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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핸드폰 단축번호 1번은 어떤 닉네임인가요?
당신 핸드폰 단축번호 1번은 어떤 닉네임인가요? ⓒ 최은경

"엄마. 내가 엄마한테 장애물이고 걸림돌이야?"

이런 느닷없는 질문은 지금은 중학생이 된 아이가 몇 년 전 엄마 핸드폰을 열어보고 했던 질문이다. 엄마 핸드폰에 입력된 자신의 닉네임이 '라훌라'라는 이상한 단어로 뜨는데 친구들하고 지식인 검색을 해보니 거기엔 대충 '장애물', '걸림돌' 등 안 좋은 뜻풀이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친구 엄마들은 친구들을 다들 '예쁜 딸', '공주님', '소중한 보물' 등등 아기자기하고 애정이 철철 넘치는 호칭으로 넣어 놓고 쓴다던데 뒤늦게 핸드폰을 장만한 엄마가 저장해 놓은 자신의 닉네임이 장애물에 걸림돌이라니.

"엄마 라훌라가 뭐야!!! "

평소 자신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는 엄마라고 믿었는데 친구들하고 자랑스레 검색해본 '라훌라'라는 단어는 사랑과 애정과는 거리가 먼 이상한 말. 아이는 무척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분명 다른 엄마들처럼 근사하고 사랑스런 닉네임일 거라 믿었던 아이 입장에서 사전 뜻풀이에 대단히 실망했을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이건 엄마만의 특별한 의미가 있는 말인데 넌 아직 이해가 안 될 거야. 거기 나와 있는 대로 엄마한테 네가 장애물이나 되고 걸림돌이 된다는 그런 말뜻은 절대 아냐. 그럴 리가 있겠어? 우리 딸을 엄마가 얼마나 예뻐하는데."

'라훌라'란 말의 사전적 의미 대신 엄마가 자신을 그렇게 칭할 수밖에 없는 내면적 이유를 눈높이에 맞춰 설명한다고 했지만 아이는 만족스럽게 수긍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삶의 의미'니 '그만큼 소중한 존재'니 하는 엄마의 설명으로 미루어 엄마가 나쁜 뜻으로 지은 호칭은 아닌 것 같고 또 결코 그럴 리 없는, 자신은 엄마의 단축번호 1번이다. 하지만 아이는 끝내 '내 사랑'이니 '엔돌핀'이니 하는 친구들의 근사한 닉네임이 아닌 '라훌라'란 딱딱한 어감의 단어로 자신이 불리는 걸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의 장황한 설명에 기가 질린 아이는 포기하고 지내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고 핸드폰 기종이 몇 번 바뀌도록 내 단축번호 1번 닉네임은 꾸준히 '라훌라', 장애물, 걸림돌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는 요즘 엄마 핸드폰을 무시로 열어 자신의 닉네임을 마구 바꿔 놓는다. 핸드폰이 울려서 보면 갑자기 '예쁜 딸'이 발신자로 뜨고 나는 다시 '라훌라'로 바꿔놓고, 언젠가또 '용돈 팍팍'이라는 닉네임으로 벨이 울리면 나는 다시 그걸 바꾸고 하기를 반복해서 하고 있다.

"엄마, 엄마는 정말 나를 엄마 인생에 장애물로 생각하는 거 아냐? 왜 만날 바꿔 놓느냐고요. 나 그 라훌라란 말 정말 싫단 말이에요."
"싫어도 엄마 핸드폰에 뜨지 네 핸드폰에 뜨는 거 아니잖아. 엄마가 얼마나 심사숙고해서 만든 닉네임인데. 이건 엄마를 지탱하는 힘이야. 엄마가 옛날부터 잘 설명해줬잖아. 그러니까."
"아아, 알아요. 부처님 아들도 이름이 라훌라였는데 어쩌고저쩌고 그럴라고? 엄마는 좋은 뜻으로 쓴 거라 했잖아요. 그렇지만 나 막 꾸중할 때 보면 내가 정말 엄마한테 장애물 같은 생각이 자꾸 든단 말이야. 싫어."

아이는 이번엔 물러서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내 핸드폰을 열더니 다시 자신의 닉네임을 '용돈 주오'로 바꿔 놓고 도망갔다. 생로병사 윤회의 사슬을 끊고자 출가를 결심한 부처님도 아들의 탄생에는 '라훌라여!' 탄식했다고 한다. 자신의 출가를 가로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태어났음을 탄식하는 한 마디였다. 부왕인 아버지 정반왕의 만류도, 사랑하는 아내 아쇼다라 왕비의 애원도 뿌리칠 수 있었지만 자신의 분신인 아들의 탄생만큼은 아무리 근기가 수승한 싯사르타 태자라 할지라도 커다란 애착덩어리이고 그래서 그만큼 부담스러운 장애물이었다.

하물며 윤회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약한 중생에게 엄마라는 이름으로 부여 받은 자식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큰 인연인지. 매 생의 고비마다 자식이라는 존재는 절망과 고통이 나를 삼켜버리지 못하게 막아주는 장애물 아니, 주춧돌이었고 큰 고통에 직면하여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 나를 쓰러질 수도 없게 막아서는 걸림돌 아니, 지렛대였다. 무엇보다, 어리석은 생각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들 때면 나를 머뭇거리게 만드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그 장애와 걸림돌로 인해 불의와의 타협, 당당하지 못한 비굴함, 의지에 반하는 행위 등 부당한 신념들마저도 한 인간이 오롯이 감당해야 생의 한 이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감당하는 수치와 모멸 포기 어두운 굴곡마저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직도 나만 옳고 당당하다는 오만과 편협함에 치우쳐 기고만장하고 날선 어리석음을 여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듯 중요한 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아이의 존재는 내게 당연히 핸드폰 단축번호 1번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 장애물로서의 순기능을 살려 난 아이에게 '라훌라'라는 닉네임을 달게 되었던 것이다.

