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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황은 어떠신지요?

"산본의 한 아파트에서 집사람과 함께 산책하고, 간혹 병원도 가면서 소일하고 있어요. 산본은 산이 가까워 참 공기가 맑습니다."

 

- 요즘도 책을 읽고 글을 쓰시는지요?

"책은 모두 연구소에 기증을 했어요. 단 몇 권의 책을 옆에 두고 간간히 펼치고 있어요. 글 쓰는 일은 일체 중단했습니다. 모든 것을 비우니 몸도 맑고 홀가분해져요."

 

- 선생님이야말로 하늘 아래 부끄러울 것이 없는 선택으로 일관해 오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끄럼투성이에요. 헤이리에 살고 있나요?"

 

- 그렇습니다.

"이곳도 공기가 참 맑아요."

 

- 더불어 이웃도 좋습니다.

"맞아요. 이웃이 중요하지요. 나도 이곳에 터를 잡았었지요. 하지만 일전 뇌출혈이 오고 나서 그것을 빼서 병원에 다녔지요. 병마로 내일을 알 수 없으니 어떻게 집을 지을 수 있겠어요?"

 

- 선생님을 이웃으로 모시지 못한 것이 큰 회한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2006년 12월 파주 헤이리에서 리영희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미군정기와 6·25한국전쟁, 4·19혁명과 5·16쿠데타, 광주민주화운동 등 파란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정의가 아닌 것과는 타협이 있을 수 없는 올곧은 정신과 실천으로 일관했던 시대의 사표.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지셨지만, 병마와 투쟁하는 중에도 2년이 넘는 시간의 구술과 녹취로 한 지식인의 곧은 행로가 한 권의 책으로 고스란히 담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2005년 3월에 한길사에서 간행된 <대화>입니다. 임헌영 선생과의 대담으로 가능했지요.

 

"이 긴 시간에 걸친 나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은 '자유(自由)'와 '책임(責任)'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棄權)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背信)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이런 신조로서의 삶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 바로 그것이 '형벌'(刑罰)이었다.

- <대화>중에서

 

'야만의 시대'를 살며 '사회적 책임'을 비켜가지 않고 '시대적 소임'을 다한 용기 있는 지성인의 죽비가 나약하고 머리만 비대한 지식인의 '비겁'을 내리치고 있습니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眞實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生命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理性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 <우상과 이성> 중에서

 

선생님의 이 말씀은 글을 쓰는 저에 대한 '준엄한 명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날 선생님께서 지팡이를 놓고 어눌한 손놀림으로 써주신 한 문장이 현재 저의 삶을 지배하는 지침이 되었습니다.

 

"욕심(慾心)과 집착(執着)을 줄이면 세상(世上)이 밝고 인생(人生)이 즐거워진다."

- 리영희

 

그 글을 쓰는 동안 선생님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손놀림이 슬펐습니다.

 

12월 5일, 리영희 선생님이 타계하셨습니다. 그분이 안 계신 이 시간이 애통하고 서럽습니다. 비통한 마음으로 선생님의 영전에 꽃 한 송이 바칩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에도 포스팅됩니다.


태그:#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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