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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유의미한 문제의식을 담아낸 것, 나는 그것이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바로 그 점이 예술작품과 트렌드물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널리 읽히는 예술작품이라면 몰라도 한 순간에 소비되고 사라지는 트렌드물은 각자의 방식대로 소비하면 그 뿐 진지하고 엄숙한 태도로 비판할 필요(가치)는 없다고 본다.

그러니까 '웃자고 만든 예능에 죽자고 다큐로 덤벼드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는 얘기를 위에 네 줄 깔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리 밝혀두지만 난 김은숙 작가님 팬이다(응..?). 나는 그 분의 깨알 같은 캐릭터 연출 스타일을 애정한다.

오스카와 길라임의 스타놀이("제 눈동자가 아름다운 건 잠시 지상에 내려온 별 하나가 제 눈 앞에 앉아 있기 때문 아닐까요?")라든가, 한태선과 만나면 여지없이 작렬하는 오스카의 백치미("연기는 뭐! 잘 하는 줄 알어? 내 팬들도 커버 안해, 그건! 차마!")라든가, 길라임에게 무슨 여자가 그렇게 미운 말을 쓰냐며 사회 지도층 운운하는 김주원씨가 성질 날 때 "얅!" 하고 소리치는 거라든가 하는 캐릭터들 때문에 "과민반응이라니? 성적 자기 수치심은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끼기만 해도 성립되는 거야"라는 다소 훈계조의 공익성(?) 철철 흘러넘치는 멘트를 날려주셔도 '김은숙 작가니까~' 로 넘어갈 수 있는 거다.

여하튼  시크릿 가든은 '재미있다'. 위와 같이 내 지극히 개인적인 개그코드에 부합하는 지점들을 빼더라도 의미있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은 있다고 본다. 권력은 그를 인식하고 있는 자들 사이에서 유의미한 지배-피지배 관계를 형성하기 마련일 텐데, 권력을 과시하려는 김주원씨의 노력("당신이 함부로 대할 그런 옷이 아냐!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이 권력을 인식하지 않는 혹은 거부하는 상대방들에 의해 번번히 좌초되는 맥락도 재미있다. 또 연예계의 최정상에 위치한 한류스타 오스카가 연기, 노래, 춤 모두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지점도 그렇고. 또 현빈이 연기하는 길라임이, 하지원이 연기하는 길라임보다 더 소극적이고 정형화된 여성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도 의미있게 볼 수 있고. 그렇지만 이 칼럼은 이런 식의 지점들을 조목조목 나열하고 칭송(?)할 의도로 쓴 글은 아니다.

이 글은 한국에서는 왜 그렇게 많은 재벌드라마가 생산되는 건지, 그렇게나 많은 재벌드라마가 생산되는데 특별히 <시크릿 가든>이 대중에게 잘 먹힌 이유는 뭔지, 정말로 <시크릿 가든>은 그 이전의 재벌 드라마와 선을 긋긴 그은 건지에 관해 쓴 글이다.

한 계층이 다른 계층을 착취함으로써 존재 가능한 사회에서는 그러한 방식을 '착취'가 아닌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이길 원하고 그런 개념들을 법 또는 윤리 또는 상식으로 만들면서 지속시킨다. 그러한 개념 중에 하나가 '연애'이다. 권력자의 피권력자를 향한 무례와 폭언, 폭력을 사랑에서 비롯한 관심으로 읽도록 하고 이것은 하나의 문화가 된다. 즉 상위 계급의 무례와 폭언, 폭력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고, 그 자체를 연애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되며 폭력은 에로틱한 쾌락으로 둔갑한다. 이때 권력 위계의 격차가 크면 클수록 에로틱한 쾌감도 비례해서 커진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위계가 탄탄한 사회에서는 평등한 관계를 로맨스로 읽지 못한다. 권력의 격차에서 오는 폭력성을 에로틱한 쾌락으로 대체해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사람들은 평등한 관계를 로맨틱하게 읽어낼 수 없다.

또한 성별 위계가 존재하는 사회라면 성별권력과 계급 권력(자본)은 같이 움직인다. 이것이 한국의 재벌들이 언제나 남성으로 재현되는 이유이다. 예를 들어, 재벌 여성과 가난한 남성의 로맨스를 다룬 드라마(<포도밭의 그 사나이>의 윤은혜와 오만석, <아가씨를 부탁해>의 윤은혜와 윤상현 등)는 흥행에 성공하기 어렵고 저조한 시청률로 막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단지 그 드라마의 내적 완결성에 관한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재벌 여성과 가난한 남성의 로맨스는 성별권력과 계급권력이 교차해서 탄탄하게 버티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로맨틱한 코드로 읽힐 수 없는 기반에 관한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일단 로맨틱하게 읽히기 시작한 관계에선 어떠한 비판도 불가능해진다. 권력자의 무례와 폭언, 폭력을 연애로 이해하는 사회에서는 그들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게 되고 도리어 관대해진다. 더 나아가 그들의 무례와 폭언, 폭력에는 언제나 '이유'가 준비되어 있다. 원래는 심성 곱고 착한 앤데 커다란 교통사고 후 여자친구는 말도 없이 떠나서(<내이름의 김삼순>의 현진헌), 원래는 심성 곱고 착한 앤데 충격적인 엘리베이터 사고 후 폐소공포증이 생겨서(우리의 김주원씨) 라는 식으로. 자 이쯤에서 한 번 묻자. 왜들 이렇게 재벌에게는 관대한가? 마치 그들이 삐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주지 못해 안달난 사람들처럼.

