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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은 부엌문을 잠그지 않는 날

 

음력 정월 열나흘 날, 오후 4시, 불쑥 그리운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대화를 즐긴 탓으로 아직 모티프원의 청소를 끝내지 못한 시간이었습니다.

 

헤이리 코지하우스 유해분 선생님으로 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식사하시러 오세요."

유 선생님은 특별한 먹거리가 준비되면 제게 종종 전화를 주시곤 하셨습니다.

 

- 저녁을 드시기에는 이른 시간이 아니에요?

"내일이 정월대보름이잖아요. 오늘 오곡밥을 드셔야지. 옛날 보름전날 해가 지면 부엌에 불을 피워서는 안된다고 일찍 밥을 해서 먹었잖아요. 그래 색시는 계시나요?"

 

- 서울로 돈 벌러 갔지요.

"오늘 같은 날은 좀 일찍 들어와서 오곡밥이라도 해먹여야지 그래. 아무튼 빨리 오세요."

 

- 지금 갈 수가 없어요. 청소도 끝나지 않았고 스쿠터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갈 방법도 없어요.

"그럼 이웃에 차 있는 분 누구라도 함께 모셔오세요."

 

- 모두들 침거 중이시네요.

"보름 전날 음식들은 모두 나누어 먹는 거예요. 그래서 어릴 때 동네를 돌면서 밥과 나물을 얻어오곤 했잖아요. 오늘은 남의 부엌에 들어가 밤을 훔쳐 먹어도 괜찮은 날이에요. 그럼 늦더라도 꼭 오세요. 부엌문 잠그지 않을 테니……."

 

저는 '부엌문을 잠그지 않으시겠다'는 유 선생님 말씀만으로도 이미 감읍하고 배가 불렀습니다.

 

둥근달이 참나무골 동산 너머로 훌쩍 넘어오고도 저는 코지하우스의 열린 부엌을 탐하러 갈 수 없었습니다.

 

대보름음식을 나누어 먹으라고 했던 뜻은?

 

모티프원으로 신혼여행을 오신 신혼 첫날의 이사무엘, 오윤미 부부에게 연애와 결혼에 관한 흥미진진한 얘기들을 캐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관한 얘기가 무르익고 있는 중에 서재의 문이 열렸습니다.

 

아고라의 김연진 관장님께서 봉지를 내밀었습니다.

 

그것은 어두워지고도 나타나지 않은 저를 위해 유해분 선생님께서 유 선생님의 대모이시기도 하신 김 선생님을 통해 오곡밥과 나물들을 보낸 것입니다.

 

이미 저녁을 드셨다는 신혼부부가 둘만의 시간을 위해 자신들의 공간으로 돌아가고 저는 늦은 밤, 홀로 그 오곡밥을 폈습니다.

 

쌀에 점점이 박힌 차조와 찰수수, 팥과 콩의 오곡밥이 씹을수록 구수했습니다. 호박고지와 말린 가지, 시래기와 버섯의 묵은 나물(진채식)무침이 향긋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구수하고 향긋한 것은 유 선생님과 김 선생님의 정성이었습니다.

 

저는 그 오곡밥과 나물을 오랫동안 씹으면서 대보름 음식을 이웃과 꼭 나누워 먹도록 했던 조상님의 지혜를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조상님이 나누라고 했던 것은 보름음식을 구실삼은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정월대보름은 천관天官이 복을 내리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 막연했던 뜻도 유 선생님께서 보낸 오곡밥을 삼키면서 분명해졌습니다. 이런 배려와 나눔이 가득한 그 사람들의 가슴에 어찌 복이 내리지 않겠습니까?

 

윷놀이로 공동체 정신을 되살리다

 

정월 대보름인 2월 17일, 헤이리주민들은 오후 5시시 커뮤니티하우스(마을의 공동체 활동을 하는 공회당)로 모였습니다. 세시풍속도 즐기고 보름음식도 함께 나누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난히 눈도 많고 추웠던 탓에 출입을 삼갔던 이웃들과도 얼굴을 대면하여 겨울을 깨우기 위함이기도 했지요.

 

이 행사는 헤이리 주민들의 자치기구인 주민회의 강복영 촌장님과 부촌장인 저(이안수)를 비롯해, 손경미, 유경순, 이상억 선생님 등 임원진을 비롯한 주민들이 모여 숙의하고 준비되었습니다.

 

 

어른과 아이, 여자와 남자 구분 없이 함께 할 수 있는 윷놀이를 펼쳤습니다. 이웃끼리 팀을 구성해 토너먼트로 경기를 펼쳤습니다.

