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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 뚫렸다'

출근길 버스 안(26일)이었다. 지금까지 구제역으로부터 안전했던 경상남도가 드디어 뚫렸다는 소식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경남 김해의 돼지 농가에서 구제역으로 의심되는 돼지가 발견돼 주위의 1만4천 마리의 돼지를 살처분했다는 것이다. 당장 떠오르는 처가의 소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장인어른께 전화를 걸었다. 며칠 전 소들에게 구제역 백신을 맞히고 나니 그래도 한시름 놓이신다며 전화하셨던 아버님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아버님, 이 서방입니다. 김해에도 구제역이 발생했다는데 산청은 괜찮은가요?"
"너무 걱정은 말게. 김해면 산청까지 그래도 좀 먼 거리니까."

"경남이 뚫렸다니까 걱정이 돼서요. 예방접종이 구제역을 100% 막는 것도 아니라던데."
"문제는 구제역 백신을 접종하고도 아직 항체가 안 생겼다는 것일세. 항체가 생기는데 2주 정도 걸린다는데 설 전에는 생기지 않겠나 싶네."

"설날이 꺼림칙하네요. 사람들이 대규모로 움직이다 보면 분명 구제역 바이러스도 확산될 텐데. 그렇다고 안 내려 갈 수도 없고."
"괜찮을 거야. 설마하니 백신까지 맞혔는데 별일 있겠나."

비록 장인어른은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재차 강조하셨지만,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님의 바람 속에는 구제역 때문에 서울에서 사는 딸자식과 사위, 손녀가 설에 안 내려오면 어쩌지 하는 우려가 반쯤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우리 부부는 둘째를 가진 아내가 거동이 불편하기 전 12월이나 1월쯤 해서 산청에 내려갈 계획이었으나, 작년 말부터 불어 닥친 구제역 때문에 산청행을 포기한 상태였다. 우리가 숙주가 되어 구제역 바이러스를 산청에 퍼뜨릴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항상 사람을 그리워하시는 장인어른이 구제역에 대해 무덤덤한 듯 표현할 수밖에.

과연 우리는 아버님 말씀대로 설에 산청까지 내려가도 괜찮은 걸까?

무대책의 정부, 그 책임 면키 어렵다

안일안 대처로 인한 인동발 구제역
▲ 구제역 최초의 발생지역 안일안 대처로 인한 인동발 구제역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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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앞으로 다가온 민족의 대이동이 두려운 이유는 결국 구제역 방역에 있어 그 무능함의 절정을 보이고 있는 현 정부의 행태 때문이다. 물론 바람처럼 퍼지는 바이러스를 막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냐 만은 이번 구제역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번만큼 구제역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 현 정부는 그 책임을 면키 어렵다.

이번 사태에 대한 정부의 무능함은 25일 방영된 MBC <PD수첩> '구제역 대재앙' 편에 여실히 드러났다.

<PD수첩>은 최초 경북 안동에서 구제역이 발생됐을 때 정부가 6일 동안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아 바이러스가 전국으로 퍼졌음을 보도했다. 관계부처가 똥인지 된장인지를 구별 못해 손 놓고 있던 이 기간에 총 20여 명의 수의사, 축분업자, 사료운송업자 등이 안동의 구제역 양성판정 농가를 들렀다가 경기, 강원, 경북 일대의 총 80여 개 지역을 방문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구제역을 판단할 수 있는 키트의 한계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이는 어불성설이다. 농민이 구제역을 의심할 정도라면 전문가로서 최악의 상황을 상정한 채 최소한 방역이라도 실시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구제역이 전국으로 퍼지고 난 이후 벌어졌다. 인력부족으로 방역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것이다. <PD수첩>은 파주 농민들의 입을 빌려 이 한심한 행태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체 군(郡) 가축의 98%가 살처분 당하고 3천 마리만 겨우 살아있는 이 죽음의 땅에서 농민들이 증언하는 정부의 무능력함은 가히 상상 이상이었다. 장비와 인력이 부족해서 구제역으로 판정 받은 뒤에도 10일이나 지나서 살처분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이는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이, 2000년도 DJ 집권 시절의 구제역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새벽 2시에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국방부 장관에게 전화하여 새벽 4시에 군을 투입시켜서 살처분을 2천여 마리로 줄일 수 있었다는 그때 그 이야기. 왜 그 당시에는 가능했던 일이 지금 이 정부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되었는가.

