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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치 시장
 자갈치 시장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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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치 시장은 동양 최대의 어시장으로 손꼽힌다. 이 어시장은 생선류와 어패류, 건어물 파는 시장으로 크게 나뉜다. 자갈치 시장 안의 제 1, 2 잠수기 수협 부산 공판장은 어패류를 파는 시장. 자갈치 잠수기 수협 부산 공판장 시장에 대해 알려면, 우선 자갈치 시장에 대한 유래를 아는 것이 그 순서이겠다.

자갈치시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수산물종합시장으로 지난 46년 결성된 자갈치 생어업조합이 모태. 지난 69년 수산청으로부터 사단법인 부산어패류처리조합으로 인가를 받아 이듬해 3층 건물로 자리 잡았다. - <국제신문, 자갈치 시장의 유래(2001년 1월 26일자)에서 발췌>

부산의 어시장은 북항의 부산수산주식회사와 남항의 부산어협 위탁판매장으로 양분되었는데, 그 뒤 부산수산주식회사는 국내 최대의 어시장인 현재의 부산 공동어시장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남항에 출어하는 영세어선들의 어획물을 다루는 영세상인들이 부산어협 위탁판매장 주변에 모여 지금의 자갈치시장을 이루었다. - <네이버 백과 사전에서 발췌>

자갈치 잠수기 수협 부산 공판장
 자갈치 잠수기 수협 부산 공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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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자갈치 시장의 제 1, 2구 잠수기 수협 위판장은 다양한 어패류를 파는 공판장. 그러나 부산 앞바다는 어패류가 많이 생산되지 않고 대부분 타 지역에서 도착한 어선에서 하선된 어패류를 새벽 자갈치 경매 시장에서 받아 도소매하는 형태이다.

제 1, 2 잠수기 수협 부산 공판장, 이청수 할아버지와 곽명희 할머니 이야기

이 위판장에서 바늘가는 데 실이 따라다니듯이 근 60년 세월을 노부부(이청수 할아버지와 곽명희 할머니)가 중도매인으로 일하고 있다는 입소문을 접하고 지난 25일 아침 일찍 자갈치 시장을 찾았다. (실은 지난 목요일 늦은 오후에 찾았으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인터뷰를 할 수 없었다.)

그날 곽명희 할머니(83)와의 약속에 따라 오전 9시경에 자갈치 시장에 도착하니 시장이 아직 서지 않아서 비교적 한산했다. 이청수 할아버지(87)는 새벽 4시경에 있는 경매가 끝나고 자리에 안 계시고, 곽명희 할머니는 꽁꽁 언 손을 녹여가며 조개를 쉬지 않고 까고 있었다. 아래는 곽명희 할머니에게(이청수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몇 마디 묻고 답한 내용이다.

"할머니, 조개를 정말 잘 까시네요. 하루에 몇 개나 까세요?"
"아마 2~3천개 쯤 되지 싶어."
"날씨가 너무 추운데 힘드시지 않으세요?"
"60년 넘게 이 일만 했으니 이제 눈 감고도 할 수 있어.(웃음) 하지만 겨울에는 손이 시려워서 난로에 물을 끓여 이렇게 언 손을 녹여가면서 일을 해야 해. 그래도 난 일이 즐거워. 이 나이에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지."  

자갈치 시장 소문난 잉꼬 부부
 자갈치 시장 소문난 잉꼬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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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치 시장 내 제 1, 2구 잠수기 수협 부산 공판장 중도매인 25번으로 알려진 이청수 할아버지와 대합, 바지락, 홍합 등을 파시는 곽명희 할머니는, 자갈치 시장의 잠수기 수협 공판장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장사해 온 터줏대감.

곽명희 할머니는 20대부터 자갈치 시장에서 어패류를 팔아오셨다. 그러니까 이청수 할아버지가 고향(거제도 장목면 유호리)에서 잠수기어업을 하고, 할머니는 자갈치 시장에서 난전에서 어패류 장사를 하신 것. 이제는 비바람이 보호되는 공판장 안에서 장사하고 있다.

