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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온난화에 대해서 좌파와 우파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원자력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노동이 얼마나 생활의 중심 가치로 남아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권력의 지방이양에 대해서 좌파와 우파가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까요? 앤서니 기든스는 현대 사회가 야기한 이런 질문들 앞에서 기존의 좌파와 우파가 무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좌파도 우파도 아닌 제3의 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10년 동안, 두 정부는 왜 한국의 좌파와 우파 양쪽에게서 공격을 받으며 절충된 길을 걸어갔을까. '신자유주의 좌파'였던 두 정부의 정책들은 영국의 사회학자인 앤서니 기든스로부터 비롯되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 11월 24일 열린 '사회학 고전읽기 시즌 2' 네 번째 강의에서 앤서니 기든스의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를 교재로 후기 현대사회에서 진보가 선택해야 할 발전방향에 대해 설명했다. 김 교수는 "정보사회가 되면서 케인즈주의에 입각했던 고전복지국가 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렵다"며 "일자리 창출 중심의 생산적 복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좌파와 우파를 넘어 '제3의 길'로

 김호기 연세대 교수가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강의하고 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가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강의하고 있다. ⓒ 권우성
앤서니 기든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는 사회이론가였던 그를 정치이론가로 만들어 준 작품이다. 구조화 이론과 근대 사회 변동이론을 재구성하는 사회학자로 알려져 있던 기든스는 이 책과 1998년 출간된 <제3의 길>을 통해 1990년대 영국 노동당의 '선생님'으로 등극했으며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은 정책화된 기든스의 연구를 무기로 집권에 성공했다.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에서 기든스는 후기 현대사회가 도래하면서 부상한 '삶의 정치'에 착안한다. 인간의 자율성이 극대화되면서 이전까지 있었던 노동운동이나 노동운동과 관련된 '해방의 정치' 이외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정치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환경·인권·평화운동 같은 것들이 '삶의 정치'의 대표적인 예다.

기든스는 후기 현대사회에서의 정치적 대안은 '삶의 정치'와 '해방의 정치'를 모두 아우를 때에만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김호기 교수는 "기든스가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에서 후기 현대사회 아래서 제시된 세 가지 정치적 대안인 보수주의, 사회주의, 신자유주의에 대해 모두 회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기든스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후기 현대사회란 이중적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더 많은 기회를 주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더 많은 위험이 공존하고 있지요. 보수주의는 근본주의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고, 신자유주의는 시장 및 개인주의의 원리를 옹호하는 동시에 국가·종교·성·가족의 영역에서 전통을 보존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모순적인 혼합물입니다. 기존의 사회주의 정치는 세계화와 사회적 성찰성의 정도가 높은, 고도로 복합적인 체계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이 기든스의 결론입니다."

김 교수는 "기든스는 이 세 가지의 정치적 대안을 모두 비판하면서 대안으로 '급진정치(radical politics)'를 제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급진 정치란 '진보적인' 사회민주주의를 뜻하며 기존의 정치적 대안을 '근본적으로' 사유하자는 의미도 담고 있다.

기든스가 말한 '진보적인' 사회민주주의는 어떤 것일까. 김 교수는 "이 책에서 기든스는 급진정치의 구성을 위한 의제로 손상된 사회적 연대의 회복, 삶의 정치의 확산, 적극적 복지의 시각에서의 복지국가 모델 추진 등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라는 책 제목은 이런 급진정치를 위한 의제 아래서 기존의 좌파와 우파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기든스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후기 현대사회, 일자리 주는 생산적 복지가 유효

김 교수는 강의에서 기든스의 여러 의제 중 적극적 복지를 강조했다. 그는 "기든스는 오늘날과 같이 세계화가 진전된 정보사회에서 평등의 가치가 실질적으로 유지되기 어렵다고 보았다"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기든스가 급선무라고 느꼈던 것이 사회의 공동체 유지였고, 적극적 복지는 그 방법 이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앙드레 고르의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세계 노동인구의 3분의 1은 과잉 노동인구입니다.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죠. 따라서 케인즈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완전고용은 이제 불가능합니다. 고전복지국가 모델이 작동할 수 없지요. 그래서 기든스는 복지의 기본 구조를 돈을 주는 것에서 일자리를 주는 것으로 바꾸는 적극적 복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현금 급여보다는 교육 프로그램 개설하고 직업훈련 강화하고 평생 학습체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자는 것이지요. 이 프로그램을 가지고 영국 노동당이 집권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든스의 이론들은 한국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김 교수는 "경제적 영역에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으로 나타났던 문제들을 사회정책을 통해 치유하려고 했던 것이 김대중 정부의 기본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 노선에 가까우면서 사회정책은 적극적 복지를 변형한 생산적 복지를 제시한 것이 기든스가 제시했던 '제3의 길'과 맞아 떨어진다는 얘기다.

김대중 정부는 국민기초생활 보호법과 같은 현금 급여를 통한 복지제도의 기초를 만들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일자리 창출 중심의 생산적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경향은 참여정부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김 교수는 "노무현 정부집권 후반기 '비전2030'에서 나타났던 사회투자국가는 생산적 복지의 연장선상에 서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의 이론을 정책에 적극 활용한 나라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을까. 앤서니 기든스는 김대중 정부 시기 한국을 방문해 강연에서 한국이 선진국이 되기 위한 조건을 조언하기도 했다.

"기든스는 삶의 정치를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한국 와서 한 강연에서 그는 한국은 선진국이 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한국의 가부장주의 때문이에요. 한국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자원은 인적 자원인데 그 절반인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한국사회가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든스는 한국이 선진국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남녀간의 격차와 차별을 없애는 것이라고 충고했습니다."

김 교수는 "기든스의 사회이론과 정치이론은 한 편으로는 노무현 정부로, 한편으로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진보가 성장과 분배, 국가와 시장, 세계화와 정보사회 등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며 강의를 마쳤다.


#김호기#사회학 고전읽기#앤서니 기든스#좌파와우파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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