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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달은 촛불이요 또 벗이라
흰 구름 자리삼고 병풍으로 삼았네.
솔바람소리 들리는 듯 찻물 끓는 소리에
맑고 서늘한 기운 영혼을 일깨우네.
흰 구름, 밝은 달 두 벗만 허락하니
도인의 찻자리 이보다 좋으랴.[동다송(東茶頌)]"

'한국의 다성(茶聖)' 초의선사다. 초의의 <동다송>은 조선에서 나는 차의 덕을 드러내 칭송하고자 차의 오묘한 이치를 가려뽑아서 차의 원류를 세상에 알리고자 한 것이었다. 초의가 '동다송'을 저술한 뜻은 차의 고결한 가치를 알려 사람에게 유익한 차의 공능을 함께 공유하려 했던 것. 초의는 조선후기 맥이 끊길 위기에 있던 한국의 차문화를 중흥하여 '초의차(草衣茶)'로 불릴 만큼 뛰어난 품격의 차를 완성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중요한 업적을 남긴 분이다.

또한 초의는 시(時), 서(書), 화(畵), 다(茶)에 뛰어나 사절(四絶)이라 불렀으며 장 담그는 법, 단방약, 화초 기르는 법 등 일상사에까지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였다. 특히 그림을 잘 그렸는데 불화, 인물화 등 대흥사에 있는 그림은 거의 대부분 초의가 그렸다고 할 정도로 뛰어났다. 초의는 남종화의 거두인 소치 허유(許維, 일명 허련(許鍊), 1808~1893)를 길러 내기도 했다.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 박동춘 선생이 선사의 차문화에 대한 30년간의 학문적 성과를 모아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라는 책을 펴냈다. 커피 프렌차이즈 매장은 급속도로 늘고 있다. 커피믹스 시장은 1조 원을 돌파했다. 차 문화에서 커피문화로 급속도로 경도되어가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커피 관련 서적 출판은 또한 유행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의 전통차에 대한 전문연구서의 출간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위해서나 '법고창신'을 위해서나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저자가 초의선사를 알게 된 것은 응송 노스님으로부터이다. 그는 자신이 써 놓은 차에 대한 원고를 윤문할 젊은이를 찾았는데 꼭 한문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노스님과의 인연은 결과적으로 그의 원고가 <동다정통고>라는 책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고, 필자에게 '전함이 없이 전했고 받음이 없이 받았다. 전함이 없는 고로 참으로 전했고 받음이 없는 고로 참으로 받았다'라는 <다도전수게(茶道傳授偈)>로 전해졌다. 응송스님의 초의에 대한 연구가 저자에게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다.

추사와 초의와의 차 인연

"원래 서찰은 차를 부탁하는 것이었소. 이곳에서 차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스님도 아시는 것이지요. 스님이 법제하는 차는 당연히 해마다 하는 일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지요. 그 절에서 만든 스님 단을 30~40편쯤 조금 좋은 것을 가려 보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적거지 제주에서 차를 보내달라는 추사 김정희의 편지다. 추사는 초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실제로 초의가 북학파들과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영향력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초의는 추사와의 교유를 통해 당시 청의 문물에 대한 안목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신학문인 고증학이나 실학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또한 초의는 추사를 통해 북학파 경화사족과의 교유를 확대하여 실질적인 차의 애호층을 확대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들이 초의차를 통해 차에 관심을 갖게 하는 동기를 부여하였다.

"차를 보내 주시니 가슴이 시원해짐을 느낍니다만, 매번 차를 덖는 법이 조금 지나쳐 차의 정기가 덜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차를 다시 만든다면 화후를 조심하는 것이 어떨지요."

1838년 추사가 초의차를 받고 차에 대한 실제적인 조언을 지적한 글이다. 추사와 초의의 인연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근거다. 이렇듯 저자는 조선후기 각종 저작에 나타난 글들을 분석하여 추사 등 조선후기 경화사족들의 차문화, 그리고 이들과의 관계가 조선후기 한국 차문화 중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꼼꼼히 문헌학적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이렇게 성립한 초의차의 전통이 어떻게 계승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응송 박영희 스님을 거쳐 오늘날 우리에게 한 잔의 차로 향기를 나눌 수 있는지, 초의차문화로 대변되는 전통 차문화의 현대적 계승에 대해 다맥과 뿌리를 찾았다. 동지섣달 매화소식이다.

초의차의 현대적 의미

저자는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의 결론에서, 초의차를 통한 차문화의 중흥요인과 초의의 다도관 및 초의 다도의 전승문제를 모두 여섯 가지로 정리했다. 이 중 일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특징을 네 가지 정도로만 정리한다면, 이렇게 될 것 같다.

첫째, '초의차'의 태생적 바탕은 불교이며 대흥사의 다풍을 이었다는 점이다. 초의의 다도의 사상적인 토대는 불교의 '불이선(不二禪)'이며, 이는 서산대사 이후 면면히 이어진 조주의 '끽다거(喫茶去)' 전통을 이은 것이다.

둘째, 당시 북학파의 경화사족들에게는 급변하는 사회, 경제적 현실을 직시하면서 조선의 문화자존의식을 고양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들이 '초의차'를 통해 우리 차를 알게 된 사실은 그 일환이며 특히 그들은 차의 맑고 담박한 가치를 존중하였고 마음과 몸을 순화하는 효능을 공유하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초의차'를 통해 우리 차의 품격이 중국차보다 뛰어나다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셋째, 초의가 중흥했던 차문화의 역동성은 후대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초의가 이룩한 다도는 '범해'에게 이어져 '금명', '응송'에게로 전해져 한국 차의 독특한 차의 미감인 시원하고 담박한 차의 품색과 활활한 차의 기품이 전승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넷째, 이로써 초의의 다도관은 추사가 '초의차'의 경지를 표현한 다삼매(茶三昧), 명선(茗禪), 전다삼매(煎茶三昧) 등으로 정의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저술 바깥에서 잠시 빌려온 초의와 다산 정약용과의 아름다운 인연법으로 갈무리 하는 것이 좋을 성 싶다.

다산 연구가 차벽에 의하면, 초의는 다산초당에서 1810년에서 1815년 사이에 길게는 6개월 동안 함께 생활하며 배웠다( <다산의 후반생>, 돌베개). 다산은 초의를 위해 시를 지었다.

"축 늘어진 초의와
풀어헤친 민둥 머리에,
너의 중 껍데기 벗겨 버리고
너의 유자의 뼈 드러내었다.
묵은 거울 이미 갈고 닦았고
새 도끼는 무디지 않아서,
이미 밝게 깨치었으나
이것은 곧 제이월(第二月 두 번째 달. 즉 무의미함을 뜻함)이로세"
['경인년 제석에 여러 벗들과 함께 운자를 각자 정하여 짓다' 중 다섯 번째 시 '초의선(草衣禪)에게 주다'(1830년작)]

한 소식 쉬어가는 새해 연휴되시기를, 그리하여 올 한 해 마음 속 차향기 그윽한 복된 나날 되시기를...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박동춘 지음, 일지사(2010)


#초의선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동다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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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영남대, 전남대 로스쿨 및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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