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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박용만이 <국민개병설(國民皆兵設)>을 저술할 때는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할 때였다.

 

제국주의는 무력주의의 동의어이기도 하다. 약육강식이 너무 살벌하다 보니 브레이크를 걸어야겠다고 나온 게 1차 세계대전 직후에 발표된 민족자결주의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은 5대양 6대주를 영국 깃발로 덮었다. 유럽 몇 나라에 이어 미국과 일본도 서둘러 제국주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이들 열강들에 의해 에티오피아와 태국 등 몇 나라를 빼놓고는 세계 모든 나라들이 정복되고 그들의 식민지가 됐다.

 

그 시대 정황을 박용만은 <국민개병설>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국민이 다 군사 되는 교육은 옛적 희랍의 스파르타에서 행했으나 지금은 세계열강이 다 스파르타 국이라. 대저 우리가 이 경쟁하는 세계에 서서 우리가 남을 침노치 않으면 남이 장차 우리를 침노할지라.

 

대개 형제간에 서로 다투면 그 부모가 능히 심판해 주고 백성이 서로 다투면 그 국법이 능히 심판해 주되 만일 나라와 나라가 서로 다투면 세계 중에 원래 누가 가장 높은 권리를 잡아 이것을 재판해 줄 사람이 없은 즉 이때를 당해서는 오직 강한 권세뿐이라."  

 

1912년 8월 샌프란시스코 소재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앞으로 블라디보스토크 북쪽에 위치한 우수리스크로부터 편지가 왔다. 곧 무관학교를 설립하려고 하는데 '소년병학교'의 교과서들과 '국민개병설', '독립정신' 그리고 '국민독본'을 부송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대학 재학 중 박용만은 군사훈련에 필수적인 교재의 시급한 필요성에 주목했다. 방학 기간이나 잠을 줄여가며 <국민개병설>, <군인수지(軍人須知)>, <아메리카혁명(亞美里加革命)>을 저술했다. 군사교범이 전무하던 시기 그의 역작들은 해외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유용한 길잡이가 됐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국민개병설>은 1911년 신한민보사를 통해 출간됐다. <군인수지(軍人須知)>는 미국 군사훈련 교재를 참고해서 역술한 것인데 이 역시 다음해 신한민보사에서 인쇄했다.

 

<군인수지>는 군인들의 병영생활 요령과 군인들에게 필수적인 지식을 엮은 수첩 크기의 작은 책이다.

 

신한민보사는 신문을 발간하면서 한편 조국에서 수입한 여러 서적들을  주문판매하고 있었다. <국민개병설>도 광고에 냈는데 판매가는 13센트.

 

<국민개병설>은 근대의 전쟁은 국가 간의 총력전이어서 국민 모두가 병역의 의무를 가지며 병사의 자질을 갖추려면 어떤 교육이 필요한지를 설명한 책이다.

 

표지에 '청년인 박용만(靑年人 朴容萬)'이라고 표기한 걸 보면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勇士)의 결기(決氣)마저 느껴진다.

 

"군사를 양(養)할 일은 국민의 빚진 것이요 나라를 방비하는 것은 국민의 의무니 오늘날 전쟁은 국민 전체의 전쟁이요 한 조정이나 한 임금의 전쟁이 아니다.

 

그런고로 그 이김엔 국민이 그 복리를 누리고 그 패함엔 국민이 그 화를 받고 결단코 국민 이외에 다른 물건이 있어 그 사생과 화복을 대신하여 맞지 않는 바라.

 

그런즉 오늘 천하에 국민이 되어 그 이(利)와 화(禍)를 자기가 친히 받으며 가로되 이 일이 나의 책임이 아니라 하면 가하뇨?"

 

이것은 '국민개병설'을 열면 맨 처음 나오는 대목이다. 이어지는 그의 논문에서 중점사항들을 대충 소개한다.

 

"이제 군인교육을 대강 말하건 데 나폴레옹이 말하기를 형용 있고 형용 없는 두 가지 긴요한 것이 있다 하니 형용 있는 것은 각종 병기를 가리킴이며 형용 없는 것은 군인의 정신이라. ... 그 첫째는 애국심이요, 둘째는 공덕심, 셋째는 명예심, 넷째는 자격과 참는 힘을 말함이라. ... 이런 정신적 교육은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배양되어야 하노라.(중략) "

 

 

소년병학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학교 자체가 해외에 설립된 최초의 사관후보생을 훈련시키는 군사학교였다.

