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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미기에서 나오는 햅쌀, 형제가 많아서인지 주인집 정미기는 항상 바쁘게 돌아갑니다.
정미기에서 나오는 햅쌀, 형제가 많아서인지 주인집 정미기는 항상 바쁘게 돌아갑니다. ⓒ 조종안

며칠 전 아침이었다. 쌀독으로 사용하는 옹기그릇 바닥이 보이기에 집주인에게 나락 한 가마만 방아 찧어달라고 부탁하고 밖에 나갔다 왔더니 현관에 쌀이 놓여 있었다. 쌀장수도 아니면서 하루도 미루지 않고 가져오다니, 주인의 정성이 고마웠다.

"며칠 있다가 찧어도 되는디, 쌀을 현관에 놓고 가셨네요. 얼마 드려야 된데요?"
"햅쌀이고 올해도 유기농법으로 지었으니까, 맛은 좋을 겁니다. 돈은 그냥 두세요."

"그냥이라니요. 나락이 한 가마(40kg)나 되는디···."
"나락은 한 가마지만, 쌀은 20kg 조금 넘습니다. 저번에 보일러 때문에 미안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냥 드세요."

돈을 치르려고 가니까 집주인 부부가 함께 있었는데 하나 같이 그냥 두라고 했다. 보일러 때문에 오히려 자기네가 미안하다며 돈을 받지 않겠단다. 그러면 되느냐며 지갑을 꺼내도 끝까지 사양하는 바람에, 고마운 마음을 뒤로하고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쌀이 떨어질 때마다 정미기에 방아를 찧어 먹는 집주인에게 작년 이맘때도 햅쌀 두 가마를 부탁해서 암과 투병 중인 막내 누님과 한 가마씩 나눠 먹었다. 집주인은 올해도 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해서 부탁했는데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보일러 설치비용 20만 원 부담하다

집주인이 미안해 하는 보일러 얘기는, 가을에 삼한사온 날씨가 이어지던 20여 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겨울을 앞두고 보일러를 점검하려고 서비스센터에 전화했더니 기술자가 와서 만져보고는 수명이 다 됐다면서 갈아야 한다고 했다.

작년에도 기계에 이상이 생겨 수리비 5만 원을 주고 고쳐서 사용해온 터라 올해도 몇만 원은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일러 전체를 갈아야 한다니 막막했다. 가격은 알아야겠기에 얼마냐고 물었더니 50만 원이라고 했다. "핫따 비싸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보일러 교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고민이 돼 머리가 아팠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8월 18일이 2년 전세계약 만료일인데도, 집주인이 전세금 올려달라는 말 한 마디 없이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콩을 타작하는 집주인, “집세는 걱정하지 마시라”는 말을 처음 듣게 해준 분이기도 합니다.
콩을 타작하는 집주인, “집세는 걱정하지 마시라”는 말을 처음 듣게 해준 분이기도 합니다. ⓒ 조종안

2000만 원 전세 사는 처지에 느닷없는 보일러 대금 50만 원은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인지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 집주인에게 알리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았다. 해서 마당에서 콩을 타작하는 집주인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예상대로 어이없어 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보일러 기술자가 "보일러 모델을 보니까 10년은 넘은 것 같은디유, 참 오래 쓰셨네유"라며 바람을 잡았다. 한참을 생각하던 집주인은 "어떻게 하겠어요, 못 쓰겠다면 새로 갈아야지···"하고는 기술자들과 상의에 들어갔다.

시내에서 작은 사무실을 운영하는 50대 중반의 집주인은 이사하는 날부터 농사짓고 싶으면 밭을 내주겠다고 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올해도 앞마당 텃밭은 내 밭처럼 상추, 고추, 파 등 나무새(나물의 전라도 사투리)를 뜯어다 먹었으며, 손맛이 좋은 아주머니는 파김치와 싱싱한 겉절이를 맛이나 보시라며 보내주곤 한다.

외등 하나만 갈아야겠다고 해도 사주겠다고 할 정도로 세입자 처지를 배려해주는데 모르는 체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해서 1년이 넘도록 사용하지 않고 꼬불쳐 두었던 비상금 10만 원과 생활비에서 10만 원을 떼어 "아무래도 보일러를 놓기는 무리이고, 20만 원은 내가 부담할게요"라며 집주인에게 건네주었다.

햅쌀 20kg에 20만 원도 비싸다는 생각 들지 않아

1971년부터 가족과 따로 살기 시작했다. 82년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고 이사를 예닐곱 차례 다녔는데, 천정에서 물이 샌다고 해도 못 살겠으면 나가라는 주인이 있는가 하면, 1년이 멀다 하고 세를 올려 달라 하는 등 건물주들의 인심과 물욕도 가지가지였다.

이사한 지 27개월이 넘어간다. 비록 시골집 2층이지만, 몸도 마음도 지금이 가장 편한 것 같다. 아내도 필자와 같은 말을 자주 한다. 아마 "집세는 걱정하지 마시고 살고 싶을 때까지 사세요"라고 하는 주인의 넉넉한 인심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햅쌀 20kg이 담긴 포대는 지금도 현관 입구에 놓여 있다. 2개월 남짓 양식밖에 되지 않지만, 보기만 해도 부자가 된 것처럼 마음이 흐뭇하다. 공짜로 생긴 쌀이어서 더욱 흡족한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작은 것을 주고 큰 행복을 얻기도 하고, 큰 것을 주고도 불행의 늪으로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햅쌀 20kg을 20만 원 주고 사 먹었다고 생각해도 후회되거나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는 왜일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전세#보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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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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