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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장 속의 치요> 겉 표지
 <벽장 속의 치요> 겉 표지
ⓒ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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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페이지의 양장본이다. 앞머리를 심하게 일자로 자른 소녀가 기모노를 입고 수줍은 듯 서 있다. 표지그림이 아기자기한 만화 속 한 장면 같다. 지나치게 서정적인 느낌이라면 꺼내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내가 책을 고를 때의 기준을 설명하겠다. 별 볼일 없는 얘기지만 재밌게 하고 싶은데 달리 방법이 없다. <벽장 속의 치요(2007)>를 집어든 이유는 표지그림과 첫 장의 세 줄에 있었다.

처음부터 안 좋은 예감이 들긴 했다. 복덕방 영감이, 게이타가 석 달 전까지 근무했던 회사의 빌어먹을 과장과 똑 닮았기 때문이다. "월세 5만 엔 이하로 욕실 딸린 방이라"

쉽게 읽힌다. 책을 선택하는 간단한 방법 되겠다. 긴 서술의 어려운 문장은 일단 열외다. 학문적인 견해가 있는 책들은 왜  어려운 말들을 늘어놓아야 할까. 누가 보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로 쉽고 재밌게 서술한 책들의 시대가 오길 바란다.

물론 출판사나 작가의 이력, 출판연도를 보기도 한다. 하지만 잘 읽히는 재밌는 글 앞에 출판사나 연도, 작가의 수상경력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선택된 책이 오기와라 히로시의 <벽장 속의 치요>다. 내용을 알지 못한 채 읽기 시작했고. 책을 덮은 후에야 펑키호러소설이라는 것을 알았다.

완벽한 장편의 외양을 지니고 있었으나 단편집이다. 책 한 권을 고를 때도 속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벽장 속의 치요>속 9편의 단편은 한 마디로 80년대의 외화 '환상특급' 분위기다. 기묘하다.

귀신보다 무서운 사람들의 이야기

장편이길 바랐던 이야기 <벽장 속의 치요>는 백수가 된 청년 게이타가 적은 돈으로 얻은 욕실 딸린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시작된다. 거대한 묘비를 연상하게 하는 건물과 그 안을 채운 으스스한 분위기의 사람들. 하지만 무엇보다 매일 밤 벽장 속에서 고개를 내미는 백년 된 꼬마 귀신이 문제다.

물론 게이타는 두려움과 공포에 소리쳤다. 하지만 찹쌀떡 같은 얼굴의 꼬마 귀신 치요가 육포와 칼피스, 주먹밥을 우적우적 삼키고 야한 티비를 즐겨보며 자신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해주는 모습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부모를 잃고 욕심 많은 삼촌댁에 얹혀 지내다 섬나라로 팔려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는 치요의 사연을 듣고 성불시켜주겠다는 약속까지 하게 되지만 얘기는 느닷없이 끝나버린다. 작가는 끝내주는 에피타이저만 선보이다 말았다. 

이밖에 대학시절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를 엮은 <call>은 졸업 후 죽게 된 남자가 남은 두 남녀의 축복을 바라는 내용이다. 어찌 보면 평범한 이야기지만 이 책을 두 번 읽게 될 거라는 마지막 작가의 말처럼 절묘한 서술적 트릭의 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밤마다 창문을 두드리는 친구와 자전거를 타고 어딘가를 다녀오지만 자신을 태우러 오는 친구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의 <신이치의 자전거>, 15년 전 숨바꼭질을 하던 중 실종된 동생을 다시 찾으러 온 여자는 그곳에서 혼자 살고 있는 사촌오빠와 만나게 되고 오래 된 나무 한 그루 위로 오르며 동생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는 <어두운 나무그늘>은 아동 성폭력의 문제를 암시한다.

의사인 아빠는 생전에 전쟁용 살상 무기인 고엽제를 만들었으며 남은 두 딸과 숲에 숨어 지내는 엄마는 딸들을 절대 사람들의 눈에 띄지 못하게 한다는 내용의 <어머니의 러시아 스프>, 옛날이야기를 하듯 차분하게 시작하지만 마지막 한 문장이 주는 섬뜩한 반전이 돋보이는 단편이다.

내연녀의 변심에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남자가 시체를 토막 내 완전범죄를 계획하며 우왕좌왕 하는 사이 청소대행 업체의 남자가 들이닥치는 이야기 <예기치 못한 방문자>는 한편의 블랙 코미디와 같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독특하며 기발하다.

서로를 증오하는 부부가 상대를 죽이기 위해 독초가 있는 반찬이나 독이 있는 물고기 등을 차려 놓고 상대가 먹기를 바라는 신경전을 다룬 내용의 <살인 레시피>와 거동이 불편한 시아버지를 잔인하게 괴롭히는 내용의 <냉혹한 간병인>인 역시 읽는 내내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흡입력이 있다.

그 외에도 가장 미스터리 한 내용의 <늙은 고양이>는 숙부가 죽자 큰 저택과 늙은 고양이를 물려받은 가족들이 서서히 고양이에게 홀려 변하기 시작하는 내용이다. "나는 갑자기, 피 냄새가 나는 생선이 나쁘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 미스터리의 중심에 선 듯한 느낌이다.

<벽장 속의 치요>에 담긴 9편의 단편은 각각 다른 분위기를 지닌다. 귀신이 나오지만 로맨틱하거나 인간이 등장하지만 무섭다. 애잔한 연민과 정이 느껴지는 귀신의 존재와 더불어 극단적 대조를 이루는 잔인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섬뜩할 정도로 절묘한 반전 또한 충격적이다.

오기와라 히로시가 전하려 하는 것은 현대 사회 속 부조리한 인간상이다. 한때는 사랑하던 부부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어떤 음모를 꾸미는지, 전쟁의 피해자로 남겨진 사람들의 아픔과 아동성폭력의 문제, 끔직한 노인학대의 구체적인 모습까지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귀신이 아니라 끝을 알 수 없이 잔혹해지는 인간일지도 모른다고 암시한다.


벽장 속의 치요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신유희 옮김, 박상희 그림, 예담(2007)


태그:#벽장 속의 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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