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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난 딸이 어느 날 선언했다.

"엄마, 공룡은 공룡사냥꾼이 다 잡아갔어!"
"그래? 공룡사냥꾼이 그랬대? 엄마는 몰랐는데?"
"근데 공룡을 잡아먹으려고 잡아갔을까?"
"글쎄…. 공룡을 잡아먹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상상력이 풍부하게 들어간 만화를 보고 아이는 공룡의 멸종 이유에 대해 나름의 결론을 내린 듯하다.

요즘 우리 동네에 공룡이 나타났다. 정확히 말하면 공룡의 새끼쯤 된다고 해야 할 듯싶다. 작년 말쯤 사거리 귀퉁이에 복닥복닥 몇 달간 공사를 하더니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그 건물에 병원도 입점하고 빵집도 들어오고 분식업계에선 유명한 떡볶이집도 들어서더니 어느날 대기업이 운영하는 홈플러스 익스프레스(이하 홈익)라는, 빨간 글씨 간판을 떡하니 내건 것이 아닌가.

마을버스 타면 몇 정거장 안 되는 전철역에 문화센터까지 갖춘 홈플러스가 있는데 그곳이 잘 되어 동네까지 들어왔나, 아님 홈플러스를 좀 더 가까이 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 기대에 부응하러 왔나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가까운 곳에 홈익이 생기니 편할 것도 같았다.

[동네슈퍼] 대형 슈퍼 입점에 적자 폭탄 "월세 내기 버거워"

ⓒ 한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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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처럼 '단순한' 사고를 가진 무심한 아줌마에게 동네슈퍼 주인아줌마의 하소연이 들리기 시작했다. 오며가며 아이들 잡다한 간식거리며 맥주와 안주거리를 사곤 하는 조그마한 동네 슈퍼다. 16년째 장사를 한다는 40대 중반 주인아줌마의 근심은 깊었다.

"큰 마트 들어오고 나서는 월세 200만원 감당하기 어려워요. 내가 사교성이 좋은 편이어서 슈퍼 내는 곳마다 손님이 끊이지 않았는데 작년부터는 그동안 벌어놓은 거 까먹게 되는 거예요. 계약기간 끝나면 전업하든지 다른 장소 알아보려구요."  

'가까이 있으면 좋지 뭐'했던 대기업 슈퍼가 동네에 들어와서는 공룡이 되어 동네 몸집 작은 슈퍼들을 잡아먹는 형국이다. 식사준비 하다가도 필요한 게 생각나면 입던 옷 그대로 슬리퍼 질질 끌고 나가도 별로 어색하지 않았던 동네슈퍼가 없어지는 것은 참 서운한 일이다. 큰 마트에 가려면 화장까진 하진 않아도 슬리퍼 질질 끌고 가기엔 다소 신경 쓰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동네슈퍼보다 조금 더 나가면 개인이 운영한다고 보기에는 다소 거창한, 카트를 밀고 장을볼 수 있는 또다른 대형마트가 있다. 개인이 운영해도 덩치가 있으니 경쟁력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곳도 적자를 견디지 못해 세 달 전에 가게를 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월세만 900만원인데다 규모가 큰 편이라 쉽사리 새 주인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단다. 개점은 하고 있어도 주인 속은 매일 타들어가는 모양이다.

[대형슈퍼] "SSM 법안은 국가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거"

ⓒ 한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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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거리에 생긴 홈익에서 백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웰0할인마트가 있다. 이 곳은 큰 길가에 위치한 데다다 물건 값도 싼 편이라 홈익이 들어오기 전에는 동네에서 제일 장사가 잘되는 곳이었다.

3만원 이상 사면 집까지 배달도 해주었고 포인트 제도까지 운영해 동네 장사지만 나름대로 영업전략을 갖춘 셈이었다. 3만원이 안 되어도 배추나 무 같은 무거운 물건을 산 할머니가 부탁하면 배달도 흔쾌히 해주는 인심도 쓸 줄 아는 곳이었다.

