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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바로 건너편에 있는 잠실역 교보문고 할인코너에 가면 가끔 옛날에 읽던 책들이 눈에 띄고는 합니다. 오늘은 메밀꽃 필 무렵, 배따라기 동백꽃 등이 놓여있습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생소한 책들이 들어찬, 밀림같은 서가 사이들을 돌아다니다가 작고 한적한 할인코너에 나와 그런 순수 소설책들을 만나면 깊은 산속에 맑은 샘물을 만난 기분이 들고는 합니다. 이제는 그 옛날에 그 단편들이 들어있던 단편집의 겉표지가 어떤 모양새였는지 하나도 생각이 나지를 않습니다. 겉표지가 어떻게 변했든간에 '동백꽃'이라는 향수어린 제목이 그냥 맑은 샘물인 것입니다.


오늘은 잠이 오는 책을 사러 할인코너에 들렸습니다. 남편이 요즘 며칠 째 잠이 안 와서 눈을 감고 이생각 저생각, 쓸 데 없는 별별 생각까지를 다 하다가는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이 든다는 것입니다. 수영도 여전히 하고 있고 건강에 이상도 없는데, 스트레스를 받는 정신적인 무엇도 없는 모양인데 왜 갑자기 그렇게 잠을 못 자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낮잠을 자는 것도 아닙니다. 술을 못하는 사람이라 그럴 때는 잠 오는 책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할인코너에 들어서자마자 김유정의 단편선인 동백꽃을 보는 순간에 호드기를 잘 부는 점순이가 '너 봄감자가 맛있단다' 하고 또래 소작인 집 소년에게 순박한 사랑을 내비치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풋풋한 점순이가 사랑스러워서, 그 글을 처음 만났던 내 젊은 시절이 그리워서 얼른 동백꽃을 집어 들었습니다. 사천 원입니다. 아무리 할인코너라지만 값이 너무 쌉니다. 작가 김유정에게보다는 점순이에게 미안해 졌습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내 옆에서 책을 고르다가 그런 나를 힐끗 보았는데 아무래도 그 눈빛이 '그 나이에 그 명작을 이제야 읽으려 하다니' 하는 것 같았습니다. 모르는 어르신이지만 내가 가벼운 목례를 하자 그 어르신은 멈칫하다가 목례를 합니다. 동네 엘리베이터를 타면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내가 먼저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해서 나는 가벼운 목례가 일상화 되었는데 어르신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몇 장 넘기다가 잠이 올 것만 같은 책을 본격적으로 찾아봅니다. 그런데 쉽지가 않습니다. 내용도 괜찮고 재미도 있고 지식도 얻게되는 그러면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면 좋겠는데 제목만 봐서는 얼른 판단이 서지를 않습니다. 


어르신은 '이야기 한국사' '조선야사' '명장일화' 같은 역사이야기 책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문득 그런 책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야기 한국사' 겉표지를 넘겨보니까 역사 속 사건들을 쉽고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엮어 놓았다는 글귀가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역사 이야기라 해도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면 이상하게도 새롭고 재미가 나는 법인데 흥미진진하기까지 하다니 역사 이야기를 좋아하는 남편에게 꼭 알맞은 잠오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인코너는 언제나 그렇듯이 한 두 사람이 기웃거리거나 책을 고르고는 합니다. 청바지를 입은 삼십 대 엄마인듯한 젊은 여자가 들어와 위인전 동화책 등을 살펴봅니다. 위인전 한 권을 들고 페이지를 넘겨보는 그 조용한 모습이 꼭 내 젊은 날에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슬며시 웃음이 났습니다.


