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금은 다소 여론의 관심이 떠나 있지만 작년 한 차례라도 국회의원을 한 전직 국회의원에게 매달 120만 원이 지급되는 '헌정회 육성법'이 통과되어 많은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특히 비판이 된 부분은 이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여·야 할 것 없이 '일사천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일본의 대지진 및 원전폭발 사고에 많은 애도 물결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어느 틈엔가 올해 1월 '국회의원수당 등 지급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어 국회의원에게 '자녀학비보조수당'과 '가족수당'이 지급되고 있다. 물론 혼란을 틈타 '날치기'를 하는 매우 비도덕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우리의 눈과 귀가 한쪽으로 쏠려있는 요즈음 다른 한편에서는 국회의원에 대한 '처우개선'이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다.

새해 첫날 홍익대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은 홍익대 청소·경비·시설 노동자들이 점거농성을 44일째 벌이고 있는 가운데, 지난 2월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앞에서 열린 '홍대 분회 집단 해고 철회와 1만인 선언 결의 대회'를 마친 지지자들이 해고 철회와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손피켓을 들어보이며 농성장으로 행진하고 있다.
 새해 첫날 홍익대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은 홍익대 청소·경비·시설 노동자들이 점거농성을 44일째 벌이고 있는 가운데, 지난 2월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앞에서 열린 '홍대 분회 집단 해고 철회와 1만인 선언 결의 대회'를 마친 지지자들이 해고 철회와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손피켓을 들어보이며 농성장으로 행진하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처우도 받지 못하던 홍익대학교 청소노동자들이 용역업체가 바뀌면서 집단 해고가 되었고, 이에 대항하는 투쟁을 통해 비로소 전원이 고용승계되는 사태가 있었다. 물론 두 집단을 단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특정층의 '처우개선'이 원활한 반면 그 반대편의 '처우'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안쓰러울 지경이다.

과연 누가 국회의원에게 자신들의 복지를 스스로 개선할 권리를 주었나? 정확히 정치관료들이 언제부터인가 '대표자' 혹은 '국민의 대리인'으로서가 아닌 '권력자'의 모습으로 비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그 속을 들여다보자.

정치 관료들의 '권력'

지난해 12월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의화 국회부의장이 2011년 예산안을 강행처리를 시도하자, 홍영표 민주당 의원이 예산안 표결 처리를 막기 위해 의장석으로 뛰어오르고 있다.
 지난해 12월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의화 국회부의장이 2011년 예산안을 강행처리를 시도하자, 홍영표 민주당 의원이 예산안 표결 처리를 막기 위해 의장석으로 뛰어오르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정치'라는 단어는 어느새 '타락'의 이미지를 띠고 있다. 누구도 '정치'한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불신이 존재한다. 그들의 본질이 대의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국민을 위해 바른 입법 활동을 하는 것이기에 현재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에 '국회의원 연금법'에 대한 여론은 "왜 그들이 그러한 대우를 받아야 하나? 정당한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또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 보면 정치인이 되면서 가지는 권력의 남용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가령, 청소노동자들에게 퇴임 후 사망까지 '연금'을 지불하자는 주장을 청소노동자들 스스로 펼친다면 우리는 코웃음 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정의가 무엇이든 특정 집단 스스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고자 한다는 것은 우리 문화에서 '낯 뜨거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위의 예를 국회의원에게 접목해보자. 청소노동자들처럼 뻔뻔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들 것이다. 동시에 '힘 있는 사람들의 이권 챙기기'라는 생각까지 도달한다.

이 부분은 청소노동자들의 예에서는 찾기 힘든 부분이다. 즉, 국회의원이라는 대상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이들의 행위는 권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들이 상당수 존재하며 때로는 "100만 원은 뇌물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말하는 정치인이 나오기까지 한다.

국회의원만을 그렇게 볼 수 없다. 정치 관료 전부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힘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절대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을 받고 이에 책임을 갖는 '대리인'이 되라는 의미인 것이다.

