교의 모스크로, 그리고 지금은 아야소피아 박물관으로 변했지만 로마의 대성당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푸른 빛이 환상적인 블루모스크

메흐메트 2세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이스탄불로 명칭을 바꾼 지 150년이 지난 1609년의 어느 날이다. 술탄 아흐메트 1세는 어느 날 토프카프 궁전에서 말을 타고 나오다가 웅장한 자태로 멋지게 서 있는 성소피아성당을 보고, 당시 가장 유명한 건축가인 메흐메트 아가를 불러 성소피아성당보다 멋진 모스크를 지어 자신의 이름을 붙이라고 명했다.

이슬람문화의 절정을 보여주는 블루모스크 앞에선 일행들
 이슬람문화의 절정을 보여주는 블루모스크 앞에선 일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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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8년에 걸쳐 완성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전통적인 오스만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중앙의 큰 돔은 4개의 작은 돔이 받치고 있어 안정감을 준다. 중앙 돔의 지름과 높이는 각각 23.5미터, 43미터이며, 채광과 온도 조절을 위해 설치한 창문도 260개나 되었다. 내부는 아라베스크 무늬가 새겨진 푸른색 타일과 오색찬란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었다.

260개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 타일과 어우러져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푸른빛이 너무나 아름다워 '블루모스크'라고 불린다. 

실크로드의 종착지, 그랜드 바자르

터키에서는 시장을 '바자르'라고 한다. 바자르는 고대 페르시아어로 식량을 의미하는 '아바'와 장소를 뜻하는 '자르'가 합쳐진 말이다. 원래는 길거리에서 식품을 펼쳐 놓고 사고팔았던 곳으로 눈비를 피하기 위해 천막을 쳤고 오늘날의 바자르가 되었다.

실크로드의 종착지였던 그랜드 바자르 모습. 5천여개의 상점이 있다
 실크로드의 종착지였던 그랜드 바자르 모습. 5천여개의 상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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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바자르에 있는 가게에 차이잔을 나르는 홍차 배달부
 그랜드 바자르에 있는 가게에 차이잔을 나르는 홍차 배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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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양탄자, 모피, 도자기, 금은 세공품, 보석, 금은 실로 테두리를 장식한 벨벳이나 비단 등의 화려한  직물로 넘쳐났다. 그랜드 바자르에는 65개의 골목길이 있고 길 양쪽으로 5000여개의 가게가 있다.

터키는 귀금속 공예가 발달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귀금속을 박아 넣은 보석함을 좋아해 박물관에서 그들이 소장했던 보석들을 보면 눈이 부시다.

서양식 생활을 하는데 필수품인 카펫의 발생지는 유럽도 페르시아도 아닌 터키다. 튀르크족은 원래 유목민족으로 초원에 이동식 천막을 치고 카펫을 바닥에 깔거나 벽에 걸고 살았다. 그러다 이슬람교를 믿으면서 모스크에 들어갈 땐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꿇은 채 이마를 바닥에 대고 절을 했기 때문에 바닥에 카펫을 깔아 놓았다. 바자르에는 아름다운 카펫이 널려있다.

동서양 수많은 물건이 넘쳐나는 곳이자 상인들의 호객 행위와 흥정 소리로 유명한 그랜드 바자르에서 터키 명물 차이 잔을 배달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여행이 주는 즐거움의  하나다.

동서양 문명을 아우르는 이스탄불에서 상대방 문화를 수용할 줄 아는 터키인들의 폭넓은 가슴을 느껴본다.

덧붙이는 글 | '희망제작소'와 '전남교육' 및 '문화촌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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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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