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제주도 동쪽 중산간에 있는 다랑쉬 오름과 용눈이 오름의 겨울 풍경을 보러 갔다가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은 게 구좌읍 송당리라는 마을이다. 위 두 오름 이외에도 영화 <이재수의 난>의 촬영지였던 아부오름, 비자림의 뒷동산 돝오름 등 수많은 오름이 마을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오름의 왕국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동네에서 제주의 겨울, 제주의 진경을 느껴보았다.

 

제주의 내륙을 횡단하는 1112번 도로를 타고 동쪽 비자림 방향으로 가다보면 동네를 지키는 수호신 하루방과 할망이 해학적인 표정을 지으며 맞아주는 마을이 있다. 육지의 시골마을 입구에서 볼 수 있는 장승격으로 그 표정이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와 닮아 볼수록 정이 가는 돌상이다.

 

이 조용한 시골마을에 나같은 자전거 여행자를 위한 게스트 하우스 숙소가 있어서 며칠을 묵게 되었다. 일년 반 전 이 동네가 맘에 들어 자리를 잡고 숙소까지 열게 되었다는 나이 지긋한 주인 부부도 마치 이곳이 고향인 분들처럼 마음 씀씀이가 푸근하시다. 숙소에 몇시쯤 도착하게 될 것 같다고 미리 전화를 드렸는데 그때부터 내가 묵을 온돌방 바닥에 보일러 불을 넣어 주셨다. 

 

 

1만 8천 제주신들의 본향인 송당리

 

송당마을 입구인 송당머리에 있는 돌상은 남신인 '소로소천국'과 여신인 '백주또상'이라는데 이름이 참 독특하기도 하다. 무속신화가 그 뿌리이기도 한 마을신화의 주인공인 이 수호신 주위에서 송당리 마을 주민들은 매년 이맘때 송당 마을제를 연단다. 아무튼 마을에 들어서는 초입부터 기억속에 강하게 남는 곳이다.

 

실제로 송당리는 1만 8천 제주신들의 본향이라고 한다. 올해도 입춘경인 음력 정월 13일 (양력 2월 중순)에 동네의 당오름에 있는 본향당에서 송당리 마을제가 열릴 예정이나, 한 겨울에도 맹위를 떨치는 구제역 때문에 외지인을 배제하고 마을 사람들끼리 간소하게 치룬다고 하니 아쉽다.

 

또 한가지 진귀한 건 눈내리는 2월의 겨울에 마주친 동백꽃 나무들이다. 마을 찻길가 집 마당 까만 화산암 돌담 사이에서 자라고 있는 동백꽃 나무는 빠알간 꽃잎과 노오란 꽃술 덕에 한 눈에 띈다. 이맘때쯤 한낮의 햇살에 봄기운이 조금이라도 들어 있으면 여지없이 동백꽃이 피어난다고 동네가게 주인 아주머니가 귀뜸해주신다. 한라산에 눈소식이 있으면 이 동네에도 같이 눈이 내리는데 붉은 동백꽃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하얀 눈송이가 한폭의 그림이다.   

 

'대문'은 없고 돌담과 마당만 있는 마을

 

보통 시골동네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면 다음 날 아침 닭들의 우렁찬 울음소리에 잠을 깨게 되는데 여기에서는 상상도 못한 까마귀들이 노니는 소리에 눈을 뜨게 된다. 동네가 중산간 지역에 있다보니 제주 산간지역에 주로 사는 까마귀들이 흔하게 보인다. 그런데 까마귀들의 울음소리가 요상하게도 여러가지로 들려온다. 까악까악 소리높여 외치다가 자기네들끼리 꾸륵꾸륵 낮은 목소리로 얘기하기도 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신화에 나오는 새이니 만큼 영물이긴 영물이다 싶다.

 

눈이 소복히 내린 시골 동네를 여유로이 돌아다녀 본다. 까만 화강암 돌멩이를 쌓아 올린 돌담은 너무 낮아 마당과 집안이 훤히 다 보인다. 도시에서 흔히 말하는 '보안'의 의미는 없어 보인다. 화강암 돌을 하나씩 쌓아올려 구멍이 숭숭 뚫린 돌담이지만 산바람이 제아무리 강하게 불어쳐도 끄덕없다. 제주 돌담에서 소통의 장점과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제주는 옛부터 죄를 짓게 되면 엄하게 다스려 똑같은 죄를 짓게 하지 못함으로써 치안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도둑 들 일이 없게 되었고 그 결과 담벽은 낮아지고 대문은 사라진 풍경이 된 것이다. 송당리 마을도 집에 돌담만 있지 대문이 없는 동네다. 대문이 없으니 초인종도 필요없다. 낮고 까만 돌담은 여기가 내 집이요 하는 표식일 뿐이다.

 

나같은 외지인은 마을 골목에 잘못 들어서다간 남의 집 마당으로 불쑥 들어가게 되기도 하고, 집 마당에 있던 개에게 한소리를 듣기도 한다. 예전엔 제주의 선비들이 모여 살았다는데 정말 글 읽기 좋은 한적하고 조용한 동네다.   

 

오름이 병풍처럼 둘러싼 곳... 히말라야 못지 않은 감동

 

오름의 왕국이라는 별칭답게 구좌읍 송당리 주변의 지도를 보면 크고 작은 오름들로 가득하다. 마을제가 열리는 본향당이 있는 당오름, 비자림의 뒷동산 돝오름, 오름 중에 제일 키가 큰 높은오름, 영화 <이재수의 난>의 촬영지였던 아부오름, 오름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다랑쉬 오름, 아름다운 능선길의 용오름… 자전거를 타고 20~30분 거리내에 이런 멋진 오름들이 수두룩하다. 힘들게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며 중산간 도로를 달려온 이유다.  

 

마을 안 송당초등학교 운동장 뒤로도 큰 병풍처럼 오름이 서있다. 이곳의 오름들은 개성적인 풍모 때문인지 그 높이가 채 500미터가 안되는 데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압도적이고 원초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오름 밑 초원에서 부는 바람에 갈기를 휘날리며 서있는 말들을 만나면 더욱 그렇다. 키는 작지만 그 위에 올라서면 저멀리 히말라야 못지않은 감동을 전해주는 곳이 제주 산간의 오름들이다.

 

자전거를 타고 송당리 마을에서 제일 가까운 아부오름을 먼저 가보았다. 어른이 털썩 주저않은 모양새라 하여 이름 지은 아부오름은 입구의 표지석에는 앞오름이라고 써있다. 높이가 불과 300미터의 낮은 오름이라 올라 가기도 쉬운데, 막상 오름 위에 서면 나타나는 풍광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곳이다. 주변 풍경도 풍경이고 삼나무를 심어놓은 움푹 파인 분화구의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영화 촬영지가 될만하다 싶다.        

 

해질무렵 아무도 안찾는 오름을 오르기도 하고, 오늘처럼 눈내리는 날이면 쌓인 눈으로 하얗게 분칠을 한 전혀 다른 모습의 오름을 오를 생각을 하며 설레이기도 한다. 덕분에 하루 묵을 예정이었지만 며칠을 더 지내게 됐다. 여기에 시골마을에서 느끼는 여유까지 더하니 여행자에게 더없이 좋은 마을이다.

덧붙이는 글 | 제주도 송당리 여행은 2월 9일부터 11일까지 했습니다.


태그:#자전거여행, #제주도 , #송당리, #오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