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얼마 전 휴가 나온 제자와 술자리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중학교 때 담임이었던 탓에 고등학교 3년 동안 다소 소원해지기는 했지만, 입대 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와 대학 생활은 어떤지, 진로에 대한 생각과 무슨 공부를 하는지 등의 얘기를 해주던 친구다. 자식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자랑하며 감격해 하시던 당시 그의 부모님으로부터의 전화를 잊을 수 없다.

일병 시절 대학 선배가 후임병으로 들어와 무척 난처했다는 얘기, 몇 남지 않은 괴팍한 선임병들에 대한 뒷담화, 그리고 '김치가 금치'인 요즘 군대에서 배추김치 구경하기 어려워졌다는 얘기 등 그의 감칠맛 나는 군대 생활을 듣노라니 18년 전 나의 군대 시절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그런데, 요즘 갓 병장 계급장을 단 그가 내무반 내에 주도적으로 꾸린 조직이 있단다. 제대 전 녹슨 머리를 기름칠할 요량으로 병장들 몇 명이 모여 그룹 스터디를 해보겠다고 의기투합했단다. 다들 눈치 볼 '짬밥'은 아닌 터라 모여 공부하는데 그리 어렵지는 않다고 한다. 대학도 아닌 군대에서 스터디 그룹이라, 군인이라는 신분과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진 않았지만 새로웠고, 젊디젊은 발랄함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군 내무반에서 제대하기 전 꾸린 모임이 '삼취모'

일과 후 정해진 시간에 모여 책 읽고, 영어 공부하고, 상식도 쌓고, 매주 다른 주제를 정해 토론도 하는 등 모두가 열성적이라는데, 정작 모임의 이름이 황당했다. '삼취모'. 곧, 삼성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한다. 어렵사리 군대 내무반에서 제대하기 전 공부하겠다고 꾸린 모임의 목적이 고작 삼성 취업이라니.

우리나라를 두고 이른바 '삼성공화국'이라며 자조한 건 분명히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대학 내에서는 물론 이젠 군대 내무반에서까지 삼성 취업에 목매단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법학전문대학원으로 인해 고시가 시나브로 퇴색하면서 공사와 삼성이 그 빈자리를 메우게 되어, 대학 새내기 때부터 책상 앞에 삼성 취업을 써서 붙여놓고 공부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얘기를 듣고 있노라니, 20년이 지난 대학 새내기 시절이 떠올랐다. 커리큘럼에 따라 책을 읽고 동아리 선배, 동기들과 함께 세미나를 하고, 뒤풀이로 그들과 술잔 부딪히며 '인생'을 논하곤 했던 그때를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한다. 그들 중에는 교사가 되어 제대로 된 교육을 해보겠다거나, 법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선 법관이 되겠다는 사람 정도는 흔했고, 자신은 모순된 세상을 바로잡는 혁명가가 될 거라며 '오버'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혼자 꿈꾸면 이상이지만, 함께 같은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며 모두가 자신감에 차 대학 생활을 보냈던 것이다. 그랬던 때가 불과 얼마 전인데, 밤낮 입시 공부한다며 온갖 고생 다하고 입학한 대학생, 그것도 새내기조차 언제부턴가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삼성 취업이 자신의 꿈이라고 말하게 됐다. 삼성이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은 물론, 군인의 일상마저도 장악해가고 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얼마 전 국방부로부터 영내 반입을 금지당한 '불온서적' 문제가 정작 군대 내에서는 별 이슈가 되지 못한다고 했다. 더욱이 최근 헌법재판소에서 합헌 판결이 나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지만, 그는 휴가를 나와서야 알았노라고 했다. 말하자면, 당장 제대하면 졸업이고 졸업하면 백수가 되는 상황에서, 토익, 토플 교재와 수험서적 볼 겨를도 없는데, 어느 누가 한가하게 그런 책을 읽겠느냐는 거다.

과거 서울 소재 한 4년제 대학에서 진행된 취업관련 특강의 모습.
 과거 서울 소재 한 4년제 대학에서 진행된 취업관련 특강의 모습.
ⓒ 송주민

관련사진보기


"제 친구들 중에는 취업을 기원하며 주술처럼 타원형 파란색 삼성 배지를 구해다 가슴에 달고 다니는 경우도 더러 있어요. 요즘 대학의 현실을 너무 모르시는 것 같아요."
"현실을 모른다고? 주위의 온갖 부러움을 사며 명문대에 합격한 수재라는 녀석이 정작 삼성 취업이 꿈이라니. 나중에 누군가 네 꿈이 뭐냐고 물으면 차라리 '이○○의 꼬붕'이라고 답해라."

