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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박용만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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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나라의 지붕이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두려움은 개화파에 속했던 젊은 층을 더 압박했다. 일본의 손아귀에 나라가 완전히 넘어 가면 외국으로 가는 길은 영영 막힐 게 뻔했다.

순종이 즉위한 그 이듬 해 12명의 젊은이들이 한 패가 돼 해외유학을 가기로 결심했다. 눈물을 흘리는 부모들과 헤어져 그들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외교 업무가 이미 일본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일본 관리들은 미국행 여권 발급을 거부했다. 한인들은 유럽이나 미국으로 갈 수 없다는 법규가 새로 생겼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본에서 돌아와 국제항인 원산으로 가 외국행 선편을 살폈다. 그러나 곧 일본 경찰의 추적으로 절반은 체포됐다. 남은 사람들은 핫바지 차림의 촌사람으로 변장하고 원산을 빠져 나왔다. 혹독한 추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높은 산을 넘고 황량한 들판을 걸을 때 귀는 얼고 손은 감각을 잃었다.

그들은 강만 건너면 유럽행 기차를 탈 수 있는 북방의 국경에 도달했다. 국경은 경계가 삼엄했다. 시베리아까지 자동차를 타고 갈 여비가 없는 것도 문제였다. 비밀리에 부모님께 연락해서 여비를 보내달라고 했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김현구(1919년 경)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김현구(1919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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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아 3명이 체포됐다. 이제 남은 사람은 김현구, 홍승국, 송진헌 셋이었다. 그때 홍승국의 나이 24세, 김현구의 나이 20세였다.

둘은 충청도 옥천 출신으로 먼 친척관계였다. 홍은 배재학당을 나왔고 김은 양정의숙을 다녔다. 1909년 초 여러 번 도강을 시도하다 실패했지만 다행히 어느 날 밤중에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을 때는 돈이 떨어져 오도 가도 못할 신세가 됐다. 

김현구는 정순만을 찾아 나섰다. 그의 이종 사촌 형인 범재 김규흥으로부터 그에 관해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순만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현지 신문 대동공보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중국이나 러시아 혹은 미국으로 유학이나 망명을 떠나온 사람들에게 안내와 도움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정순만은 초면인데도 여비를 마련해주면서 미국 콜로라도 주에 있는 박용만을 찾아가라고 했다. 1905년 1월 박용만이 미국으로 떠날 때 일곱 살 난 그의 아들 정양필과 네 살짜리 이승만의 아들 태산을 데리고 갔다는 말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 1900년대 초 풍경
 블라디보스토크 1900년대 초 풍경
ⓒ 저자 미상. 저작권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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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 해, 그러니까 1904년 정순만과 이승만, 그리고 박용만은 한성감옥에서 만나 결의형제가 됐다. 그때 정순만의 나이가 31세, 이승만은 29세, 박용만은 23세였다. 정순만은 충북 청원 출신으로 윤치호, 이승만과 함께 독립협회 창립에 참여했다.

1904년 가을 기독교 전도를 내걸고 서울 남대문 근처의 상동교회에 상동청년회가 조직됐다. 이것은 독립협회가 위장한 단체였다. 전덕기 목사를 회장으로 이동녕, 이승만, 정순만, 이희간, 박용만, 조성환, 이동휘 등 청장년들이 간부를 맡았으며 민영환, 이시영, 이상설 등의 대관들이 후원했다. 그 회원은 4만 명에 달했다. 이 단체의 간부들이 후일 독립운동의 주역들이 된다.

러일 전쟁 때 이희간은 고등사탐정으로 종군해서 6만8천 원을 벌었는데, 그 중 1만3천 원을 미국행 유학생의 여비로 활용케 했다.

이민 개발회사와 짜고 노동이민으로 가장해서 유학생을 보내면서 여비를 선불해 줬는데 미국에 도착한 후에 갚도록 했다. 박용만도 그 혜택을 받은 사람이었다.

1905년 11월 보호조약이 체결되려 하자 상동청년회는 조국의 위기를 체감하고 긴박하게 대응했다. 당시 외무대신 박상순이 유약한 인물임을 알고, 정순만과 이희간은 비수를 품고 찾아갔다. 박상순에게 조약에 조인하지 말 것과 일본공사가 강요할 경우 관인을 연못에 던지고 자살하라고 협박했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태그:#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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