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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이승만파 사람들의 전횡으로 국민회가 둘로 쪼개지는 1918년 초까지 박용만은 표면적이나마 이승만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918년 2월 27일에 시작돼 3월 8일에 끝난 재판에서 내뱉은 이승만의 증언은 그로 하여금 영원한 결별을 결심하게 된다. 그것은 '출운호(出雲號) 사건'에 대한 증언이었다.

 

하와이에 초청돼 떠나기 전만 하드래도 박용만은 이런 파국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본토에서 하와이 행을 앞두고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극진한 공경은 물론 끈끈한 우애가 묻어나온다.

 

1912년 9월 30일자 박용만이 이승만께 보낸 편지 

 

"(전략) 하와이 사람들이 초청한 것은 애정에서 나온 것 같으며, 또한 뜻한 바가 있어서 나온 것 같기도 합니다. 아우는 작년 이래로 저들과 서신으로 상통한 바가 있는데 편지마다 '당신은 오라'고 했습니다. (중략) 저들은 다만 우리에게 4,5개월의 시일만을 바랄 뿐 우리를 하와이 섬에 오래 머물게 하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저들도 이미 말하기를 '소인(小人)은 군자(君子)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공경하지만 가까이 있으면 불손해진다. 그 때문에 누구누구라고 명성이 알려진 사람이 하와이에 오래 머물게 되면 하와이 사람의 무지와 몰이해로 장차 불손해질 것이다. 그 때문에 명성이 알려진 사람을 한때 방문하게 한 뒤에는 다른 곳으로 돌아가게 해 여론을 환기시키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저들의 말로는 이(李)·박(朴) 양 씨가 비록 식견이 있고 지명도도 있는 사람이지만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그들 역시 오늘 일을 꾸며서 내일 성과를 거둘 도리가 없을 터라 하니 다만 한 번 만나서 그 말이나 들어볼 뿐이라고 합니다."

 

1912년 11월 1일 박용만이 이승만께 보낸 편지

 

"오늘 아침에 하와이에서 온 서신을 보니 하와이 사람들이 우리 형님에게 바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번 만나 보기를 원할 따름이다. 다만 한 번 가르침을 받고 싶을 뿐이지 다른 소망은 없다.'고 합니다. 바라건대 형님께서 헤아려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정칠성(鄭七成) 씨가 말하기를 '만일 형님께서 이곳에 오시면 하와이에 오래 머무실 것이 아니라 다만 며칠 또는 몇 달 동안 계시면서 한인을 심방할 뿐이다. 심방한 뒤에는 그들의 형편을 살펴보고 만일 가르쳐 주시는 일이 있으면 순종하고 실행할 다름이다. 운운' 했습니다.

 

정씨는 또 말하기를 '자신이 일전에 형님에게 답장을 보냈는데 그 서신의 뜻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다만 그 서신에 준하여 우리 형님에게 말씀해 주기 바란다.'고 했습니다." 

 

두 편지를 눈여겨보면 몇 대목이 눈길을 붙잡는다. '당신은 오라'고 한 대목은 박용만에게는 확실한 일자리를 마련해뒀다는 암시가 아닐까. 실제 박용만은 하와이로 건너가자 <신한국보>의 주필을 맡았다.

 

'이(李)·박(朴) 양 씨가 비록 식견이 있고 지명도도 있는 사람이지만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그들 역시 오늘 일을 꾸며서 내일 성과를 거둘 도리가 없을 터라...'는 대목은 하와이의 상황이 아직 두 사람을 받아들일 만한 일거리가 없다는 뜻이 아닐까. 그래서 '하와이 사람들이 우리 형님에게 바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번 만나보기를 원할 따름이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알려줬음에도 이승만은 굳이 하와이에 주저앉고 말았다. 더 나아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파내듯 박용만을 밀어내고 말았다.

 

증언대에 선 이승만은 박용만파를 '군단 사람'이라고 칭하면서 "소위 군단 사람이 일본 군함을 폭발탄으로 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것은 1914년 말 일본군함 '출운호'가 호놀룰루에 입항한 적이 있는데 한인들이 출운호를 파괴할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를 받은 적이 있다. 이승만은 국민회 대의원회에서 소란을 피운 박용만파가 그처럼 호전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광고하기 위해 부러 3년 전 일을 끄집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어 "이것이 다만 농담이라"고 지나갔다.

