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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첫 산행이었다. 지난 겨울 삼한사온 공식을 무색하게 만든 기록적 한파에다, 전국적인 구제역 파동으로 인해 산에 오를 수 없었다. 설령 그렇지 않았다 해도, 변변한 산행 장비조차 갖추지 못한 얼치기 등산객인 주제에 겨울 산행은 언감생심일 뿐이었다. 하물며 아토피와 천식을 심하게 앓았던 아들을 동반한 겨울 산행이란 무모한 일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빼재에서 삼봉산에 오르는 길목에 선 팻말을 읽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산 너머에서 벌어질 일은 꿈에도 몰랐다.
▲ 이때까지만 해도... 빼재에서 삼봉산에 오르는 길목에 선 팻말을 읽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산 너머에서 벌어질 일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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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열 번째 생일이 갓 지난 아이에겐 등산 장비랄 것도 없다. 아이에겐 등산복도, 등산화도, 그 흔한 등산용 장갑조차 없다. 비싸서가 아니라, 그 어느 등산용품 매장엘 가도 아이에게 맞는 게 구비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점원 말마따나 찾는 이가 없어서다. 굳이 필요하다면 직접 본사에 주문 제작을 의뢰할 수는 있단다.

기성 등산화의 경우 230mm가 최소다. 지금 아이의 발 크기로 미루어 보건대 1년은 족히 기다려야 신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것도 알록달록한 여성용이라 아들 녀석이 기꺼워할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그냥 운동화와 약간의 방수기능이 있는 운동복, 그리고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아동용 장갑과 조그만 배낭이 전부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차림으로도 지금껏 아빠와 함께 백두대간을 120km 남짓을 걸어왔다. 지리산을 종주할 때만 해도 성치 않은 몸으로 여기까지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런데도 아이가 '백두대간 완주도 문제없다'고 자신하는 건, 오로지 구간 목표를 완주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과 산행 길에서 오며 가며 만난 사람들의 대견하다는 칭찬과 격려 때문이다.

삼봉산 정상에 서다. 삼봉산은 1200미터가 넘는 고봉이었지만, 봄기운이 완연했다.
▲ 삼봉산 정상에 서다. 삼봉산은 1200미터가 넘는 고봉이었지만, 봄기운이 완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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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첫 종주는 경남 거창과 전북 무주를 잇는 빼재로부터 삼봉산, 소사재, 대덕산을 거쳐 덕산재에 다다르는 총 16km 구간이다. 다음이 충북과 경북, 전북의 경계를 이루는 삼도봉 구간이니, 이번이 전라도 구간의 마지막 코스다. 고도는 점차 높아지고 산세는 점점 험해질 테니 산에 오를수록 설렘보다는 긴장감이 더욱 커져만 간다.

이미 완주한 사람들 말에 따르면, 이번이 백두대간 종주 코스 중 가장 힘든 구간 중의 하나라고 한다. 완만한 능선이 이어지는 여느 구간과는 달리, 하천으로 잘리지만 않았을 뿐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가 줄곧 교차하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오르내리는 산봉우리마다 1200m를 훌쩍 넘고, 꼭대기에는 아직 잔설이 수북했다.


"능선만 잡아채면 된다며? 아빠, 대체 능선이 어디야?"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산에 오른 지 채 한 시간도 안 돼 다리에 쥐가 날 것 같다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능선은 능선이되 산 정상까지는 쉼 없는 오르막이었다. 이윽고 다다른 삼봉산. 덕유산의 '막내'라지만 높이가 1254m에 이르고, 정상에 주변 지역 고도 측정의 기준이 되는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을 만큼 비중 있는 봉우리다.