한편 한국의 수많은 '재벌 드라마'에는 출생의 비밀, 권력 암투, 살인 외에도 성폭력, 강간, 불륜 등 소위 '막장' 요소가 빠짐없이 등장했다. 물론 재벌 드라마라고 다 막장인 것은 아니지만 막장 드라마에는 재벌이 언제나, 늘, 어김없이 등장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막장'의 요소는 항상 '진짜 재벌'이 아닌 '가짜 재벌'을 향해 가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자. '가짜 재벌'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진짜 재벌'의 입장에서 그들의 '순혈성'을 해치는 사람들이다.

재벌의 명맥을 이을 자격이 없는 '서자' 이거나(<제빵왕 김탁구>의 구마준), 굴러온 돌일 수밖에 없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역전의 여왕>의 하유미, <시크릿 가든>의 박상무) 같은. 그들은 언제나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에 가득 차 '진짜 재벌'을 위협하는 '천박'한 '가짜 재벌'로 등장해 갈등라인을 형성한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지 못해서 자원이 없는 사람들은 금수저를 기반으로 한 사람들이 갖는 '우아함(그런 게 진정 우아함이냐,의 논의는 뒤로하더라도)'을 갖출 여력이 없었다는 점은 언제나 삭제된다. '가짜 재벌'들이 '진짜 재벌'에게 언제나 패배하는 이유를 그들이 도덕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풀어내는 방식에는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 '진짜 재벌'들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도덕적이었나? '북한에게 핵무기를 포기하라고 당당히 명령하는 핵보유국들의 요구는 도덕적일 수 있는가'와 문제의식을 같이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성별권력과 계급권력을 로맨틱한 코드로 읽어내는 사회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드라마에 재벌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고 그것이 드라마가 흥행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아울러 '진짜 재벌'에 도전하는 '가짜 재벌'의 갈등 양상도 지금까지 재벌 드라마에서 수없이 나온 계급을 재현하는 방식이었다.

이 드라마가 아무리 수많은 재벌 드라마들과 선을 그으려 한다고 해도 결국 재벌 남성과 가난한 여성의 현격한 계급 차이 자체를 로맨틱하게 코드화해서 연애로 '위장'한다는 점에서 6년 전의 <파리의 연인>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오스카가 김주원씨에게 "파리의 연인 패러디하지 말"라고 말한 건, 길라임씨 신데렐라 만들어 줄 것도 아니면서 질척대는 거 그만두라는 의미였겠지만 <시크릿 가든>은 성별권력과 계급권력을 주된 로맨틱 코드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파리의 연인>을 패러디 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서 생산된 재벌 재현물 중 가장 솔직하게 표현된 것은 <하녀>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은이(전도연)와 훈(이정재)의 관계를 '연애'로 위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별권력과 계급권력을 주된 로맨틱한 코드로 삼은 <시크릿 가든>이, <파리의 연인> 패러디하는 <시크릿 가든>이, 어떤 점에서 참신하게 읽혔기에 특별히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걸까?

분명 <시크릿 가든>은 이전의 한국에서 넘쳐나게 생산된 재벌남성과 가난한 여성의 연애가 주제인 드라마와는 선을 그으려는 시도를 꽤 많이 보인다. '감히' 재벌을 넘봐서 '분수'를 몰라 질책과 책망의 대상이 되어 왔던 여자가, 되려 '얘 나랑 놀 주제 안돼요'라고 선언하는 부분이라던가, 재벌과 만나는 가난한 여자의 미래는 인어공주라며 거래를 제안하는 손익계산 확실한 남자 주인공의 면모, 재벌남자가 가난한 여자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점 등이 그렇다.

분명 어떤 시도들은 유의미하게 읽히는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얘 나랑 놀 주제 안돼요' 했다가 결국 놀고(?), 신데렐라 만들어 줄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인어공주 안 시키려고 하는 것 같고, 계급을 '노동조직에서의 부의 분배방식과 수량의 다름에 따라 생기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남자 주인공의 현실인식은 계급의 존재만을 확인하는 데 그치고 그 분배방식과 수량의 다름은 왜 다르며 그것은 타당한 것인가에 관한 고민에 이르지는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김주원씨가 가난 혹은 계급에 대해 고민할 때 읽는 책은 <자본론>이 아니라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가 되는 것이다. 애초에 이 드라마의 관심사는 계급에 대해 말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자남자와 가난한 여자가 연애하는 드라마만 잔뜩 양산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자 남성을 욕망하는 여자들을 향해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며 그런 여성들을 웃음거리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김두식 선생님의 <불편해도 괜찮아>에서는 '조지 윌리스'라는 정치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다. 진보적 정책을 추구했던 조지 윌리스가 선거에서 패하자 인종주의, 분리주의자로 선회해 오랜 기간 정치 생명을 누렸던 점을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점은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향한 비판만큼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우리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 사람인가/사람이어야 하는가'를 묻는 교훈을 준다.

시놉시스를 쓰는 작가들이 대중을 열광하게 하는 그 자체에만 골몰한다고 비판하기 전에 우리사회는 어떤 담론에 열렬히 반응하는가를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글을 쓰는 작가들이 트렌드물 생산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창조하는데에 그들이 가진 열정을 쏟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온에어>라는 드라마 속의 드라마 <티켓 두 더 문> 같은 '착한 드라마'를 보고 싶은 것이다.

정말로 의미있는, 그 이전의 재벌 드라마들과 선을 확실히 긋는 짜릿한 드라마를 한국에서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대중의 로맨스 코드를 잘 읽어내며 매번 히트작을 내어놓는 김은숙 작가님께 이렇게 묻고 싶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태그:#시크릿가든, #계급 권력, #성별 위계, #오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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