 

그리고 야구반은 해외에서가 아니라면 적어도 미주에서 최초로 조직된 팀이었다. 야구는 미국의 국기(國技)나 다름없다. 그 본바닥에서 소년병학교 팀의 실력은 뒤지지 않았다. 1911년 헤이스팅스 고등학교 팀과 향토방위대 팀과 시합해서 승리했다. 1912년에는 현지 팀들과 15 번의 경기를 했는데 12승 1패 2 무승부라는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지지 않겠다는 군인정신의 단호한 투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육상이나 야구는 또한 군인정신에 필수적인 단결심을 기르는 데 그만이었다.

 

"형용 없는 정신은 반드시 형용 있는 물건으로 말미암아 감동되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감이 깊은 고로 신문, 광대놀음, 미술품, 영화, 문학작품(소설과 운문), 음악 등이 그러하니라. (중략) "

 

연극 역시 해외에서 처음 공연한 단체가 소년병학교였다. 학기가 끝날 때쯤 해서 공연이 이뤄졌는데 1912년 '안중근 의사전'을 무대에 올렸다. 1백여 백인 손님들과 50여 동포들이 관람했다. 1913년에는 역시 정태은이라는 학생이 쓴 각본의 창작극을 공연했다. 연극은 희미해진 애국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데는 그만이었다.

 

"우선 아메리카와 하와이 동포에게 특별히 고하며 또한 다른 나라에 있는 동포들에게 부탁하노니 첫째 시방 북아메리카와 하와이는 우리 동포가 각처에 거류지를 정하여 한곳에 각각 수십 명으로 백여 명의 사람이 있은 즉 만일 여기서 각각 군대의 형식을 조직하고 무예 숭상하는 풍기를 열어 일하거나 공부한 나머지 시간에 조련도 하고 사역도 시험하여 소대 조련 중대 조련까지만 가면 대개 군대의 활동하는 법을 알지라.

 

둘째 개인의 군사교육이니 만일 단체로 군사교육을 베풀지 못할 경우에는 가히 개인이 공부할지라. 매일 한 두 시간의 결을 빌어 손에 병서를 들고 벽상에 칼을 걸고 외로운 등불 앞에 조용히 앉으면 그 흥취가 응당 호기스럽고 쾌할 뿐더러 만일 병학의 재미를 차차 들어가면 자연 감개가 마음 창자를 흔들어 나의 한 몸으로 하여금 구차히 살기를 생각지 않을 것이요 또는 청천백일 하에 어찌 나의 원수와 함께 살리오 하는 마음이 동할지라.(하략)"

 

이상이 <국민개병설>의 요점 몇을 간략히 소개한 것이다.

 

1918년 11월 박용만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멀리 시베리아의 하바로브스크에 있는 보문사(普文社)에서 온 거였다. '아미리가혁명'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시베리아 동포들은 가난하므로 가격을 에누리해서 보내줄 수는 없느냐는 거였다. 

 

<'아메리카 혁명(亞美里加 革命)>은 박용만이 네브래스카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다음 1912년 졸업논문으로 제출한 것이다. 이 논문은 많은 참고문헌을 공부한 결과물로서 1915년 6월 호놀룰루의 '국민보'사에서 292쪽의 책으로 출간했다.

 

서문에 "이제 이 글을 만들어 세상에 전함은 곧 우리 동포로 하여금 소위 자유를 알고 소위 독립을 알아 혁명의 뜻과 혁명의 일이 어떠한 것을 깨닫게 하고자 함이라"고 썼다.

 

<아메리카 혁명>은 처음 신한민보 사를 통해 출간하려 했으나 출판비 부족으로 포기했다. 박용만이 하와이로 건너 와 활동할 때인 1914년 1월 국민보사가 모험적으로 출판을 시작했다.

 

그러나 기계는 낡고 활자도 부족해서 겨우 상권 하나를 찍어내는데도 1년 반이나 걸렸다.*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태그:#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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