'대리인'이 의미하는 것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며 차별과 무시를 받은 홍익대 청소·경비·시설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170명을 집단 해고되자 부당함에 맞서 점거농성을 벌였다.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며 차별과 무시를 받은 홍익대 청소·경비·시설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170명을 집단 해고되자 부당함에 맞서 점거농성을 벌였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프랑스의 계몽학자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전체의사'를 강조한다. 전체의사라는 것은 원시시대로부터 사회가 발전하면서 원시적 자유를 인정받기 어렵게 되자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여 규칙을 정하고 자신이 보호받기를 원해 '계약'에 기초한 사회를 설립하였고 이를 위해 원시적 자유를 헌납하는 대신 재산권의 보장과 같은 발전된 '자유'를 담보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 중 누구라도 자유를 빼앗겨서는 안 되고 특정집단이나 개인이 '공익'을 취하는 것은 전체의사가 훼손되는 것이며 이는 곧 사회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루소는 "모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해야 하지만 응당 모두가 할 수 없는 일이 있기에 주권자에 의해 규정된 입법을 집행할 행정관료를 시민이 선정하여 '대리인'으로서 임명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관료'가 되는 것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고 '특권'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닌 그저 국민의 손과 발이 되는 대리인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바라본 현재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정치관료들은 '대리인'인가, 사회의 계약을 무너뜨리는 '특정 집단'인가? 판단은 여러 가지이나 분명히 '대리인'의 범주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그들은 더 이상 '전체의사'를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관료라는 특정 집단의 목소리와 입장과 국민의 입장을 교환한 지는 오래다.

'대리인'을 감시하는 국민의회

지난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교육ㆍ사회ㆍ문화에 관한 대정부 질문이 열린 가운데, 본회의장 의원석이 많이 비어있다.
▲ 대정부질문 열리는 국회, '의원님들은 어디에?' 지난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교육ㆍ사회ㆍ문화에 관한 대정부 질문이 열린 가운데, 본회의장 의원석이 많이 비어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이러한 현상을 우려하였다. 즉, 대표자들이 자신의 권력 증진을 위해 전체의사를 깨뜨리는 과오를 예상한 것이다. 이 현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으로 '국민 의회의 개최'를 주장한다. 현시대의 상황에 맞게 개념을 변환해 보면 '국민의 적극적인 정치참여 및 감시' 정도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공화국이다"라는 헌법에 기초하여 대한민국은 세워졌고 이끌어지고 있다. 민주주의는 모두에게 동등한 자유를 부여한다. 자유경제체제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나누었다고 해도 우리 사회에는 동등한 권리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 중 '참정권'은 핵심 중의 핵심이다. 하지만 이 참정권을 통해 스스로 민주주의공화국의 시민임을 증명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사회가 어지럽고 경제가 어지러운 상황들이 자꾸 나 자신의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덩달아 우리의 시선도 좁게 만들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래서 '참정권이 가지는 의미가 내 삶보다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갈등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우리 사회를 지키기 위해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분명히 있다. 정치에 참여하여 투표를 통해 '국가'의 바퀴를 굴려줘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가 순환하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요즘 청년들을 만나면 특히 지성인이라고 하는 대학생들은 정치를 논하기 좋아하지 않는다.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 변화한 시대 속에서 '스펙'을 쫓는 대학생들이 대부분인 현 사회 분위기는 '정치참여'를 외치는 학생들에게 '운동권'이라는 거친 표현을 붙인다. 그만큼 사회는 역동성에서 거리가 멀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참여를 외치는 것이 언제부터 이런 인식을 얻게 되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진짜 무서운 것은 미래의 동력인 20대들의 투표율이 40%가 안 된다는 한 통계에서 나타나는 '정치와의 분리' 현상인 것이다. 이것은 결국 '대리인'이 '권력자'로 변질되게 방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국민의 권리는 '자유'와 '평등'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 권리는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어렵고 험난한 상황 속에서도 국민의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인 '정치참여' 또한 언제나 국민이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태그:#국회의원, #정치관료, #사회계약, #공정사회, #정치참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