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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다. 거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귀신에게 끌려 다니지 않는 한 절대 할 수 없는 작업이다. 아마 그 귀신은 아기가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마구 울어대는 것과 다름없는 본능일 것이다. (책 속에서)

나는 왜 쓰는가
▲ 겉그림 나는 왜 쓰는가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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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줄 서평 쓰는 일도 힘들 때가 있는데, 책 쓴다는 게 어찌 힘겹지 않을까. 조정래는 자신의 삶을 글 감옥에 갇혀 산 삶이라 표현했다. 누가 가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든 감옥에 스스로 수인이 되어 살았던 '황홀한 글 감옥' 인생이었다고 회상한다.

왜 글 감옥의 수인이 되어야 했을까. 오웰이 대답한다. 아기가 관심 끌기 위해 우는 것처럼, 글을 통해 타인의 주목을 받기를 바라는 본능이라고. 힘들여 썼다고 다 좋은 글 되는 건 아니다. 어떤 게 좋은 글일까. 오웰이 대답한다. "좋은 산문(글)은 유리창 같은 것"이라고.

어떤 글이 유리창 같은 글일까. 글을 통해 자신을 속속들이 다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글,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보여줄 수 있는 글 말이다.  오웰은 자신이 쓴 글 중에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 소리에 현혹되었을 때, 즉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었을 때 맥없는 책이 되었다고 회상한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고 할 정도로 오웰은 정치와 글쓰기가 별개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정치적 목적이 결여된 글이 맥없는 책이 될 수밖에 없었음을 강조한 대목에서도 오웰의 입장이 확인된다.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 오웰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정치적 글쓰기를 강조했지만 오웰은 작가가 특정 정당이나 정치 세력을 위한 글쓰기를 해서는 안 된다며 분명한 선을 그었다. 작가로서가 아니라 일반 시민으로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어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그는 찬바람 새는 회관에서 연설을 하고, 길바닥에 분필로 글을 쓰고, 투표를 호소하고, 전단을 나누어주고, 심지어 필요하다 싶으면 내전에 참가할 각오도 되어 있어야 한다. 단, 자기 당에 대한 봉사로서 다른 건 무엇이든 해도 좋지만 당을 위해 글을 쓰는 것만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자신의 글이 당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책 속에서)

정치적 글을 쓰되, 특정 정치 세력의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리창을 통해 볼 수 있는 세상도 보는 눈에 따라 달라지듯이, 정치적 글 또한 특정 정당이나 특정 이데올로기에 종속되면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작가 자신의 눈으로 정직하게 보고 느낀 것을 쓴 글이 '유리창 같은 글'이 될 수 있다.

친 서민을 외친다고 다 친 서민 정치인이라 할 수 없다. 녹색 성장을 말과 글로만 강조한다고 친 환경 마인드를 가진 정치인이라 평가할 수 없다. 오웰이 강조하는 '유리창 같은 글'의 의미는 오늘의 우리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덧붙이는 글 | 조지 오웰/이한중 옮김/한겨레출판/2010.9/18,000원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2010)


태그:#조지 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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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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