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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다섯해 전의 일이었나 봅니다. 80년 광주 민중의 피가 땅에 채 스며들지 못하고, 학살자들은 죄의 가위눌림에 미쳐 날뛰던 그 때 대학 신입생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에 온 마을 어른들이 상복을 입고 통곡을 할 때 어린 소년은 전쟁이라도 곧 일어날 것 같이 무서웠습니다.

때마침 파란 군복을 입고 나타난 비상계엄사령관 전두환은 구국의 영웅이었고,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나라의 큰복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이라는 곳은 참 이상했습니다. 대통령을 살인마라 하고, 간첩과 간첩에 동조하다 죽어간 광주 사람들을 죽음을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눈뜨게 해준 리영희 선생님

리영희 선생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선생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
ⓒ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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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같은 허상과 반딧불 같은 진실이 뒤엉켜 소화불량 증상이 나타날 때 쯤, 어떤 선배는 학교 앞 막걸리 집에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 저)라는 책을 가방에 넣어 주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세상 모든 것들이 나를 속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은 허상이었고, 내가 금지된 창문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익숙하지는 않지만 외면할 수 없는 아픔과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 선배는 또다른 책을 가방에 넣어주었습니다. '민중과 지식인'(한완상 저). '이성과 우상' '전환 시대의 논리'(리영희 저) 등... 더 많은 몇 권의 책을 더 읽고 났을 때 세상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세상이 달라진 게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 때 나에게 세상 보는 법을 알려 준 사람. '전환 시대의 논리' '이성과 우상'이라는 금서의 저자 리영희 선생님. 선생님이 영어의 몸이 되어 있을 때 나는 그 책을 읽어가면서 고민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이성과 우상'이라는 책의 서문에 쓰셨듯이 빛도 공기도 안 들어오는 방에 갇혀 죽는 줄도 모르고 죽어가는 사람에게(저에게), 빛과 공기가 들어오는 창은 모르고 지나쳤으면 좋았을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선생님과의 이런 첫 인연이 스물 다섯해를 지납니다. 저 뿐만이 아니겠지요. 선생님 내어준 창을 통해 세상에 눈 뜬 많은 사람들. 그 인연들은 여름 하늘에 뿌려진 은하수만큼 많겠지요.

망극한 부음을 받습니다. 가까이 몇 해 동안,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비극, 그래서 감당하기도 쉽지 않은 연이은 비통한 소식에 가슴 상채기도 채 아물지도 않았는데 오늘 또다시 준비 안 된 비보를 접합니다.

선생님! 리영희 선생님!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아직 새는 좌우 날개로 날지 못합니다. 대한민국의 파랑새는 좌우 날개로 날지 못합니다. 한 쪽 날개가 없어도 날 수 있다고 합니다. 한 쪽 날개의 짐이 될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성은 힘을 잃고 우상은 높고 견고하게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죽비 같은 외침은 더욱 기다려지고 우리에게 다시 한번 큰 가르침 주셨으면 했는데, 어이 이리도 금방 떠나십니까? 가시는 길 애석하고 허망합니다.

리영희 선생의 생전 모습.
 리영희 선생의 생전 모습.
ⓒ 인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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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는 길 애석하고 허망합니다

선생님. 이 나라가 살길에 대해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남과 북 칠천만 겨레가 원수로 지내지 않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물어 보고 싶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연평도 사건은 어느 쪽에서도 얻을 것 없는 비극이었습니다. 남쪽 연평도에서만 네 사람이 죽고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집터와 일터를 잃고 피난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난리가 여기에서 그칠 것 같지 않습니다. 한 쪽에서는 철저한 응징을 이야기하고 또 다른 쪽에서도 서슬퍼런 말이 반복됩니다. 선생님이 7년을 복무했던 60년 전 6.25 전쟁. 그 공포가 다시금 한반도를 뒤덮고 있습니다. 말(언어)로 하는 전쟁이 벌써 휴전선을 넘었습니다. 마주보고 달려가는 기관차. 그 기관차를 세울 혜안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사회에 견고하기 짝이 없는 우상들을 봅니다. 제가 선생님의 책을 몰래 보던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반공반북은 이 사회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우상입니다. 희미해졌다가 더 크게 다가오는 그림자처럼 반공반북의 우상은 남북관계가 삐꺽거리는 소리를 듣고 잘도 자랍니다.

통일의 논리도, 평화의 신념도 사상의 자유도 반공의 우상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남북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대치점에 있을 때 반공반북의 우상은 이 사회의 지배원리가 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우상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우상입니다. 자본은 노름판에 싹쓸이처럼 모든 것을 빨아먹습니다. 돈 가진 사람들은 돈으로 돈을 벌고, 돈 없는 사람들은 권력에서 소외되고 생존에서 소외받고 가난을 숙명처럼 대물림 합니다.

같이 살자는 절규도, 상생하자는 이념도 신자유주의 우상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신자유주의 우상은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보검을 가지고 날마다 거대해지고 견고해지고 있습니다. 권력도 이들이 대적하지 못합니다. 아니 대적할 마음이 없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우상은 양극화를 끊임없이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우상 아래서 서민의 삶은 미래가 없습니다.

학벌의 우상. 권력의 우상. 일부 그릇된 종교주의자들은 스스로 우상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우상들 앞에 이성의 설자리를 초라합니다. 위험하기도 합니다. 선생님. 사회의 가치척도가 이성으로 제어되지 못하는 세상은 불행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 사회는 이성으로 사회를 제어하려는 노력보다 우상들을 만들고 거기에 기대에 살아가려 할까요? 이러한 세상은 희망이 무엇일까 선생님에게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지난 5월 4일 서울 백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던 리영희 선생이 지인들과 대화 도중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지난 5월 4일 서울 백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던 리영희 선생이 지인들과 대화 도중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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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나침반 같았던 선생님 영면하소서!

그러나 선생님은 이제 대답하실 수 없습니다. 많은 물음들에 대답은 아쉽고 절박하더라도 산자들이 구해야 합니다. 선생님의 말씀 하나 하나 되새겨 본다면 새로운 지혜가 숨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선생님과 인연을 가졌던 그 수많은 사람들. 선생님 사상의 씨앗에서 발아한 수많은 소나무, 어깨를 걸고 바람을 막아내는 큰 숲이 되었으면 합니다. 선생님이 뿌린 씨앗은 제대로 싹트는 세상, 어렵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몫입니다.

역리를 순리로 바꾸면서 살아오신 선생님. 아직은 조국의 파랑새가 좌우의 날개짓으로 날지 못합니다. 갈등은 가파르고 해결의 실마리는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이 사회를 지배한 우상은 또아리를 틀고 앉자 어떤 이성적 잣대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예전에도, 지금에도 민초들의 힘으로 앞으로만 굴러 왔습니다. 일시적인 난관이 역사를 멈춰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 난관을 극복하는데 선생님의 지혜가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오랜 병고에 지친 몸. 선생님 이제 편히 누우십시오. 황망한 부음에 선생님의 책을 다시 펼쳐 봅니다. 선생님이 말씀 찬찬히 다시 새겨보겠습니다. 저에게 민족과 사상과 이성의 힘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 조국의 나침반과도 같던 선생님. 진정으로 고맙습니다.

영전에 절을 올립니다. 영면하소서.


태그:#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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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보는 냉철한 시민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찌라시 보다 못한 언론이 훗날 역사가 되지 않으려면 모두가 스스로의 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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