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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중 가장 춥다는 대한(大寒)이 지난 지 일주일 되었고, 봄을 알리는 입춘(立春)이 대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데도 무척 춥습니다. 보름 넘게 추위가 이어져 '삼한사온'이라는 말도 이제는 강아지가 풀 뜯어 먹는 소리쯤으로 취급될까 우려됩니다.

 

연일 한파가 몰아치니까 겨울이 가는 지, 오는지 분간을 못 하겠는데요. 송년 인사를 주고받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1월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음력으로는 섣달 하순 '대목'으로, 설을 일주일쯤 남겨놓고 있어 아직은 해가 바뀌지 않았지요.

 

이웃 장바구니에서 날짜를 가늠했던 시절

 

코흘리개 시절에는 요즘이 1년 중 가장 희망에 부푸는 때였습니다. 세뱃돈을 받는 설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었지요. 볼거리도 가장 많은 때였습니다. 집에서 5분 거리에 기차역과 재래시장이 있어서인지 거리에 나가면 눈에 보이는 모두가 구경거리였으니까요.

 

 

추석이나 설 등 명절이 가까워지면 골목 앞 신작로 분위기부터 눈에 보이게 달라졌습니다. 시장 입구는 시골에서 장 보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노점상들이 손님을 부르는 소리가 노래가락처럼 흥겹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장 보따리를 들고 오가는 사람과 소달구지가 늘어난 것을 보고 벌써 대목이냐며 걱정하시던 어머니와 동네 어른들 모습이 새롭습니다. 하루 세끼도 힘겨운 시절에 제사상에 올릴 대목장을 봐야 하고, 자식들 설빔까지 챙겨야 했으니 얼마나 걱정이 되었겠어요.

 

하우스재배를 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나물, 상추, 시금치는 물론 시장에 나오는 배추 종류도 철마다 달랐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이웃이 시장을 봐오는 장바구니만 보고도 '대한'을 넘겼는지 '입춘'을 넘겼는지 날짜를 대충 가늠했지요. 

 

마른침이 꿀꺽 넘어가던 뱀 장수 입담 

 

시장에 자리를 잡지 못한 아주머니들이 골목 앞 신작로까지 진을 치고 있어서 눈을 즐겁게 해주었는데요. 특히 독사나 살무사를 담은 유리병과 구렁이알을 담은 링거 병 등을 길가에 늘어놓은 뱀 장수는 사람들 눈길을 가장 많이 끌었습니다.

 

뱀을 머플러처럼 목에 두르기도 하고, 뱀이 계란을 곧 집어삼킬 듯한 광경은 사람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는데요. 미혼여성들은 힐긋 쳐다보고 도망치듯 달아났지만, 남자들에게는 그만한 공짜 구경거리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입담을 듣고 있자면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으니까요.

 

"자~아 비얌, 날이믄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아침에 일어나믄 아랫도리가 축축허고, 바짓가랭이에 오줌을 찔끔거리는 사장님들, 요놈 두세 마리만 푸욱 고아서 먹어 봐요, 오줌 줄기가 담을 넘을 팅게. 그러나 요강 깨지는 것은 책임 못 져···.

 

이놈 고아 먹고 잠자리를 혀 봐요. 세상도 바뀔팅게. 왜냐. 남편이 귀찮다고만 허든 사모님 행동이 달라지거든. 끼니때마다 밥상에 달걀이 올라오고, 퇴근헐 때마다 춘향이가 이 도령 맞이허듯 반길 것잉게···."

 

뱀 장수는 광목 주머니에 담아온 뱀을 꺼내면서 "아그들은 가그라!"라며 접근을 못 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막으면 막을수록 호기심이 동해서 어른들 뒤에 숨어서 지켜봤는데요. 어떤 뱀 장수는 보기에도 무섭고 흉측스러운 '지네'도 팔았습니다. 

