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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감사장에 오른 배추

 

밭이나 시장에 있어야 할 배추가 며칠 전에는 국회 국정감사장에 오르더니, 뉴스에는 이즈음 배추 값 파동문제가 당정청 수뇌부 및 관계 장관들이 머리를 맞대고 종합대책을 강구할 만큼 시급한 현안문제라고 한다.

 

엊그제는 서울시의 배추 할인 판매 재래시장에서 이른 새벽부터 두어 시간 기다린 끝에 마침내 한 주부가 배추 한 망을 사고는 만세를 부른 장면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쳤다.

 

바야흐로 전국이 배추이야기로 시끌시끌하다. 그도 그럴 것이 배추 값이 평년보다 예닐곱 배 이상으로 올랐기 때문이다. "사람팔자 시간문제"라고 하더니 "배추팔자도 시간문제"임을 실감케 한다.

 

이즈음 나는 원주에서 살고 있지만 2004년 4월부터 2009년 11월까지 6년 동안 이웃 횡성군 안흥면에서 살았다.

 

최근 안흥은 찐빵으로 유명해졌지만 원래 이 고장은 고랭지배추와 더덕, 그리고 한우 생산지로 이름난 곳이었다.

 

내가 살았던 안흥산골 말무더미마을은 산촌(散村)으로 세 집뿐이었는데, 두 집은 모두 노씨로 농사꾼이었다.

 

특히 앞집 노씨(노진용, 64)는 평생을 고랭지배추농사를 지은 전문 농사꾼이었다.

 

그와는 날만 새면 늘 만나는 이웃사촌이라, 주된 얘깃거리는 늘 배추농사 이야기였다. 그래서 이웃에서 배추농사를 늘 눈으로 보고 귀에 익도록 들어왔다. 그의 이야기는 점차 배추농사가 '섯다판'처럼 투기장이 돼 간다는 염려와 농사꾼이 그래서는 안 되는데, 사실상 속마음은 풍년이 그리 반갑지 않다는 얘기였다.

 

그 까닭은 배추농사가 풍년이면 배추 값이 바닥으로 내려가 배추장사들이 사가지 않기 때문이다. 배추를 뽑지도 못하고 그대로 썩혀버리기 때문이다. 이웃에서 6년간 지켜보니까 한 해는 흉년으로 좋은 값을 받았고, 이태는 평년작으로 간신히 수지를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절반인 3년간은 밭떼기 중간도매상이 배추를 뽑아 가지 않아 밭에 그대로 썩히거나 최상품만 골라 뽑아 가는 바람에 겨우내 온 밭이 배추로 덮였다.

 

농사꾼의 분노

 

배추 값이 올라도 "농사꾼 수입은 별로"라는 뉴스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농사꾼들이 배추를 심은 뒤 곧장 밭떼기 중간업자에게 넘기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보는 밭떼기 중간도매상은 농사꾼에게는 필요악이었다. 만일 그들이 없다면 농사꾼이 농사를 다 지은 다음 배추를 뽑아 차에 싣고 서울 가락시장에 팔러 가야한다.

 

그런데 시골 농사꾼이 화물차를 빌려 서울 가락시장에 가면 세상물정에 어두워 자칫하면 제 값을 받지 못할 뿐더러 때로는 여러 날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배추 값을 그대로 날리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농사꾼과 밭떼기 중간도매상은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관계다. 중간도매상은 농사꾼에게 미리 배추를 밭떼기로 사지만 배추 값이 폭락하면 밭에서 뽑아가도 채 운임도 나오지 않기에 이미 지불한 배추 값을 그대로 날려버린다. 그래서 그들도 배추 풍년보다 대박을 터뜨릴 흉년을 더 기다린 지도 모른다.

 

농사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치인들이 농사꾼들을 매우 푸대접한다고 푸념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래도 예전 정치인들은 농사꾼들을 먼저 생각하는 농정을 폈는데, 최근에는 시골에는 표가 적다고 농사꾼은 아예 관심 밖이라며 울분을 터뜨린다. 그러면서 직업정치꾼들은 산불이 나도 골프채나 들고 다니면서 '차떼기', '사과상자'를 주고받는다고 하는데 어찌 농사꾼이 분노치 않으랴.

 

좋은 정치란

 

지구촌 날씨가 해를 거듭할수록 이상 징후를 보이고 있다. 올해의 배추 파동이 올해만으로, 또 배추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배추파동 이야기만 늘어놓고 내 이야기를 끝내는 것은 부질없어 보인다. 이런 농산물 파동을 미리 막을 대안은 무엇인가.

 

그 첫째는 정부의 농어촌 우대 정책이다. 그리고 농림수산부 장관은 농어촌 출신으로 농어촌을 잘 아는 사람으로 임명해야 한다. 농림수산부 장관마저도 계파 배분 방식으로 임명한다면 그의 농정은 탁상공론일 것이다.

 

그 둘째는 농림수산부에 농어촌 안정기구와 기금을 마련하여 풍년과 흉년을 대비케 해 농민·어민들이 마음 놓고 농사짓고 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농협과 수협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배추파동을 중국산 수입으로 땜질하는 것은 우선 급한 불을 꺼겠지만 마침내 농사꾼도 죽이고, 우리 농업을 더욱 피폐케 할 것은 불을 보듯이 분명한 일이다. 또한 도시 소비자에게도 중국산 배추에 대한 검역 불안감과 일부 업자들이 중국산 배추를 국산 배추로 속여 팔아 우리 사회에 불신감을 조성할 우려도 있을 것이다.

 

농정 당국은 이번 배추파동의 근본 원인을 사실대로 정확히 밝힌 다음, 소비자에게 성숙한 시민의식에 호소하여 소비를 절제시켜야 한다. 그와 동시에 유통구조를 과감히 개선함(생산자 소비자 직거래 유도 등)과 아울러, 일부 업자들의 매점매석을 강력히 단속하여 배추 값 인하를 유도하는 게 이파동을 다 함께 슬기롭게 넘기는 가장 현명한 처방일 것이다.

 

사실 좋은 정치란 장바구니 물가를 안정시키는 게 그 시작이다.


태그:#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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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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