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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으로 하나 주씨요~ 색깔이 겁나게 곱고 이쁘구마이~."
"할머니,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무심코 길을 걷던 중, 속옷가게 앞 할인판매대에서 점원과 할머니가 실랑이 중이다. 그들의 실랑이가 괜스레 궁금해졌다. 나도 속옷을 고르는 척하며 그들의 대화를 살며시 지켜보았다.

"할머니가 입으실 거예요?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아니. 나가 어찌케 이런 걸 입는다요? 우리 딸이 입을 거여~ 사이쥬. 나 그런 거 모르는디. 이번 추석에 우리 딸이랑 목욕탕에 갔는디, 입고 있는 속옷이 영 짜잔하드만. 다른 사람들꺼 보니께, 아따~ 겁나게 화려하대~ 그래서 내가 이쁜 걸로 하나 사줄라고 그랴~."
"그러니까요. 따님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모르세요?"

한눈에 보기에도 할머니가 착용하기 위해 집어든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 물건이었다. 근처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는 할머니로 보였는데, 할머니가 고르신 속옷은 너무나 곱고 예쁜데다 약간은 야하기까지 한 브래지어. 할머니께서 그 어렵다는 여성들의 속옷 사이즈를 알 리가 만무하다.

같은 제품을 하나 집어서 가격표를 슬쩍 들여다보니 50% 할인된 가격이 무려 4만원. 요새 잘나가는 여배우가 'V' 라인 어쩌고 하며 광고하는 바로 그 브랜드의 제품이었다. 여성들의 속옷 가격이야 몸매를 날씬하고 돋보이게 하기 위한 여성들의 심리를 이용해 '**기능성', '**라인' 이러저러한 미사여구를 붙이면 붙이는 만큼 가격이 올라가는 법. 도무지 백화점에서 제 가격을 주고는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 손톱만큼도 안 드는 그야말로 '겁나는' 가격이다.

"잉~ 이거 우아래 한 벌로 주씨요~."

사이즈도 모르는 채 막무가내로 달라는 할머니와 난처한 점원의 실랑이는 결국 점원과 딸이 직접 전화통화를 하고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할머니는 거금 7만원을 점원에게 지불하고 50% 할인판매하는 비싼 속옷 세트를 구입하셨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구경을 멈추고 돌아서서 나오며 슬그머니 작은 미소를 지었다.

시집 간 딸이 명절에 친정집에 왔다 친정엄마를 모시고 함께 목욕을 갔던가 보다. 나이든 엄마가 보기에도 딸의 속옷이 추레해보여 싫으셨던 게지. 그래서 아무리 비싸도 정말 곱고 고운 놈으로다가 하나 사입히고 싶으셨던 거다.

온종일 시장에서 할머니가 가꾸신 야채 몇 바구니를 고생하며 팔아봐야 할머니가 구입하신 속옷 값이 나올 수나 있을지 걱정스러울 지경인데도, 그 큰돈을 내어놓으며 시집 간 딸이 여전히 예쁘게 보이길 바라는 친정엄마의 마음. 그런 애뜻한 마음이 오롯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시집 간 딸을 둔 엄마라면, 또 친정엄마를 둔 시집 간 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상황이자, 또 누구나 비슷한 사연 한 움큼씩은 갖고 있을 일이었다.

내 경우, 서른이 넘은 후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뒤늦게 학업을 마쳤다. 학교에 입학했을 때에는 당연히 내가 벌어둔 돈으로 공부하고 가능하면 열심히 해서 장학금 한푼이라도 받아 경제적 부담을 줄이려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등록금 납부를 앞둔 어느날, 학비에 보태라며 엄마가 봉투를 하나 슬그머니 내놓으셨다. 여유있는 친정살림이 아니었기에 무슨 봉투냐며 펄쩍 뛰었지만, 뒤늦게라도 공부하는 딸에게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다며 조금씩 모은 용돈을 쾌척하신 것이다. 순간 엄마의 마음이 진하게 마음으로 전해져오며 코끝이 시큰해졌다.

6·25가 발발하던 해에 산골에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 제대로 학업을 못 마치신 내 엄마. 비록 배움의 끈은 짧아도 엄마 특유의 현명함으로 자식 셋을 잘 키워내신 멋진 내 엄마.

명문대에 진학하여 부모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자란 큰 딸이, 부모의 바람과는 달리 제멋대로의 이십대를 보냈어도 "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싫은 소리 한 마디 안 하시다가 뒤늦게서야 공부를 해보겠다고 하자, 마음으로 조용히 지지를 보내주셨던 내 엄마.

당신의 마음에 '나는 이루지 못했지만 너는 꼭 성공하여 당당하고 멋진 여성이 되어라'라는 메시지가 소리없이 담겨 있었다.

지금의 나보다 15살이나 젊은 내 엄마와 백일된 나
 지금의 나보다 15살이나 젊은 내 엄마와 백일된 나
ⓒ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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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당신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지금 태어나자마자 장애를 얻은 아들을 키우느라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친정엄마 곁에서 살고 있다.

처음 고향에 자리 잡았을 때에는 자식 때문에 시골에 주저앉은 딸을 보며 속상해하시는 친정엄마를 감당하느라 꽤나 버거웠는데, 3년이 지난 지금은 같이 늙어가는 친구처럼, 때론 싫은 소리도 해 가며 잘 지내고 있다.

우연히 길에서 목격한 훈훈한 광경을 통해, 모처럼 완전 소중한 내 엄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내친 김에 오늘은 울 엄마한테 이쁘고 야한 속옷 한 벌 선물해볼까나.

지난 여름, 친정엄마와 함께 한 짧은 여행에서
 지난 여름, 친정엄마와 함께 한 짧은 여행에서
ⓒ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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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친정엄마, #모녀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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