연신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드디어 내리막이라고 좋아하더니만, 발아래 펼쳐진 아찔한 상황을 보며 차라리 오르막이 낫다며 혀를 내둘렀다. 올라온 길과는 달리 가파른 급경사인데다 겨우내 쌓인 눈이 전혀 녹지 않아 위험천만했기 때문이다. 아이젠 없이는 단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삼봉산에서 소사재 가는 눈 덮인 내리막길 위험천만한 급경사의 내리막을 기듯 내려와 나무에 기대 잠시 쉬고 있다. 3km도 안 되는 거리를 두 시간 반이나 소요된, 그야말로 '사투'였다.
▲ 삼봉산에서 소사재 가는 눈 덮인 내리막길 위험천만한 급경사의 내리막을 기듯 내려와 나무에 기대 잠시 쉬고 있다. 3km도 안 되는 거리를 두 시간 반이나 소요된, 그야말로 '사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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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 주변 나무와 나무를 묶은 나일론 줄 한 가닥을 생명줄 삼아 거북이걸음으로 내려왔지만, 그마저도 설치돼 있지 않은 곳이 많아 사실상 내리막길 중간에서 고립돼버렸다. 발을 헛딛거나 살짝 미끄러지기만 해도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아이젠은커녕 등산화조차 신지 않은 아이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황급히 119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켰지만, 수신감도가 약한 곳이어서인지 어느새 배터리가 다 소모돼 무용지물이었다. 띄엄띄엄 등산객의 발자국은 보였지만, 그 순간 그곳을 지나가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으니 허투루 움직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나무마다 새순이 움트던 오르막길과는 달리, 가파른 내리막길에는 눈에 덮여 초록빛을 전혀 볼 수 없는 한겨울이었다. 날이 제법 풀린 봄날의 대낮이었음에도 전혀 해가 들지 않는 산의 북쪽 사면이었기 때문이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자 발만 동동 굴렀고, 아이에게 아빠의 당황하는 기색이 비칠까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아빠, 줄이 있는 곳은 두 손으로 줄을 잡고 천천히 내려가면 되고, 없는 곳은 스틱과 등산화를 써서 계단을 내보면 어때? 다른 사람들이 낸 발자국이 있으니 그곳을 긁어내 평평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또, 힘들면 군데군데 나무가 있으니 거기에 기대 잠깐 쉬면 되고."

아빠의 긴장감과는 달리 별 것 아니라는 투다. 아이의 말대로 스틱으로 눈을 긁어내고 등산화로 눌러 평평하게 다져가며 계단을 만들었다. 그 아찔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아빠에게 '작업 지시'를 내리며 웃어 보이는 아이가 대견해 보이기까지 했다. 위험한 것보다 외려 신발에 눈이 들어가 양말이 축축해지는 게 더 걱정이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어느덧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고, 비록 더뎠지만 한 발짝씩 디뎌가며 간신히 내려올 수 있었다. 삼봉산에서 소사재까지 채 3km도 안 되는 길을 내려오는데, 무려 두 시간 반이나 걸렸다. 평상시 같으면 1시간이면 족할 거리다. 내리막길을 막 벗어나 소사재에 이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완연한 봄이었다.

소사재 풀밭에서의 휴식 두 시간 반의 '사투'를 끝내고 점심을 먹고 나니 피로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둘 모두 한마디 말 없이 20분 남짓을 그렇게 쉬었다.
▲ 소사재 풀밭에서의 휴식 두 시간 반의 '사투'를 끝내고 점심을 먹고 나니 피로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둘 모두 한마디 말 없이 20분 남짓을 그렇게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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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구간의 절반도 오지 못했는데 허벅지와 종아리가 지끈거릴 만큼 아프고 지쳤다. 좀처럼 쉬어가자는 말을 하지 않던 아이도 힘들었던지 점심과 간식거리를 먹고 가자는 말에 반색했다. 챙겨 간 도시락을 먹고 나니 사투를 벌인 오전 산행의 피로가 물밀 듯 밀려왔다. 아이도, 아빠도 봄볕 따스한 풀밭에서 도무지 일어날 줄 몰랐다. 시간이 더욱 지체됐다.

또 다시 끝없는 오르막이다. 눈 덮인 내리막에서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어서일까. 오전 삼봉산 오를 때와 비교조차 안 될 만큼 가파르게 느껴졌고,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무렵, 초점산 정상(1274m)에 가까스로 닿았다. 전북과 경남, 경북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어서 삼도봉이라고도 불리는데, 전라, 충청, 경상의 경계인 삼도봉(1176m)보다 훨씬 더 높은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덜 알려져 있다.