그 마트 역시 지금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다소 질서가 없고 좁았던 매장을 과감히 정리해 홈익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만큼 매장 복도를 시원스럽게 확보했다. 또 이젠 2만원 어치만 사도 집안까지 배달해준다. 홈익과 같은 서비스다. 게다가 홈익보다 물건 값이 싸고 싱싱한 생선가게가 들어와 있는 데다 연륜있는 주인이 세심하게 요리법까지 알려주는 정육점까지 들어와 있어 홈익과의 전쟁에서 지지는 않을 듯싶다.

홈익 직영점장 얘기를 들어보니 웰0할인마트가 선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긴 하다.

"작년 말에 개장했는데 첫 달부터 매월 600만원에서 많게는 천만원까지 적자예요. 여기가 개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다면 진작 문 닫았습니다."

요즘 정가에서 통과시키려고 한다는 SSM법안(기업형슈퍼마켓 규제법안)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단다.

"그 법은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당당하게 경쟁하지 않고 국가의 힘을 빌려 살아보자는 거지요. 개인이 운영하는 슈퍼라도 물건에 대해 잘 알고 좋은 물건 싸게 팔면 대기업슈퍼에게 질 이유가 없잖아요. 대기업슈퍼를 비난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터줏대감격인 웰0마트의 기세에 눌려 매달 적자를 기록 중이니 목소리가 더 높다. 웰0마트는 SSM법이 반갑기는 하겠지만 그 내용이 재래시장 근방 500미터 안에 대기업슈퍼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이곳과는 큰 상관이 없다. 재래시장은 홈익과는 한참 떨어져 있는데다가 재래시장 상권은 오래전에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SSM법의 구멍이다.

동네 아줌마들은 다소 어수선했던 웰0할인마트가 정갈해지고 싼 물건도 많아졌으며, 조금만 사도 배달해주니 나쁠 거 없다는 반응이다. 웰0할인마트에 없는 물건은 홈익가서 사면 되니 그저 좋을 뿐이다. 웰0할인마트와 홈익이 있는 상권을 중심으로 커피전문점, 제과점, 병원, 은행이 들어서면서 다소 무질서했던 우리 동네가 깔끔해지는 듯해 기분까지 좋아진다는 말들도 한다. 동네 안쪽에 위치한 조그만 구멍가게들은 갈수록 초라해지고 있지만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반응들이다.

마트 싸움에 등 터질 건 '우리들'

그러나 언제까지 좋기만 할까? 나를 꾸미지 않고도 갈 수 있었던 동네슈퍼가 사라지면 갑자기 필요한 물건이 생겼을 때 당황스러울 것이다. 카트 끄는 마트에 갈 수밖에 없으니 며칠 장을 한꺼번에 봐야할 것이고, 카트를 가득 채우고 싶은 지름신과 끊임없이 싸워야 할테니 말이다.

저가경쟁도 밑천이 두둑해야 할 텐데 웰0할인마트가 삼성 재벌과의 밑천경쟁에서 언제까지 승승장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구멍가게는 구멍가게대로, 조금 큰 마트는 그들대로 운영하며 먹고 살 수 있어야 살 만한 곳이 된다.

이명박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를 천명했고 학교 선생님도 큰 아이들이 작은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설명한다. 엄마도 덩치 큰 아이가 왜소한 자기 아이를 괴롭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흥분한다. '공정한 사회'를 부르짖는 공직자는 많은데 장관자녀는 특채로 채용되어 청년 실업자들을 격분하게 했다. 학교에서도 몸집 작은 아이들은 얌전히 있어야 큰 낭패 안 당한다.

세상 돌아가는 맥락이 이러니 대기업이 대형 쇼핑센터로는 성이 안 차 골목길 상권까지 접수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별거 아닌 일'이 되고 있다. 딸아이 말마따나 공룡사냥꾼이라도 있어야 할 판이다.


태그:#SSM, #동네슈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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