적잖이 실망스러웠던 까닭에 제자에게 욕지거리와 같은 험담을 내뱉고 말았다. 그가 삼성에 취업하려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다만 '삼성에 취업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과 같은 정작 중요한 알맹이는 없다. 그저 연봉 두둑하게 받아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신의 꿈이 오로지 돈 많이 벌겠다는 것뿐, 심지어 그렇게 번 돈으로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없는 경우다.

웬만한 지방 도시의 학교에 가면 재학생의 삼성 합격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주로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지방 소재 대학과 전문계 고등학교의 교문 주변에 내걸리더니 요즘에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도 드물지만 보이곤 한다. 말하자면, 삼성 취업은 고시나 명문대 합격과 같은 '레벨'로 격상된 것이다. 명문대의 경우처럼, 삼성은 학교를 통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홍보되고 위상 또한 계속 높아지고 있다.

제자에게 현실을 모른다고 타박당한 선생

숫제 제자에게 현실을 모른다고 타박을 당했지만, 외려 그에게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명문대에 다닌 대학생으로서의 지성도, 젊은이로서의 패기도 찾아볼 수 없는 그저 속물적 인간과 술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다는 느낌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수년 전부터 '나 홀로' 삼성 불매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우리 사회에는 현실과 '자발적으로' 동떨어져 사는 사람도 있다는 걸 그저 알려주고 싶었다. 휴대전화도, 카메라도, 의류도, 마트도, 심지어 놀이동산도 삼성이 만들고 운영하는 곳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발도 끊었다.

시나브로 가족들도 동참하게 됐지만, 아내조차 삼성을 피하면서 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고 한숨을 내쉬곤 한다. 어쨌든 삼성을 외면하면 많이 불편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자위하며 지금도 버텨내고 있다. 나 한 사람의 노력으로 삼성을 무릎 꿇게 할 순 없을 테지만, 나 자신만큼은 삼성을 오롯이 거부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는 이런 나의 노력을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며 다른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보라며 조언했다. 이태 전 삼성으로부터, 또 우리 사회의 통념으로부터 되레 '팽' 당한 김용철 변호사의 예를 들면서, 역설적이지만 삼성이라는 실제적 권력을 인정하고 수용해야만 현실적이고 세련된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강조했다.

거래를 통해 삼성에 줄 건 주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챙길 건 확실히 챙겨야지, 막무가내로 삼성을 적으로 상정해서 부딪히는 건 무모할뿐더러 그렇잖아도 약한 힘만 소진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했다. 비록 세금 포탈 의혹과 경영권 세습 등 적잖은 문제가 있긴 하지만, 삼성이라는 이름으로 납부하는 막대한 세금이 국가를 운영하는 돈줄이라는 점을 안다면, 삼성은 적일 수 없는 거래 대상이라는 논리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그는 삼성의 대변인이 되어갔다. 불현듯 삼성은 엄청난 수의 '유능하고 똑똑한' 자발적인 홍위병을 거느리게 된 것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과거 대학생들이 자본의 노동 착취와 특권에 대한 가장 극렬한 저항 세력이 되었다면,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자본의 논리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되레 옹호하는 지지 세력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기성세대의 불매 운동을 현실과 동떨어진 치기 어린 장난쯤으로 여기는 그와 불편한 얼굴로 헤어지면서 교사로서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의 대학 진학과 진로 선택에 백 분의 일, 아니 천 분의 일이라도 영향을 끼쳤을 교사로서, 내가 그에게 대체 뭘 가르쳤던 걸까 싶었다. 그저 그가 명문대에 진학할 때 필요한 수험지식 한두 개가 전부였을까를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 전국의 많은 학교 교문마다 사법고시 합격자 명단이 내걸렸고, 그도 그랬을 테지만, 얼마 안 있어 명문대 합격자를 적은 현수막 또한 등장할 것이다. 그들은 판검사가 되어 사회지도층으로 군림할 테고, 또한 그들 중 상당수는 삼성에 취업할 것이다. 그것이 현수막을 내걸어 기리려는 학교의 빛난 자랑일까. 학교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바가 고작 그런 것일까. 제대 후 있을 그와의 만남이 무척 부담스러워졌다.


태그:#삼성공화국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