소사재를 사이에 두고 초점산에서 건네다 본 삼봉산은 거대한 성채와 같았다. 주변의 두루뭉술한 산들에 견줘 단연 돋보였고, 정상 부근 뾰족한 암릉의 짙은 그림자가 움푹 파인 골짜기인 소사재에 짙게 드리워져 색다른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다.

대덕산 오르는 능선길에서... 능선길을 사이로 봄과 겨울이 갈리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아울러, 동서남북 방향과 시간을 어림 짐작하며 아빠에게 설명하고 있다. 아토피 낫자고 덤빈 산행이 아빠와 더불어 공부하는 교실이 되어 준 셈이다.
▲ 대덕산 오르는 능선길에서... 능선길을 사이로 봄과 겨울이 갈리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아울러, 동서남북 방향과 시간을 어림 짐작하며 아빠에게 설명하고 있다. 아토피 낫자고 덤빈 산행이 아빠와 더불어 공부하는 교실이 되어 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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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우리가 정말 성벽 같은 저곳을 두 발로 걸어 내려온 거야? 이곳이 정말 능선만으로 이루어졌다는 백두대간 코스가 맞긴 한 거야?"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산행 코스에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투였지만, 암튼 정상에서 내려다 본 멋진 풍광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초점산을 벗어나 처음으로 능선다운 능선을 만났다. 이번 코스 중 가장 높은 산인 대덕산(1290m)에 이르는 1.5km 구간이다.

이곳 능선을 경계로 봄과 겨울이 뚜렷하게 갈리고 있었다. 초록 옷 입을 채비를 하고 있는 남쪽 사면과 여전히 흰 눈이 땅을 덮고 있는 북쪽 사면이 확연히 구분된다. 어른 눈에는 띄지도 않는 것을 두고 아이는 연신 신기하다며 호들갑이다. 오전 내리막길에 왜 그리 많은 눈이 쌓여있었는지를 그제야 이해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북쪽 사면에 눈이 녹지 않는 이유를 묻는 것으로 시작해, 호기심 많은 열 살배기 아이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남쪽을 거쳐, 서쪽으로 진다는 것과 그림자의 방향과 길이로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다는 것, 나아가 해가 보이지 않을 만큼 흐리거나 비가 올 경우, 그리고 밤에 방향을 찾는 법 등 산행 하다 말고 나무 작대기로 땅바닥에 그려가며 설명해주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

최고봉 대덕산 정상에 서다. 스스로도 대견했는지 해발 1290미터 대덕산 정상 표지석을 어루만지고 있다. 다음 구간은 드디어 충청도다. 아이는 기대 반 설렘 반이라지만, 아빠는 두려움이 앞선다.
▲ 최고봉 대덕산 정상에 서다. 스스로도 대견했는지 해발 1290미터 대덕산 정상 표지석을 어루만지고 있다. 다음 구간은 드디어 충청도다. 아이는 기대 반 설렘 반이라지만, 아빠는 두려움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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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산에 오르니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목표 지점인 덕산재까지는 아직도 십리길이다. 뒤돌아보기조차 싫을 만큼 힘든 코스였지만, 미처 깨닫지 못한 아이의 대견스러움을 발견하게 된 소중한 계기였다. 덩치만 커진 게 아니라, 어느새 부쩍 어른스러워진 것이다.

약이 없다는 아토피를 낫게 해보자고 덤빈 산행이 대화 시간이 늘어 부자지간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고, 이젠 함께 공부하는 교실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 선택이 옳았음을 느낀다. 처음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와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선 하나같이 위험하고 무모한 짓이라고 했다.

솔직히 겁이 나기도 했고, 몇 구간 못 가 힘들어 하면 그만두면 된다며 나약한 생각까지도 했다. 그러나 이젠 그럴 수 없다. 아이가 더 완주에 대해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달 한두 번의 등반 날을 손꼽아 기다리지는 않을지라도, 이제는 반드시 완수해야 할 '당위'로 여기고 있다.

아이는 새 학년 초 담임선생님이 나눠준 자기소개서에 장래희망을 '오지 탐험가'라고 적었다.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하면서부터 아이의 꿈은 줄곧 똑같았다.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이 <세계테마기행>이고,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아마존 밀림과 사하라 사막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녀석이다. 아빠로서 그의 '유별난' 꿈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백두대간 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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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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