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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접어드니 봄내음이 코끝으로도 느껴진다. 며칠 전에 꽃집에서 구입해 온 수선화가 다탁 위에서 노란꽃을 줄줄이 피워내고 있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 겨울의 한파 속에서 구제역과 AI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마음이 하루 빨리 봄바람에 씻겨지기를 기대해 본다.

지난주(3월 9일)에는 밀려드는 봄기운에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동료들과 봄맞이를 다녀왔다. 행선지는 거문도와 백도였다. 남도에 살면서도 쉬이 가기가 어려워 몇 번을 계획하고도 찾아보지 못했던 곳이다. 그런데 이번 연수기간 중에 마침 시간여유가 있고 동료들과 의견일치를 보아 좋은 기회를 만든 것이다.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이라는 말이 있다. <논어(論語)>의 '옹야편(翁也篇)'에 나오는 말로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만물이 생동하는 이 봄에 산이면 어떻고 바다면 또 어떠랴. 산이고 바다고 어디를 가나 만물이 생명력에 요동치는 계절이라 기운이 넘쳐난다.

우리 일행은 배편 때문에 하루 전날 여수에 모여 1박을 했다. 다음날 숙취를 누르며 항구에 나서니 바닷바람이 상쾌하다. 여수시 교동에 위치한 연안여객선터미널은 평일이라 한가롭다. 거문도행 배편은 오전과 오후에 한차례씩 있다. 오전 7시40분에 출발하는 줄리아 아쿠아호는 정원이 306명인 228톤급의 중형 여객선으로 최대시속 35노트이다.

정원의 1/3정도나 채운 여객선의 승객은 대부분 섬 주민들이고, 우리처럼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그 중 1/3정도 되겠다. 여수에서 거문도까지는 뱃길로 114.7㎞이다. 뱃길 따라 펼쳐진 다도해의 아름다운 섬들이 은빛 물결 위에 그림처럼 앉아 봄을 맞고 있다. 섬마다 노란 유채꽃과 연녹색의 새싹들이 울긋불긋한 집들과 조화를 이루며 모자이크처럼 채색되어 가고 있다. 여객선은 가는 도중에 고흥 나로도와 손죽도, 초도를 거쳐 거문도 동도에 들른 후 거문도 고도에 있는 여객터미널에는 9시40분에 도착했다. 약 2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이지만 그날 날씨에 따라 약간의 변동이 있다고 한다.

면적이 12㎢인 거문도는 여수와 제주도 중간쯤인 다도해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서도와 동도, 고도 등 3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도와 서도는 삼호교로 연결되어 있으나, 동도는 연도공사를 진행 중에 있어 2012년에나 완공된다고 한다. 고도는 동도와 서도에 낀 작은 섬이지만 면소재지로 상가와 숙박시설이 밀집된 가장 번화한 곳이다.

10시 20분에 거문도 여객터미널에서 유람선으로 갈아타고 백도를 향해 출발했다. 거문도에서 동쪽으로 28㎞ 떨어진 백도는 상백도와 하백도 등 39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자연이 빚은 천혜의 비경이다. 다도해 연안에서 벗어나 큰바다와 연결되기 때문에 언제나 바람이 세고 파도가 거칠다. 그래서 백도 탐방을 목적으로 거문도를 방문하는 이들 중 1/3만이 백도를 들러보고 갈 수 있단다. 그날은 날씨가 좋다고 하는데도 가는 도중에 우리 일행의 절반 정도는 멀미를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유람선이 지나는 좌측 육지 쪽으로 섬들이 다문다문 보일 뿐인 망망대해를 1시간 가량 달려 도착한 백도는 파도가 거칠어 접근이 쉽지가 않다. 안내자가 구수한 입담을 보태 아름다운 비경과 기암괴석을 설명하고 있으나, 흔들리는 유람선 안에서 요란한 엔진소리와 노래방 음악소리가 섞여 도통 정신들이 없다. 관광버스나 유람선은 왜 늘 노래방기계를 틀어놔야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특히 오늘은 승객들이 그 음악에 맞춰 흥을 돋을 상황이 아닌데도 말이다.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으며 보는 위치와 시간에 따라 천태만상의 모습을 자랑한다는 백도는 옥황상제의 아들이 변했다는 서방바위와 용왕의 딸이 변했다는 각시바위를 비롯해서 보석바위, 석불바위, 도끼바위, 촛대바위, 거북바위, 쌍돗대바위, 진돗개바위 등이 유람선이 옮겨갈 때마다 신비스런 자태를 자랑하며 우리를 맞았다. 바위 사이로 바람을 가르며 비상하는 갈매기들을 보니 리처드 바크의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Jonathan Livingston Seagull)'이 생각난다. 그네들의 꿈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의 비상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백도의 갈매기 절해고도 백도 바위섬을 비상하는 갈매기들, 그들이 삶이 숭고하다.
▲ 백도의 갈매기 절해고도 백도 바위섬을 비상하는 갈매기들, 그들이 삶이 숭고하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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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 유람을 마치고 거문도로 돌아오는 길은 더욱 바다가 거칠었다. 바람을 맞받고 오는 길이라 파도가 선창을 쉼 없이 내려치고 선채는 몹시 흔들렸다. 그나마 성성하던 승객들마저 나가떨어지고 여인네들은 구역질을 참지 못했다. 더욱이 지난밤 과음을 하고 아침식사는 오는 길에 김밥으로 때웠으니 그 속이 오죽했겠는가?