 

출운호는 1만3천Km까지 항해할 수 있는 순양함으로 1898년 영국에서 건조됐다. 1905년 대마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멸하는 해전에 투입됐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미국과 일본은 동맹국이었으므로 출운호가 미국 서해안으로 가는 길에 호놀룰루를 방문한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국과 일본은 교전국이 됐다. 출운호는 1945년 7월 미공군기의 폭격을 받고 히로시마에서 침몰했다.

 

출운호가 호놀룰루에 정박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대조선 국민군단이 폭파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발했다. 미국 육군 부대는 국민군단의 단장 박용만과 그의 부관인 태병선을 불러 조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은 일본의 적국이었다. 미국은 나중에 참전했지만 전쟁 초기에는 중립을 지켰다. 따라서 독일 군함들도 미국 항구에 드나들 수 있었다. 독일 군함 가이어호가 10월 15일 호놀룰루에 도착해서 정박했다.

 

미군 조사관은 박용만에게 어찌하여 독일인과 친선을 갖게 됐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물론하고 우리의 원수 일인과 원수가 되는 때는 자연히 동정자가 되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폭탄은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물음에 독일 군함에서 얻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당신이 군단을 설립하고 군사를 훈련하는 것이 다 독일을 돕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는 아니다. 우리의 힘으로 어찌 남을 돕겠나?라고 반문했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처럼 일본의 적국인 독일에 대해 한인들은 동정감을 가졌다. 뉴욕에서 활동 중인 김헌식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뉴욕 주재 독일 영사관을 찾아가 성금 20달러를 전달했다. 20달러는 한 달 봉급이 될 만큼 적지 않은 액수였다. 그는 박용만이 1908년 7월 덴버에서 애국동지대표회의를 열었을 때 뉴욕에서 불원천리하고 참석했던 사람이다.

 

'출운호'는 그 전 해 12월에도 멕시코를 향하는 도중 호놀룰루에 기착한 적이 있었다. 군단 사람들이 일본 군함이 들어오면 파괴 운운하는 것은 자연발생적인 발언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실제 독일 군함에서 폭탄을 얻을 수 있었는지는 의문스럽다.

 

어쨌든 3년 전의 '출운호 사건'을 이승만이 들먹이자 분노를 참을 수 없게 된 박용만은 1918년 6월 11일에 발행된 하와이 연합회 공고서 제30호에 자신의 심경을 밝힌다.

 

"(전략) 만일 싸움을 다시 계속하는 경우에는 비록 정치상 싸움을 할지라도 개인상 싸움은 하지 말지며 또는 비록 개인상 싸움까지 할지로되 결단코 국가 민생에 방해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비록 천만 가지 욕설을 다 들어도 다 용서하고 참을 수 있으되 출운호를 침몰시키려 했다는 말이나 일본과 싸우기를 준비하는 말 같은 것은 비록 근저 없는 말이나  이는 곧 국가 전도에 관계되는 일인 고로 누군든지 함부로 말해 우리의 원수를 도와주는 것이 불가한 줄 아노라."

 

한편 이승만은 1915년 6월 17일자 현지 영자 신문 <호놀룰루 스타 불리틴>에 실린 기고문에서 "나는 어떤 반일적 내용도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보편적인 인류애를 강조할 뿐이다. 이 지역 일본인 신문들은 내가 반일 감정을 일으킨다는 오해를 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런 사람이 나중 박용만을 '일본 밀정'으로 중상했으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승만이 기고를 하게 된 것은 그 전 날 기사에서 그의 이름과 박용만의 이름을 뒤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호놀룰루 영자 신문들은 5월 1일 국민회 임시 대의회 이래 이승만파와 박용만파 사이에 충돌이 자주 일어나자 그때마다 기사를 썼다.

 

6월 16일자 기사에서 "두 당파 중에서 하나는 조국의 혁명과 독립을 군사수단으로 쟁취하려는 파이며 그 수령은 이승만이고, 또 하나는 국민회 일 년간 수입 약 2만 불을 순전히 한인의 교육과 복지를 위해 쓰자는 파인데 그 수령은 박용만이라고 하였고..."라면서 이름들을 뒤바꿔 놓았던 것이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 직함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도 일제와의 교류를 묵인했다. 1922년 11월 이승만이 총감독으로 있는 '한인기도교회'의 헌당식에 일본 총영사가 하객으로 참석했다. 그 다음 해 그가 원장으로 있는 '한인기독학원'의 남녀 학생 20여 명을 고국에 보내 4개월 간 여행도 하고 모금활동을 하게 했다. 이것은 일본 총영사관의 호의와 후원이 없었다면 가능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태그:#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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