 

"비만 올 라믄 허리가 아프고, 삭신이 저리고 쑤시는 갱년기 아주머니들. 병원 댕김서 아무리 주사 맞고 약 먹어봐야 필요 없습니다. 이놈(마른 지내) 가루 내서 물에 타 먹기만 허믄 나락 한 가마도 번쩍 들고 돌아댕길 수 있응게···."

 

무섭고 징그러우면서도 끝까지 지켜봤는데요. 종일 기다려도 뱀이 계란을 먹는 모습은 한 번도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뱀 장수 말대로라면 세상에 못 고치는 병이 없을 것 같았는데요. 그 많은 뱀과 지네를 어디에서 잡았는지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어린 가슴을 아프게 했던 야바위꾼들

 

대목이라고 해서 항상 재미있는 구경거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끔은 마음 아픈, 그래서 보고 싶지 않은 광경도 목격했지요. 인간의 본능인 물욕을 이용하여 순진한 어른들을 등쳐먹는 야바위꾼들이었습니다. 

 

 

야바위꾼 일당은 대부분 5~6명으로 짜여 있었습니다. 한 명은 카드나 주사위로 사람의 혼을 빼는 행동대원이고, 2명은 경찰이 오는지 양쪽 길에서 망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2~3명은 손님(?)을 모으는 바람잡이였지요.

 

"자~ 돈 놓고 돈 먹기. 이건 노름이 아입니다. 요놈(A 스페이드 카드)이 어디로 가는지 잘 지켜보시오잉. 찾아내기만 허믄 다섯 배, 곱에 곱으로 주니께."

 

그들은 사탕발림하듯 다섯 배라는 말로 유혹했는데요. 처음에는 자기들끼리 돈을 따기도 하고 아슬아슬하게 실수도 하는 등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그러다가 어수룩한 상대가 걸려들면 혼을 빼면서 행동으로 옮겼지요.

 

사람이 몇 모이면 운동선수가 몸을 풀듯 연습 게임을 했는데요. 쉽게 찾아낼 수 있도록 천천히 움직입니다. 그러면 바람잡이가 자기는 어렵다며 옆 사람에게 "선생이 한 번 골라봐요"라며 권해서 골라내면 "기가 막히게 찾으신다"며 잔뜩 치켜세우면서 본게임으로 들어갔습니다. 10원부터 시작해서 30원, 50원, 100원으로 올라갔는데요. 자장면 한 그릇에 10원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적잖은 금액이었지요.

 

야바위꾼들이 투자한 자산 이래야 사과 상자 하나에 군용 담요, 카드 세 장, 주사위 하나 그리고 간장종지가 전부였는데요. 손님들과 잔뜩 열이 올랐다가도 망보는 패거리가 신호를 보내면 얼른 챙겨서 자리를 떴다가 경찰이 사라지면 다시 모였습니다.    

 

야바위꾼들은 대목장을 보러 나오거나 닭이나 염소를 팔아서 목돈을 챙긴 시골아주머니와 아저씨들 호주머니를 노렸는데요.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아니면 약점이 있어서인지 돈을 몽땅 털린 사람에게는 몇 푼 쥐여주면서 어르고 달랬습니다.

 

설날에 아이들 옷이랑 신발이랑 사려고 가져온 돈을 거리의 사기꾼에게 몽땅 털리고 골목으로 들어와 울고불고하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을 보며 가슴 아파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때는 야바위꾼들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는데요. 드러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욕을 퍼부어대기도 했습니다.  

 

처음엔 돈을 잃어주는 게 야바위꾼들의 공식 절차였는데요. 내막을 잘 아는 남자가 달려들어 돈을 몇 푼 따가지고 가려다가 눈치를 챈 야바위꾼들과 사우는 광경도 목격했던 적이 있습니다. 통쾌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하더군요.  

 

풋풋한 정이 넘치는 상인과 손님의 흥정, 뱀 장수들의 능청스런 입담, 야바위꾼들의 몹쓸 짓을 보면서 나름대로 판단하는 가운데 사람을 좋아하고 누구와도 잘 어울릴 수 있는 원만한 성격이 형성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는데요. 그때 신작로 광경이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신작로, #재래시장,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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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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