MB 정부의 국방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말한 것을 들어보자. 장병들을 군대 보낸 부모들의 반대로 군부대를 투입시킬 수 없다나 어쨌다나. 기가 막힐 뿐이다. 부모들이 반대하더라도 장병들을 4대강 사업에 투입시켰으면서, 군부대의 시급한 투입이 매우 중요한 구제역 방역에 와서는 이런 소리를 한다.

도대체 그가 말한 부모들은 어느 나라 국민이며, 지금에 와서 대통령 한 마디로 뒤늦게 살처분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는 군부대는 어느 나라의 부대란 말인가. 국가의 지도층 대부분이 미필이라더니 우리의 국군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닌지.

그뿐만이 아니다. <PD수첩>은 구제역 살처분에 동원되었던 인력과 중장비들이 법적으로 규정된 일수는커녕 하루도 쉬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투입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구제역을 막겠다고 동원된 이들이 오히려 구제역 바이러스의 숙주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비극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현재의 모자란 인력과 장비. 이는 결국 우리가 현 정부의 예산집행이 어디에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봐야할 필연적인 이유다. 20조가 넘는 엄청난 예산을 전 국민의 70%가 반대하는 4대강 사업에 쏟아 부으면서, 지금 당장 국민들의 건강과 직결되는 구제역 방역은 허술하게 관리하고 있는 현 정부. 최소한 중장비의 경우 4대강 사업에 대거 투입되었던 장비들을 돌렸더라도 이 정도는 아니지 않겠는가.

구제역, 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이건 학살이다
▲ 끔찍한 현실 이건 학살이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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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설과 관련하여 데자뷰처럼 떠오르는 것은 지난 추석의 풍경이다. 유래가 없을 정도의 폭우로 서울 시내가 잠겼던 그 때(본 기자는 당시 최고 강수량을 기록했던 화곡1동 본가에서 열심히 물을 펐었다). 당시 정부와 서울시는 하늘만을 탓하면서 천재를 인재로 키운 바 있다. 아무리 명절이라고는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는지.

하물며 구제역이다. 지금까지 250만 마리가 넘는 가축들이 살처분 당하고 있는 구제역이다. 과연 이 허접하고 안일한 정부가 민족의 대이동이 벌어진다는 설에 구제역을 막을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정부는 26일 중요 담화문을 발표했다. 맹형규 행정안전부장관과 유정복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중앙청사에서 담화문을 발표하고 설 연휴 때 축산농가 방문을 자제할 것을 당부한 것이다. 결국 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국민들에게 설날이지만 움직이지 말아 달라는 읍소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읍소하기 전에 자신들의 잘못을 명명백백히 밝혀야 한다. 하릴없이 대통령이 구제역 방역지를 방문하여 한창 바쁜 군인들을 뻣뻣하게 세우기보다는 자신들이 현재 얼마나 대책없이 방역을 하고 있는지 솔직히 밝히고 많은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해 이 상황에 거국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쓸데없이 4대강에 들어가는 예산을 돌려 지금 당장 자식 같은 가축들을 잃은 농민들을 위로해야 하며 구제역을 불러 일으키는 우리 사회의 근본 원인을 분석하여 우리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이제 곧 설이다. 당장 기자만 하더라도 처가를 내려가야 할지 말지 고민이다. 안 내려가자니 아내의 눈치가 보이지만, 또 내려가자니 혹시 있을지도 모를 대재앙이 우려 되는 것이 현실이다. 부디 큰 일 없이 이번 설이 지나가기를.

그나저나 이 눈이 모두 녹고 따뜻한 봄이 오면 지하에서부터 가축들의 피가 솟아 넘칠 텐데 이는 어찌해야 할까. 정부는 서둘러 그 대책을 세우기 바란다. 당신들이 좋아하는 성경을 인용하자면 지금이 "들짐승과 하늘의 새들, 바다의 물고기마저 죽어간다(호세아 4:3)"는 바로 그 시기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구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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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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