 

이웃과 함께 장작윷을 던져보고 함께 윷판에 머리를 맞대는 즐거움에 이기고 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상대의 말을 잡고, 엎어서 빨리 동나기를 해야 하는 그 단순한 말 쓰기에도 재미가 쏠쏠합니다. 지나치게 욕심을 내면 잡히기 십상이고 너무 안전만을 도모하면 동나기가 어렵습니다. 윷가락을 던지는 것을 보면 또한 그 사람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너무 소극적으로 윷가락을 던지면 눈총 맞을 각오를 해야 하고 너무 호기를 부리다보면 낙판落板하기 쉽습니다.

 

 

두레샘의 안재영 선생님이 토너먼트참가자들을 위한 상품으로 렉슨의 만보기 30개를 기증했습니다.

 

50년 추억이 솔솔……

 

음식 솜씨 좋은 유해분 선생님은 이웃들을 위해 기꺼이 오곡밥과 다래순, 곤드레, 부지갱이 등 아홉 가지의 묵은 나물을 볶았습니다.

 

 

각자 한 접시씩의 대보름 음식을 담아 둘러앉은 이웃들은 어릴 적 보름의 추억들을 기억 속에서 퍼냈습니다.

 

"바닷가인 고향에서는 말린 대구를 쪄서 먹곤 했습니다."

 

마산이 고향인 역사사랑방의 김영희 선생님이 50년 전을 추억했습니다.

 

"바구니를 들고 친구들과 아홉 집을 돌아 밥과 나물을 얻기 위해 다니던 일과 사내아이들과 어울려 큰 깡통에 불을 넣어 돌리던 쥐불놀이가 제일 재미있었지요. 그때부터 논두렁을 태워 농사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명희 선생님도 논산에서의 어릴 적 기억이 동네사람들과 오곡밥을 나누는 오늘 유난히 선명합니다.

 

 

열흘 뒤에 독일로 교환학생으로 가는 둘째딸 주리의 친구 하진이의 송별을 위해 독일친구 크리스Chris(Ludwigshafen이 고향이고 Universität Bonn 대학의 아시아학과 재학)가 모티프원으로 왔습니다. 그들도 헤이리의 보름잔치에 함께 했습니다. 크리스는 오곡밥과 나물 뷔페를 함께 하면서 한국의 보름행사에 큰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유럽에서는 보름날은 나쁜 기운이 활개 치는 날로 여겼어요. 그래서 보름달이 뜨는 날밤에는 오히려 외출을 삼갔어요. 독일에서 요즘도 그것을 지키는 이웃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복을 비는 한국의 대보름과는 달리 서양에서는 보름달이 뜨는 날을 두려워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태양력이 중심인 서양에서는 달을 중심으로 한 문화가 태음력을 쓴 나라와는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겨울 동안의 개인적인 변화와 집안의 안부 얘기들에 이어 이웃들의 대화는 올해의 축제와 전시들을 어떻게 치를 것인지에 관한 마을 공동체의 얘기로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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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보름의 '아홉'은 '최선'을 의미

 

이웃들과 마신 막걸리 두어 잔이 집으로 돌아오는 저의 발걸음을 한결 들뜨게 했습니다. 아니 따뜻한 얘기들로 마음이 달뜬 것이겠지요.

 

초저녁 커뮤니티하우스의 지붕너머로 막 떠오르던 보름달은 그동안 헤이리 갈대광장의 중천으로 가 있었습니다.

 

 

저는 취기를 참으며 아직 얼음이 풀리지 않은 갈대늪가의 구름솟대 조각 위에 보름달을 얹어놓고 2011년의 정월 대보름달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달을 향해 말을 걸었습니다.

 

"이웃들과 부럼깨기도 하고, 귀밝이술도 마시고 올 한 해 이 마을을 어떻게 더 행복한 곳으로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얘기도 나누었으니 더 바랄 바도 없구나. 단지 올해는 '나무 아홉 짐하고 밥 아홉 번 먹기'의 뜻에 따라 더 부지런해져야 되겠구나."

 

전국적으로 보름에는 모든 행위를 아홉 번씩 하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밥도 매끼마다 3번씩 아홉 그릇을 먹고 남자는 나무를 아홉 짐하고 여자들은 삼을 아홉 광주리 삼았습니다. 글도 아홉 번을 읽고, 호미질도 아홉 번을 했습니다. 새끼를 꼬면 아홉 발을 꼬아야 하고 물을 길으면 아홉 동이를 채워야 했습니다. 열나흘 날과 열 닷샛날에 이렇듯 아홉 번씩을 행하면 한 해 동안 건강하고 복을 받는다고 여겼습니다. 아홉이라는 숫자가 가장 많은 수를 나타내지요. 한 해 동안 '매일' 모든 것을 이렇게 부지런히 행하니 건강해지고 부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구름솟대 위에 걸렸던 보름달은 제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부지런히 서쪽을 향해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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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정월대보름, #헤이리, #보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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