정말 자갈치 겨울 바닷바람은 살갗을 바늘로 콕콕 찔러대는 듯했다. 추위로 발을 동동 굴리는 내게 할머니는 바쁜 일손을 놓고 혹시 할아버지가 그곳에 계실지 모르겠다고 안내해 주어 따라간 곳은 공판장 근처 컨테이너로 만든 가건물의 '쉼터'였다.

이 쉼터로 들어서자, 이청수 할아버지는 고개를 갸웃거리시며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난 별로 할 얘기가 없는데...' 말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기자는 '한 십분 정도만 이야기하면 됩니다'고 말하자 그는 고개를 말없이 끄떡이었다. 사실 날씨도 엄청 춥고 쉬는 시간이라서, 인터뷰를 번거롭다고 거절하면 어쩌나하는 염려를 했던 것이다.

이청수 할아버지는 선대 때부터 어업에 종사한 가문. 할아버지는 19세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향에서 어업을 하다가, 70년대 잠수기 어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나, 인명사고가 잦은 위험한 잠수기 어업으로 인해(당시 보험이 없어서) 살던 집도 팔고 파산을 한다.

그러나 절망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주위에 돈을 빌려 재기를 꿈꾸며 다시 잠수기 어업에 종사하였고, 당시 결혼 한 해녀 출신 곽명희 할머니의 내조 덕분에 위기를 잘 모면했다고 할아버지는 은근히 내조자 곽명희 할머니에의 자랑에 열을 올리셨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덧붙이셨다.

"우리 할매도 내 속 안 썩였지만, 나도 우리 할매 속 썩인 적이 단 한번도 없어... 물론 술도 담배도 평생 입에 대지 않았으니까.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니 부부 싸움 할 일도 없었고, 자식들도 속 한번 썩이지 않고 잘 커주고 정말 모두 할매가 잘 해 준 덕분이야..."

이청수 자갈치 할아버지
 이청수 자갈치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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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자갈치 시장의 질서 있는 유통 구조에 일조하다

이청수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가정에서도 바깥 생활도 모범생이시다. 할아버지는 당시 잠수기 조합 공판장이 없어서 유통에 있어서 매우 질서가 없어서 상인들이 애로가 많고 물질적 손실을 많이 입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해서 몇몇 뜻 있는 동료들과 함께 오늘날의 제 1, 2지구 잠수기 수협 부산공판장의 체계적인 시스템의 기초를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이 일로 공로패를 수 회 받는다. 이렇게 어업 일을 하면서 할아버지가 행정일에 앞장 설 수 있었던 것은, 이청수 할아버지의 돌아가신 아버지의 학구열 덕분이라고 강조한다.

이청수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마산 공립보통학교(현재, 성호초등학교)를 졸업 후, 마산의 '통영수고'를 졸업한다. 그 당시 거제도에서 마산까지 유학을 한 사람은 마을에 없었다고 말하며,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야기에 울먹이기까지 하였다.

이런 이청수 할아버지와 평생 반려자로 살아온 곽명희 할머니는, 고향을 들락이며 어업을 하시는 할아버지가 바쁠 때 할아버지의 중도매인업을  대신했다고. 할머니 역시 여러차례의 공로상패를 받는다.

이청수 할아버지의 회상에 의하면, 자갈치 시장은 6. 25 동란 시절만 해도 변변한 건물 하나 없이 온통 길에는 노점상들뿐이었다고 한다. 특히 잠수기 어업은 여느 어업에 비해 상당히 낙후하였고, 인명 사고도 잦고 이에 대한 체계적인 행정 시스템이 부실하여 잠수기 어업에 종사하는 당시 상인들이 참으로 힘들게 장사했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지난 세월의 어려움들이 거름이 되어 이제 자갈치 시장는 현대식 건물로 리모델링되고 복합문화공간의 새로운 자갈치 문화가 생성되면서 현재의 자갈치 시장문화는 새롭게 거듭났다. 이청수 할아버지는 최근 더욱 새로워진 자갈치 시장의 변화로 인해, 제 1, 2 잠수기 수협 부산 공판장 사람들은 편안하게 어업에 종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20여년 전부터 바다 오염으로 패조개들이 많이 생산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현재 자갈치 시장에 들어오는 어패류는 진해 앞바다와 가덕도 거제도의 청정해역에서 생산된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자갈치 어패류 시장
 자갈치 어패류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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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과 바늘이 되어,서로의 부족한 면 채워주고 도와주다

실과 바늘처럼 60평생 늘 곁에서 서로의 하는 일을 위로하고, 서로 각자 맡은 역할을 하면서 그 빈 자리를 서로 채워주고 대신 해주는 이청수 할아버지와 곽명희 할머니에게 기자는 두분의 다정한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다고 하니 할아버지는 한 마디로 거절한다.

