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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유적과 함께 하는 2011 겨울 만주기행 넷째 날(1월13일)은 오전에 흑룡강성(헤이룽장성) 목단강(牡丹江)을 출발 발해(渤海) 유적지를 돌아보고 늦은 점심을 먹은 뒤 길림성 연길(옌지)로 이동했다. 

버스에 올라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30분. 박영희 시인은 춘양(春陽), 왕청(汪淸)을 거쳐 가는데,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연길까지는 5시간 가까이 소요될 거라고 했다. 박 시인 말대로 도로가 좁았고, 꾸불꾸불한 산길이 자주 나타났다.

흔히 볼 수 있는 만주의 농촌. 산을 배경으로 들어앉은 마을과 농지가 고즈넉하게 느껴졌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만주의 농촌. 산을 배경으로 들어앉은 마을과 농지가 고즈넉하게 느껴졌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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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눈 덮인 산과 들을 좌우로 가르며 달렸다. 잔설이 듬성듬성 남아 있는 민둥산은 어렸을 때 기계충에 걸린 까까머리를 연상시켰다. 눈 덮인 들녘에 엉성하게 쳐놓은 판자 울타리와 장난감처럼 작은 집들이 오밀조밀한 촌락은 이웃처럼 정겹게 다가왔다.

조금 달리니까 하얀 눈밭이 펼쳐졌다. 박 시인은 만주는 해가 떠도 녹지 않고 4월까지는 산과 들에 눈이 남아 있다고 했다. 작년 여름(8월)에 왔을 때는 광활한 옥수수밭이던 들녘이 하얀 목화솜을 깔아놓은 듯한 눈밭으로 변해 계절의 변화를 실감케 했다.

산에서 금방 메어낸 것으로 추정되는 원목을 가득 싣고 가는 트럭. 한국에서는 40여 전에 사라진 모습이지요.
 산에서 금방 메어낸 것으로 추정되는 원목을 가득 싣고 가는 트럭. 한국에서는 40여 전에 사라진 모습이지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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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지대인 영향도 있겠지만, 눈이 쌓이지 않은 지역은 모두 검고 칙칙했다. 윤기 흐르는 황토가 대부분인 한국의 농촌과 대조를 이루었다. 산에서 베어낸 원목을 싣고 오가는 트럭과 경운기가 자주 보였다. 차만 바뀌었을 뿐 어렸을 때 보던 풍경이어서 새로웠다. 

원목을 가득 실은 트럭이 겨우 비켜가는 모습은 서커스단의 공중곡예를 볼 때처럼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짐칸의 받침대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거나 커브를 돌 때 미끄러진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당에 가득 쌓아놓은 원목. 겨울 땔감으로 보였습니다.
 마당에 가득 쌓아놓은 원목. 겨울 땔감으로 보였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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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쌓아놓은 목재는 잊고 있던 추억들을 새록새록 살아나게 했다. 가을에 월동준비를 하면서 겨우내 땔 장작을 부엌과 헛간에 쌓아놓았는데 '장작 들이는 날'은 장작 패는 아저씨들이 마실 막걸리와 안주를 준비하느라 집안이 시끌벅적했다.

골목에서 아저씨들이 도끼로 장작을 패면 우리는 힘을 자랑하며 날랐다. 양팔을 뻗쳐 눈높이까지 쌓아 나르면서 시시덕거리던 일들이 시나브로 떠올랐다. 어머니에게 칭찬도 받고 사탕 얻어먹는 재미로 동네 친구들을 모으러 다니던 일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춘양 부근 건널목. 간수 아저씨 옷차림이 중국임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춘양 부근 건널목. 간수 아저씨 옷차림이 중국임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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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 스크린처럼 자주 바뀌는 창밖 풍경이 좋은 눈요깃거리가 되어주면서 지루함도 덜어주었다. 그런데 잘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멈췄다. 깜짝 놀라 내다보니 기차 건널목이었다. 만주에서 처음 경험하는 일이어서 호기심이 동했다.

황색 코트에 털모자를 눌러쓴 건널목 간수가 굼뜬 걸음으로 나오더니 수동식 차단기를 내렸다. '땡땡 땡땡땡···.' 소리가 나는 걸 보니 곧 기차가 지나갈 모양이었다. 고향 동네에서는 진즉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모습을 지켜보게 되다니, 흥미로웠다.

한국의 작은 도시 변두리와 흡사한 철길 주변 마을.
 한국의 작은 도시 변두리와 흡사한 철길 주변 마을.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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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있으니까 장대처럼 긴 화물열차가 경적을 울리면서 지나갔다. 간수 아저씨는 북쪽으로 달리며 꼬리를 감추는 기차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도문에서 왕청, 춘양, 목단강을 거쳐 하얼빈으로 가는 열차인 모양이었다.

