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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박용만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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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현대의 지성을 소유한 실천적 지성'. 김산(金山)에 대한 님 웨일즈(Nym Wales)의 찬사였다. 1936년 그녀는 중국의 옌안에서 김산을 인터뷰했다. 그의 생애를 소설로 써 1941년 뉴욕에서 <아리랑(Song of Ariran)>을 출간했다.

박용만과 김산의 공통점은 둘 다 '변절'이라는 저주 속에서 목숨을 빼앗겼다는 사실이다. 1928년 박용만은 북경에서 이해명에 의해 '변절자'로 암살됐다. 그 10년 후 김산 역시 중국공산당에 의해 '변절자'로 처형당했다. 1930년 북경에서 체포돼 조선으로 압송됐는데 이듬해 무죄로 석방돼 북경으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일본경찰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도 살아 나왔다면 '변절'의 혐의를 벗을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한국정부에 의해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님 웨일즈 저 '아리랑' 표지
 님 웨일즈 저 '아리랑' 표지
ⓒ 존 데이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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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명에 대한 결심공판이 1929년 2월 28일 북경 고등법원에서 열렸다. 증인으로 나온 김산은 박용만을 '변절자'로 증언했다.

판사 질문 : 당신은 독립당의 북경 주재 대표인가?
김산 대답 : 그렇소.

김산은 1924년 고려공산당의 북경지부를 조직했다. 님 웨일즈도 중국공산당원이었지만 김산 역시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6년 한국공산주의자 비밀결사대와 민족독립당을 결성했다.

판사 질문 : 박(朴)에 반당행위가 있었는가?
김산 대답 : (전략) 1925년 박은 아직까지도 진대화(陳大和-한인 밀정 金達河를 말함)와
                왕래하면서 제국주의를 위해 봉사하고 있었오.(하략)
판사 질문 : 당신은 박이 당을 배반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미국에 있는 독립당이 육칠백                   원씩 보내고 있나?
김산 대답 : 이것은 완전히 사기로 얻은 돈이오. (하략)

김산이 투철한 공산주의자인데 반해 박용만은 당시 반공의 선봉장이었다. 러시아의 공산세력을 막기 위해 항일을 다시 생각할 정도였으며 그가 하와이에서 조직한 대조선독립단의 강령 중의 하나는 반공이었다. 김산의 증언이 우호적일 수 있기를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사실과 다른 증언을 한 것을 보면 박용만에 대해 제대로 알고나 있었을까.

1930년 천진 주재 일본영사관에 구금된 김산(1905-1938)
 1930년 천진 주재 일본영사관에 구금된 김산(1905-1938)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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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은 어린 나이로 동경에서 공부하다가 공부를 때려치우고 머나먼 만주까지 찾아가 신흥학교를 졸업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합니하에 있는 조선독립군 군관학교. 이 학교는 신흥학교라 불렀다. 내가 군관학교에 들어가려고 하자 겨우 15살 밖에 안 된 꼬마였던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입학자격 최저 연령은 18살이었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서 엉엉 울었다. (주-'소년병학교'의 제1회 입학생 중 최연소자는 유일한으로 당시 만 13세였다.) 내 긴 순례여행의 모든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자 마침내 학교 측은 나를 예외로 대우하여 시험을 칠 수 있게 했다.

지리, 수학, 국어에서는 합격했지만 국사와 엄격한 신체검사에는 떨어졌다. 다행히 3개월 코스에 입학하도록 허락받았고 수업료도 면제받았다. 학교는 산 속에 있었으며 18개의 교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눈에 잘 띄지 않게 산허리를 따라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18살에서 30살까지의 학생들이 100 명 가까이 입학했다. 학생들 말로는 이제까지 이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 중에 내가 제일 어리다고 했다."

김산의 기록이다. 신흥무관학교의 뿌리는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수 평의 초가집도 나의 집이 아니며, 수 무의 산소도 나의 땅이 아니며, 문전의 뽕나무와 석류도 나의 초목이 아니며, 동구 밖의 시냇물도 나의 물이 아니다. …우리가 백성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 대한을 사랑하며 우리가 백성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 대한을 보호하겠는가"라는 선언과 함께 1906년 이회영, 안창호, 이동녕, 전덕기, 양기탁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항일비밀결사. 백성을 새롭게 하기 위한 노력으로 평양에 대성학교, 정주에 오산학교 그리고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밭을 경작하고 있는 모습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밭을 경작하고 있는 모습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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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자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은 무력항쟁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6천 석에 달하는 농토를 처분한 뒤 60여 명의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간다.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에 정착하여 토지를 매입한 후 신흥강습소를 개설했는데 강습소라고 한 것은 중국 관헌과 현지 주민의 주목과 탄압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는 독립군 양성이 목적이었으며 이회영 집안이 망명 시 가져온 돈으로 경비를 충당하면서 학비는 물론 숙식비도 받지 않았다. 1913년 신흥학교라고 개칭했다가 1919년 신흥무관학교라고 개명했다.

이시영(1868-1953)
 이시영(1868-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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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는 새벽 4시에 시작해 취침은 저녁 9시에 했다. 생도들은 군대전술을 공부했고 총기를 가지고 훈련도 받았다. 그렇지만 가장 엄격하게 요구했던 것은 산을 제빨리 올라 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른 바 게릴라 전술 훈련이었다. 생도들은 강철같은 근육을 가지고 있었고 등산에는 오래 전부터 단련돼 있었다. 그들은 등에 돌을 지고 걷는 훈련을 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지지 않았을 때는 아주 경쾌하게 달릴 수 있었다.

신흥학교에서는 속성과정으로 3개월 훈련의 하사관 과정과 6개월 훈련의 장교 과정이 있었다. 1919년 유하현 고산자로 기지를 옮긴 후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하고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두어 고급간부를 양성코자 했다. 이 때 학장은 이시영, 교관들 중에는 지청천, 이범석 등이 유명하다.

1919년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많은 애국청년들이 신흥무관학교로 몰려들어 학생수가 600여명에 이르렀다. 신흥무관학교에서는 보병, 포병, 기병 등의 병과와 전술 및 전략학 등의 학과에 중점을 두었다. 학교의 재정은 항상 궁핍을 면치 못했다. 1914년 거듭되는 재해로 동족들의 성금지원이 끊겼다. 생도들은 만주인의 밭을 빌려 옥수수와 콩을 경작했다.

하기방학에는 교직원, 졸업생, 재학생 모두가 각 지방으로 분산돼 날품팔이를 하여 번 돈을 학교 유지비에 충당했다. 생도들의 주식은 좁쌀밥이었고 부식은 콩기름에 절인 콩장 한 가지 밖에 없었다.

지청천(1888-1957)
 지청천(1888-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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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만주 출병과 토벌작전, 중국관헌의 압력, 마적단의 기습 그리고 재정 궁핍 등 때문에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폐교된 그날 지청천은 사관생도 3백여 명을 이끌고 백두산의 밀림지역으로 들어가 홍범도의 부대와 연합했고 김좌진 부대의 뒤를 따라 밀산(密山)에 도착해 대한독립단 결성에 참가했다.

그때까지 신흥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자그마치 3천5백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중국 전역, 러시아, 본국 등을 무대로 항일무장투쟁을 펼쳤다. 1920년의 청산리 전투 등 여러 전투의 주역이었으며 임시정부 광복군과 의열단도 이들이 주역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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