"난 옛날 할배야. 나보고 요즘 젊은이처럼 하라고 하면 안되지...(웃음)"

말씀은 이렇게 하였지만, 이청수 할아버지는 할매가 내게 시집와서 정말 고생을 했다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런 할아버지 모습에서 할머니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바다처럼 깊은지 충분히 눈치 챌 수 있었다.

슬하에 둔 7남매를 어렵게 공부 가르치고 출가시켜, 이제는 많은 손녀와 손자를 둔 이청수 할아버지와 곽명희 할머니. 그러나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요즘의 노부부들처럼 두 분만 단촐하게 사신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파산해서 날렸던 집도 장만했고, 어려웠던 보릿고개시절을 옛이야기처럼 하며 사신단다.

두 분을 취재하면서 기자가 정말 신기하게 생각한 점은 두 분이 팔십이 넘은 고령에 비해 너무 건강하고 젊다는 것과 젊은 사람들도 힘든 일을, 새벽 4시에 시장에 나와서 저녁 7시가 넘어서야 집에 귀가한다는 점이었다.

두 분은 옛날 분이지만, 일의 목적이 돈벌이보다는 자신의 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평생 일손을 놓은 적이 없이 바쁘게 삶을 살다가신 어머니가 생각나서 콧날이 씨큰했다. 

자갈치 어패류 시장
 자갈치 어패류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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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자갈치 시장은 1970년 10월 자갈치어패류처리조합 건물이 새로 들어서면서 자갈치시장은 새 전기를 맞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자갈치 난전과 판잣집 가게들이 몽땅 새로 단장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둥지를 틀게 된 것. 이로 인해 난전장사를 해왔던 노점상들이, 자갈치어패류처리조합(현 부산어패류처리조합) 으로 변신한 것이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눈이 오거나 60여년의 세월을 한결 같이 새벽별을 보고 자갈치 시장에 나와 저녁별을 보고 귀가한 이청수 할아버지와  곽명희 할머니. 팔순을 넘긴 연세에도 너무 건강해 보여서 그 비결을 끝으로 물어보았다.

"아마도 영양가 높은 어패물을 마음껏 먹어서 일꺼야. 하하하 우리 할매도 아픈 곳이 아직 없어...그저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이야. 하하하"

할아버지의 웃음 소리는 정말 나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싱그러운 해산물 같은 웃음이었다.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제강점기와 6. 25전쟁을 거쳐 온 세대의 이청수 할아버지 부부의 이야기는, 곧 자갈치 시장의 살아 있는 역사이자 생생한 증언이 아닐까 싶다.

평생 정직하게 살겠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당당하게 자신하는 이청수 할아버지. 그리고 어려울 때나 기쁠 때나 묵묵히 지아비를 내조하며 함께 장사와 살림살이를 돌보며 살아온 곽명희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위하여 마음 속으로 오래 건강하시라고 빌어본다.

그런데 아쉬움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할머니에게 할아버지가 정말 속 한번 안 썩였는지 물어보지 못한 것.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 당시 여인이면 누구나 겪어야 했던, 남존여비의 사상이 뿌리 깊었던 그 세대의 지아비 입장에서는 감히 짐작할 수 없는 힘겨운 시집살이 애환이 하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에게 못다 들은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자갈치 아지매, 곽명희 씨
 자갈치 아지매, 곽명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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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수가 없도록 이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한마디~ 못하~고
헤아릴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여자의 일생> 중- 이미자 


태그:#자갈치 시장, #이청수 할아버지, #곽명희 할머니, #잠수기수협공판장, #중도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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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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