먼 산을 배경으로 눈 쌓인 철로와 기찻길 주변의 허름한 주택들, 모두 눈에 익숙한 모습들이어서 아스라한 추억들을 떠오르게 했다. 그러나 마냥 추억여행만 할 수는 없었다. 수많은 독립투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이용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만주의 노을. 2011년 1월13일 오후 3시40분(만주시간)에 촬영한 사진입니다.
 만주의 노을. 2011년 1월13일 오후 3시40분(만주시간)에 촬영한 사진입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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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시차가 한 시간 나는 만주의 겨울은 낮이 무척 짧았다. 오후 3시쯤 되니까 해가 서쪽으로 허리를 굽히더니, 3시30분 되니까 하늘이 붉게 물들면서 산마루로 턱걸이를 시작했고, 4시에는 해가 완전히 얼굴을 감추었다.

버스가 한참 달리는데 누군가가 "야, '길림성'이다!"라고 외쳤다. 중국의 성(省) 경계표시를 본 모양이었다. 고향도 아니면서 덩달아 반가웠다. 하얼빈에서는 '만주기행'이 적힌 기(旗)나 명찰을 마음 놓고 걸고 다니지 못했는데 조심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연길에서는 '조선족', '만주', '간도'라 말하면 오히려 환영한다고.

왕청역 건물. 작은 역이지만, 경찰 파견소(파출소)도 있었습니다.
 왕청역 건물. 작은 역이지만, 경찰 파견소(파출소)도 있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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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쯤 연변 조선족자치주를 이루는 여섯 개 시(연길, 돈화, 용정, 화룡, 도문, 훈춘)와 두 개 현(안도, 왕청) 중에 하나인 왕청(汪淸)에 도착했다. 잠시 쉬어가겠다고 해서 버스에서 내렸다. 칼바람이 불어닥칠 시간임에도 피부로 느낄 정도로 훈훈했다. 

우리는 기차역을 'ㅇㅇ역(驛)'이라 하는데 중국은 'ㅇㅇ참(站)'이라 했다. 그런데 왕청은 '站'이 붙지 않고 한글과 한자로 역 이름만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아 박 시인에게 물었더니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해서 더욱 답답했다.

'汪清'은 보루(堡壘)를 뜻하는 만주어란다. 변경의 요충지로 군 주둔지였기 때문이라고. 박 시인은 1913년 이동휘, 장기영 등이 설립한 '동림무관학교'가 왕청현 나자구(羅子溝)에 있는데 버스로 40~50분 거리에 있다며 왕청현이 독립군 본거지였음을 설명했다.

"왕청에는 20세기 초부터 조선인이 대규모로 이주해 살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대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지요. 특히 1913년에 무관학교가 설립되었고, 1919년에는 김좌진 장군이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로 삼았던 곳입니다. 그럼에도, 독립운동사에서 묻혀버리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앞으로 '나자구'와 '군사학교'를 중심으로 돌아볼 계획을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박 시인은 '왕청현소학교'에는 왕청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20여 명의 자료를 모아놓은 소규모 기념관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둘러볼 시간이 없어 설명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왕청은 작은 현(縣)에 불과하면서 이름을 두 개 가지고 있는 것도 특이했다. 다른 이름은 '현성'으로 '중심지'를 의미한다고. 박 시인은 "이곳 사람들은 '왕청에 다녀왔다'고 하지 않고 '현성에 다녀왔다'라고 말합니다"라고 부연해서 설명했다.

볼수록 옛 정취가 묻어나는 허름한 여관. 왕청역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볼수록 옛 정취가 묻어나는 허름한 여관. 왕청역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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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청역 광장 주변의 허름한 가옥과 간판이 눈길을 끌었다. 한문 간판 위에 한글이 들어가 있어 조선족자치주에 속한 도시에 와 있음을 실감 나게 했다. 뜻을 이해할 수 없는 한문 간판만 보다가 한글이 병기된 간판을 보니 반갑기도 했다. 

간판에는 '륭잘여과'(隆庄旅店)라고 적혀 있었다. 읽기는 하겠는데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뜻을 해석할 수 없었다. 고개만 갸웃거리다 중국은 여관(旅館)을 여점(旅店)으로 표기한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손님을 극진히 모시는 여관으로 풀이되었다.   

아래에 주소와 전화번호도 적혀 있었지만, 건물은 들어가기조차 꺼릴 정도로 낡았고, 한국의 여인숙보다 작아보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본거지로 삼았던 도시의 역 근처여서 옛날 항일투사들이 묵어갔던 주막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시계는 오후 4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왕청역 광장에서 이런저런 얘기에 흠뻑 빠져 있는데 인솔자가 더 어둡기 전에 연길에 도착해야 한다며 버스에 오르라고 했다. 연길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덧붙이는 글 | 2011년 1월10일부터 17일까지 항일유적과 함께 하는 겨울 만주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만주, #왕청, #독립군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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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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