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저는 25일 투쟁을 기리기 위해 25일을 강조하는 내용의 판때기
글을 만들었습니다. 이 25를 보고 딸이 다르게 만들어 주어 
다시 붙혔습니다.
▲ 변경전 25일 저는 25일 투쟁을 기리기 위해 25일을 강조하는 내용의 판때기 글을 만들었습니다. 이 25를 보고 딸이 다르게 만들어 주어 다시 붙혔습니다.
ⓒ 변창기

관련사진보기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최병승씨가 지난 7월 22일 대법원에서 불법파견 판결을 받은 이후 울산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는 다시 비정규직 노조에 가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2004년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당시, 2000여 명에 육박하던 비정규직 노조원들이 있었지만 2005년 검찰의 느닷없는 무혐의 처분으로 불법파견 투쟁은 급격히 식어 버렸습니다. 그 후 6년 동안 600여 명의 조합원으로 그 명맥만 이어 오던 비정규직 노조가 다시 활기를 되찾은 것은 지난 7월 22일 대법원에서 불법파견 판결이 나면서부터입니다.

조합원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비정규직 노조는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11월 4일 비정규직 노조는 금속노조를 통해 법률자문단을 꾸리고 불법파견에 대한 법적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조합원 중 소송 가능한 노동자를 모아 1940여 명이나 되는 대규모 인원에 대한 불법파견 정규직화와 체불임금 지급 등을 골자로 하는 집단 소송을 내기에 이른 것입니다.

저는 정리해고자 신분이어서 1차 집단 소송에선 빠졌습니다. 비정규직 노조는 2차 집단 소송시에 나머지 정리해고자를 별도로 모아서 소송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7월 22일 대법판결 이후 저도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변호사 자문 결과 "불법파견이기 때문에 하청업자를 통한 사직서는 무효"라고 말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적극성을 가지고 이번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에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플래카드 들고 1위시위 하는 게 할 수 있는 '투쟁'의 전부

제가 할 수 있는 투쟁이라고는 오후 8시부터 9시까지 야간조 출근시간에 맞춰 구정문 앞이나 정문 앞에서 작은 판때기 하나 들고 서 있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10월 말부터는 그나마 나오던 고용보험마저 끊겨 버려 낮엔 날품이라도 팔아야 가족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아침에 하는 출근 투쟁은 못하고 오후에 일 마치는 대로 구정문 앞으로 달려가 1인시위 하는 게 저의 유일한 표현입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스스로 가입하고 스스로 투쟁에 결합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 지난 11월 15일 갑자기 1공장 점거 파업에 돌입한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1공장 점거 파업은 시트공장 한 하청업체에 현대자동차 원청이 계약해지 통보하면서 촉발됐습니다. 불법파견 판결 후 현대차 울산공장과 좀 거리가 떨어진 곳에 시트공장이 별도로 관리되어 왔습니다. 그 곳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조에 가입하고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에 나서면서 회사로서는 눈에 가시였는지 몰라도 가입률이 높고 출근 집회에 열심히 나오는 업체에 대한 계약을 해지해 버렸습니다.

비정규직 노조는 시트업체를 폐업하지 말라며 파업도 불사하겠다고 맞섰으나 회사는 끝내 11월 15일 오전 8시를 기해 업체를 폐업했습니다. 00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날 아침 출근 투쟁을 시도했으나 경찰 병력과 회사에서 내세운 구사대에 의해 완전 봉쇄되어 버렸습니다. 그 사이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는 노조원 1000여 명과 함께 1공장 점거농성에 들어갔습니다.

11월 15일 이후 정문 앞도 시끄러웠습니다. 현대차 사쪽은 대형 컨테이너로 정문을 막아 버렸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몽구산성'이라 불렀습니다. 야당 정치인들은 그곳 앞에 천막을 설치하고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은 정당하다며 지지 노숙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1공장 안으로 미처 들어가지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도 그곳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정문과 구정문 앞을 번갈아 가며 1인 시위를 해왔습니다. 11월 15일 이후 정문 쪽엔 제가 아니더라도 불법파견 시위하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저는 주로 구정문 앞에서 촛불을 들고 서있었습니다. 잘 버티던 1공장 점거파업 농성자는 결국 25일 만에 농성을 풀고 내려왔습니다. 추위와 굶주림, 압박 등으로 조합원도 많이 지쳐 있었고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농성을 해제하고 내려 온 듯했습니다.

다행히도 비정규직 노조는 금속과 정규직 노조의 협상안 주선으로 현대차와 노사 협상을 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이 때문에 일단 1공장 점거파업 농성을 푼 것 같습니다. 12월 9일 오후 3시 30분경 농성을 풀었다는 소식을 문자로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7일이 지났습니다. 15일 오후 8시에 다시 정문 앞에 촛불을 들고 서게 됐습니다. 모두 어디 갔는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찬바람만 휑하니 불었습니다.

딸 아이가 만들어준 25 입니다. 
그것을 붙이고 1인 촛불시위 했습니다.
위 중간에 빨갛게 보이는 부분이 자전거 용 거시기 입니다
▲ 바뀐 25 딸 아이가 만들어준 25 입니다. 그것을 붙이고 1인 촛불시위 했습니다. 위 중간에 빨갛게 보이는 부분이 자전거 용 거시기 입니다
ⓒ 변창기

관련사진보기


그 많은 천막과 노숙 투쟁하던 노동자, 정당, 사회단체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많이 펄럭이던 불법파견 정규직화 현수막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컨테이너 박스도 모두 치워지고 1공장 점거 파업 전 상태로 되돌아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외로이 서있었습니다. 촛불을 들고 서있었지만 찬바람이 불어와 자꾸만 꺼졌습니다. 그래서 자전거 뒤에 깜빡이로 사용하던 것을 켜서 빨간 불을 반짝이게 했습니다. 제 판때기 내용도 바꾸었습니다. 1공장 점거파업 25일, 정문 앞 노숙투쟁 25일. 그 25일간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을 잊지 말자는 생각에서 그 문구를 넣었습니다.

제가 사진을 찍어 중학교 2학년 딸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월요일부터 몸이 이상이 생겼습니다. 과로를 했는지 몸살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월요일은 못나갔습니다. 화요일은 구정문 앞에 섰고 힘들어서 좀 쉬고 싶다고 하니 딸이 말했습니다.

"아빠가 현대차 정규직 못 되면 우리 먹고 사는데 힘들어지잖아. 이거 가지고 가서 서봐."

미술을 잘하는 딸 아이는 25라는 숫자 모양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자신이 도안하여 새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힘들더라도 나가서 서있으라고 합니다. 정규직되면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누구에게 들었는지 몰라도 어린 딸이 벌써 저렇게 컸나 싶은 게 힘들어도 나가야 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정문 앞에 간만에 서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어떤 분은 출입증을 달고 출근하고, 어떤 분은 사원증을 달고 출근했습니다. 또 어떤 젊은 분들은 일당제 알바로 일하러 들어 갔습니다. 날씨도 춥고 몸은 힘들지만 저도 현대차 정문 앞에서 1인 촛불시위를 했습니다. 1공장 점거파업은 끝났지만 저는 아직도 정규직으로 복직되지 않았습니다. 딸과의 약속을 꼭 지키려고 합니다.

"아빠는 사랑하는 우리 딸과 아들을 위해서 정규직으로 출근할 때까지 촛불 투쟁을 멈추지 않을 거야."


태그:# 비정규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간해방 사회는 불가능한가? 노동해방 사회는 불가능한가? 청소노동자도 노동귀족으로 사는 사회는 불가능한가?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