핸드폰에 휘둘리는 현대인의 삶 그래서 더 소중한 단축번호 1번

현대인에게 있어 휴대전화는 많은 경우 행불행의 표시등이다. 온갖 좋은 소식 나쁜 소식들이 대부분 핸드폰이라는 기기를 통해 개인에게 통지된다. 그래서 핸드폰이 울리면 가슴이 덜컹하기도 하면서 설레기도 하는 것이다.

발신자가 가장 가까운 육친일수록 심장 기복은 더욱 또렷해지는데 핸드폰이라는 괴물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키는 대로 수신음을 울려대는 괴물일 수도 있고 간절히 기다리던 희망의 전령일 수도 있다.

희소식일 때는 핸드폰이 대견스러워 쓰다듬어 보기도 하지만 안 좋은 소식일 때는 애먼 핸드폰부터 원망한다. 내게 핸드폰은 거의 울릴 일이 없는 소원한 기계이지만 어쩌다 한번 울림으로 해서 하루의 기분을 좌우하기도 하고 길게는 며칠 몇 달간의 행보를 결정짓기도 한다.

그때마다 단축번호 1번 '라훌라'를 들여다보면서 마음을 가다듬는다. 라훌라가 있어 좋은 일은 더 큰 기쁨이 되고 나쁜 소식은 더 큰 절망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그 제어장치로서의 장애물이 없었더라면 나는 자주 절망에 침잠하여 무기력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복불복 수신음이 지배하는 핸드폰에 안전한 제어장치 '라훌라'를 장착해 놓고 휴대전화가 내게 더 이상 절망과 불행을 부르는 수신음을 울려대는 괴물이 되는 걸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불안하고 나약한  엄마일 수밖에 없는 내게 있어 장애물, 걸림돌이라는 '라훌라'의 역기능이 얼마나 큰 위안이고 힘인지 그 마음을 표현하기에 지상의 언어로는 불가능 할 것 같다. 부모와 자식으로 만난 소중한 인연에 그저 감사할 뿐. 

"엄마만 좋아하는 닉네임이면 뭐하게요. 내 호칭인데 나 좋아하는 걸로 할 거야."
"'라훌라', 엄마한테 소중한데, 엄마한테 저엉말로 소중한데 뭐라꼬 표현할 방법이 없네. 직접 말하기도 그렇고."
"으웩! 광고하고 하나도 안 똑같아. 패러디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거든요."
"엄마 핸드폰이니까 엄마 마음대로 닉네임 쓰게 말리지 좀 말아달라고."
"그럼 엄마가 쓰는 아빠 닉네임 '내연남'도 나쁜 말 아닌 거네요?"
"그럼, 그럼. '아빠를 몰래 몰래 사랑하는 내연남처럼 여겨야지.'하면서 엄마가 심사숙고해서 만들었어. 아빠가 막 미워질 때 닉네임 보고 참을 라고. 아빠도 좋은 뜻으로 쓰는 거 아니까 자기 닉네임 갖고 암말도 안하잖아."
"근데 아빠는요, 엄마 황당한 행동 말려봤자 소용없으니까 관두는 거래요."
"?"

엄마에게 '라훌라'는 무척 긍정적이고 좋은 닉네임인데 새삼 그 사전적 해석만을 문제 삼아 불만을 품는 아이를 달랠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 하겠다. 다만 아이도 자라서 장차 자신을 지탱해줄 주춧돌로서의 장애물과 자신을 일으켜 세워줄 지렛대로서의 걸림돌이 반드시 생겨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는다. 내가 그걸 끈으로 버텨가듯이 미래도 그걸 끈으로 살아 갈 수 있게. 아이가 자라 큰 힘이 되어줄 근사한 닉네임이 단축번호 1번으로 대체되기까지 아직은 내가 그 자리 단축번호 1번 '마녀'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주고 싶다.

"전화 왔어요. 전화받으세요."

어린 여자아이의 음성이다. 수시로 바뀌는 수신음. 물론 나는 내 휴대폰에 바뀐 수신음도 닉네임도 모르고 있다가 이렇게 울릴 때야 비로소 변화를 눈치 챈다. 어제까지는 '잘살아보세' 수신음이었는데 언제 바꿨는지. 참 부지런히 엄마 핸드폰 닉네임도 바꿔놓고 수신음도 바꿔놓는다. 내 휴대폰이지만 내 관리를 떠난 지 오래다.

휴대전화 벨이 두 번 울리더니 바로 끊어진다. 알이 다 떨어져서 두 번 울리고 끊는 얄미운 닉네임 '누구게?'가 보내는 수신음이다. 시험도 끝났겠다 친구들하고 피시방에서 오후 내내 놀다 올 테니 '절대로' 전화하지 말라더니 벌서 지겨워졌나? 아니면 그래도 '마녀'엄마가 조금은 보고 싶어진 걸까?

알이 충전되려면 아직도 열흘이나 남았는데 아이는 이 대책 없는 걸었다 바로 끊기를 얼마나 더 계속해야 할런지. 엄마가 걸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1번을 곧바로 누른다. '그러게 평소에 전화 좀 작작 하라고 했잖아!' 확, 야단치려다가 참는다. 아침부터 시험 보는 아이에게 늦잠 잤다고 야단쳐 보내놓고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던 거 생각해서 또 후회할 일 만들고 싶지 않다. 역시 넌 장애물이다. 걸림돌이야.


#라훌라#핸드폰#닉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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