승객들은 모두 비실비실 지쳐있는데 유독 노래방 기계만이 도착할 때까지 홀로 흥에 겨워 떠들고 있었다. 거문도에 도착하니 12시50분이다. 백도를 유람하는 데 2시간 30분이 소요된 것이다. 이맘때면 거문도에서 한창 잘 잡힌다는 은갈치 구이와 갈치절임으로 오찬을 즐기고 우리는 다시 서도로 이동했다.

바람의 언덕처럼 구릉을 이루고 있는 서도의 북쪽 끝에는 서도초교부터 시작되는 탐방로가 잘 가꿔져 제주도 올레길을 걷는 느낌이다. 구릉에 오르니 청동상의 인어공주가 초승달 위에 신비롭게 앉아 있다. '신지끼'라 불리는 이 인어공주는 하얀 살결에 검고 긴 생머리를 하고 있으며, 큰 풍랑이 몰려오면 절벽에 돌을 던지거나 소리를 내어 주민들에게 미리 알려주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신지끼 인어공주 초승달 위에 돌을 들고 앉아있는 인어공주는 돌을 던져 풍랑이 올 것을 주민들에게 미리 알려줬다고 한다.
▲ 신지끼 인어공주 초승달 위에 돌을 들고 앉아있는 인어공주는 돌을 던져 풍랑이 올 것을 주민들에게 미리 알려줬다고 한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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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상 뒤편에 있는 녹산등대를 돌아 내려오다 보니 낮은 돌담을 쌓아 정갈하게 정리된 산책길 옆으로는 바람을 맞고 자라난 쑥이 파릇파릇하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텃밭에는 바람막이로 그물을 덮어 쑥을 재배하고 있다. 마침 쑥을 수확하고 있던 주민을 만나 물으니, 거문도 쑥은 청정지역에서 해풍을 맞고 자라기 때문에 향이 짙고 영양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약리효과 또한 뛰어나다고 한다. 특히 비타민A와 C가 풍부하여 피부를 좋게 하고 병에 대한 저항력을 크게 해준다고 한다. 또 치네올이라는 특유의 향기가 있어 우리 몸속의 각종 유해물질을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설명을 하며 거문도 쑥에 대한 자랑이 대단하다.

서도선착장 옆 주막에 들러 주인 아주머니가 직접 담갔다는 걸쭉한 쑥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우리는 다시 고도에 있는 영국군 묘지를 찾았다. 1885년 영국군들이 러시아의 영토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해 2년간 머물렀던 흔적이라고 한다. 당초 7기가 있었는데 5명의 유해는 영국으로 돌아가고 2기만 남았단다.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열강에게 당하기만 한 우리의 역사의 현장은 조경과 보수공사로 어수선하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인근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삼치회와 해삼, 멍게 등 청정해역에서 갓 건져 올린 싱싱한 해산물이 여행자들의 구미를 돋운다. 빠듯한 여정에 모두 지쳐 있으련만 아랑곳하지 않고 정담을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나도 취하고 그도 취하고 섬도 취하고, 그 밤을 우리는 모두 거문도의 해풍과 해산물에 취했다.

방바닥에 다다미가 깔린 민박집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깨끗하고 아늑했다. 게으름을 피우다 다음날 아침 7시경에야 일어나 거문도등대를 찾았다. 서도 남쪽끝자락에 위치한 거문도등대는 숙소에서 도보로 1시간은 족히 걸렸다. 해변을 따라 걷는 거문도의 아침이 상쾌하고 아름답다. 바닷물이 명경지수처럼 맑고 깨끗했다.

동백꽃 거문도등대로 가는 동백터널에서 만난 동백꽃이 봄햇살 아래 영롱하다.
▲ 동백꽃 거문도등대로 가는 동백터널에서 만난 동백꽃이 봄햇살 아래 영롱하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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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해수욕장을 지나고 목넘어를 건너 수월산 아래에 들어서니 동백숲이 터널을 이뤄 핏빛 꽃이 황홀했다. 동백꽃 떨어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부지런한 동박새가 아침을 깨운다. 1905년에 높이 6.2m의 동양최대 규모로 세워졌다는 거문도등대는 15초 간격으로 깜박이며 42㎞의 원거리에서도 식별할 수 있어 뱃사람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왔단다.

거문도등대 옛 등대와 최근에 세운 등대가 조화롭게 서서 뱃사람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 거문도등대 옛 등대와 최근에 세운 등대가 조화롭게 서서 뱃사람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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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존의 등대가 노후하여 2006년에 33m 규모의 등대를 바로 옆자리에 다시 세우고, 옛 등대는 해양유물로 보존함으로써 방문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등대 아래 관백정(觀白亭)에 올라서니 동쪽으로 백도가 저 멀리 아스라이 그림처럼 떠있다. 태고적부터 절해고도(絶海孤島)를 신비한 자태로 지켜오는 그 모습이 엄숙하고 숭고하다.

관백정에서 바라본 백도 거문도등대 아래 관백정에서 바라다본 백도 풍경이 바다와 하늘과 겹쳐 신비롭다.
▲ 관백정에서 바라본 백도 거문도등대 아래 관백정에서 바라다본 백도 풍경이 바다와 하늘과 겹쳐 신비롭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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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여장을 챙긴 후 예약된 식당에서 능성어죽으로 불편한 속을 가라앉히고 떠날 채비를 했다. 항구에서는 어제보다 훨씬 따사로운 봄 햇살과 부드러운 바닷바람이 우리를 배웅했다. 10시40분에 거문도에서 출항하는 2층 구조의 정기여객선 오가고호를 타고 여수항으로 돌아왔다. 그곳에 가고 싶어도 자주 갈 수 없는 절해고도 신비의 섬, 거문도와 백도가 이 봄에 내 마음속의 풍금을 두드리고 있다.


#거문도#백도#쑥#봄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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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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