그 시절에도 한 권 살 돈으로 할인코너에서 두 권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재수가 좋으면 세 권도 샀습니다. 이것저것 한참을 살펴보다가 마음에 드는 동화책을 한 권 값으로 두 권이나 사 들고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총총 집으로 돌아오던 가슴 벅찬 시절이 내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계산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까 그 어르신이 찬바람 속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쑥스럽게 웃습니다. 그런데 어르신의 손이 비었습니다. 책을 사지 않았습니다. 어르신은 역사이야기책들을 살펴 볼 때에 눈빛이 순간 순간 몰입지경이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한 두 권을 살 줄 알았는데 하나도 사지를 않은 것입니다. 내가 책을 너무 쉽게 골랐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은 별로 책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꽃이 탐스럽게 핀 베고니아에 물을 주다 말고는 차례를 대충 훑어 보다가 '황산벌의 계백장군도 있네, 뭐 다 아는 이야기잖아'하고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툭 탁자에 던져놓습니다. 그리고 다시 베고니아며 알로카시아 크로톤 등등에 물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또 한 번 내가 책을 너무 쉽게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찬바람 부는 영하 십도나 되는 추운 날씨에 일부러 서점에 다녀온 게 억울해서 삐죽 한마디 했습니다.  


"잠오는 책이라구, 잠오는 책!"

"아 됐다구." 


남편은 밤이 되자 FX채널에서 레슬링을 봅니다. 탄성도 터지고 그야말로 눈빛이 아까 그 어르신처럼 몰입지경입니다. 나는 레슬링 경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소문대로 각본이 있는 경기라 해도 무자비하게 깔리고 요란하게 나가떨어지고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고통스러워하고 그러는 거 보면 마음이 아파 얼굴을 돌리게 됩니다.


방으로 들어가 따듯한 방바닥에 엎드려서 동백꽃을 펼쳤습니다. 이 시간때부터 자정 무렵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가 잠을 자고는 하지만 오늘은 순박한 점순이가 너무 그립고 그리워서 동백꽃을 먼저 읽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컴퓨터를 켜 둔 채로 책장을 넘겼습니다. 그런데 방바닥이 따듯해서 그런지 읽다가 그만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문득 깨어보니 컴퓨터는 여전히 켜져있고 그새 자정이 한참이나 지났습니다. 기가막힙니다. 맑은 샘물같은 '동백꽃'이 잠오는 책이 되어버리다니, 기력이 자꾸 떨어져가는 나이 탓도 있겠지만 또 한 번 점순이에게 미안해졌습니다.   


남편의 방 문틈으로 불빛이 보입니다. 이상합니다. 지금쯤 어둠속에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을 시간인 것입니다. 가만히 문을 밀어보니까 남편이 이불을 얌전히 덮고 코를 골면서 자고 있습니다. 아까 그 책이 머리맡에 놓여 있고 십여 페이지 쯤에 책갈피가 끼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나 봅니다. 성공입니다.


'뭐 다 아는 이야기잖아' 하면서 툭 던져 놓을 때는 언제고!


나는 심사대로 픽 웃고는 그러나 속으로는 '얼마나 잠이 쏟아졌으면 불도 못 껐나 몰라' 하면서 조심스레 불을 꺼주고 방문 역시 가만히 닫아주고 돌아섰습니다.


할인코너에서 만난 그 어르신이 떠올랐습니다. 그 어르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냥 그 많은 인물전기 중에서 하나를 골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책들은 재미도 없고 남편에게 맞지 않습니다. 첫 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에 덮어버리고는 밤새 불면증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불면증이 고질이 되면 우울증 불안증이 생기기 때문에 전문의와 상담을 해야 한다는데 남편은 재미있는 이야기책으로 그것도 한 번에 효과를 보았습니다.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잠이 안 올 때는 재미있는 이야기책을 읽는 게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야기 책이 바로 잠 오는 책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그 책을 다 읽고나면 무슨 책을 사다줘야 할까. 남편이 이번 기회에 늘 이야기책 한 권을 머리맡에 두고 읽다가는 전등을 끄고 잠이 드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불면증 예방도 되고 치매예방은 물론 어쩌면 노후생활에 걸맞은 지식을 얻게될지도 모르니까요. 아무튼 저기 건너편에 있는 교보문고 할인코너에 자주 가 볼 생각입니다. 


태그:#불면증 , #잠오는 책 , #동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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