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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유적지 부근 농가. ‘상점’ 간판은 걸려 있지만, 주인이 없는 집 같았습니다. 볼수록 허전함이 밀려오더군요.
 청산리 유적지 부근 농가. ‘상점’ 간판은 걸려 있지만, 주인이 없는 집 같았습니다. 볼수록 허전함이 밀려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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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 전투 유적지를 찾았던 만주기행 넷째 날(8월15일) 오전. 기념비 앞에서 참배만 하고 발길을 돌리려니까 서운했다. 마지막 승전보를 전해왔던 '백운평전투' 현장이 산길로 4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버스가 오갈 수 없다고 해서 못내 아쉬웠다. 

청산리 전투는 승리로 끝났지만, 독립군을 도왔던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학살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자 집결지였던 '어랑촌'만 무사하고, 민족종교(대종교)를 믿는 마을들은 쑥대밭이 되었다는 설명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청산리 전투 유적지를 뒤로하고 나오는데 길가에 드문드문 서 있는 허름한 농가들이 외롭고 쓸쓸하게 보였다. 독립군을 도운 부락민들이 일제의 총칼에 무참하게 죽어간 역사의 현장을 말없이 지키는 보초병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항일지사 나철, 서일, 김교헌 묘역

용정으로 가는 중에 항일지사 나철(1863-1916), 서일(1881-1921), 김교헌(1868-1923) 묘역을 참배했다. 20세기 전반기에 만주 동북지구에서 화룡시 청파호를 기지로 항일 계몽운동과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청산리 전투 선봉에서 활약했던 분들이다.

항일 지사 묘역 참배. 풍찬노숙을 하면서 일제와 싸웠던 독립군에 대해 설명을 듣고, 진지한 표정으로 묵념을 올리고 있습니다.
 항일 지사 묘역 참배. 풍찬노숙을 하면서 일제와 싸웠던 독립군에 대해 설명을 듣고, 진지한 표정으로 묵념을 올리고 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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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군정서 총재로 무장 항일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서일 장군은 '흑하사변'으로 동지들을 잃자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단다.

서일 장군의 유언은 전율을 느끼게 했다. 한편 수천억의 불법 비자금을 조성하고 민주주의에 곰보 자국을 내고도 현직 대통령 자문 역할을 하는가 하면, 제2의 국난이라는 외환위기를 야당 탓으로 돌리는 전직 대통령들의 추잡한 모습들이 오버랩 되었다.

항일지사 3인의 묘. 봉분을 중국식(삼각)으로 쌓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조선족 묘는 봉분이 한국처럼 둥글다고 합니다.
 항일지사 3인의 묘. 봉분을 중국식(삼각)으로 쌓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조선족 묘는 봉분이 한국처럼 둥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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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지사의 묘비에는 한자로 '대종교'(大倧敎)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다. 나철 선생 비에는 '대종교 대종사'라고 새겨 있는데 묘역임을 알리는 안내문에는 빠져 있어 의아스러웠다. 문화유물 관리에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중국 공산당이 개입하기 때문이란다.

독립군을 도왔던 대종교 신도(마을주민)들의 억울한 희생과 항일지사들의 이력이 정확하지 않은 안내문을 보면서 하루빨리 북한과 평화통일을 이루어야 하고, 조선족 자치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사에 민간단체는 물론 정부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교류도 확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군이 사용했던 무기고. 관리인도 없이 지금까지 보존되는 걸 보면서 용정시 조선족들의 역사의식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독립군이 사용했던 무기고. 관리인도 없이 지금까지 보존되는 걸 보면서 용정시 조선족들의 역사의식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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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지사 묘역으로 가는 길목에는 독립군들이 야산에 토굴을 파서 사용하던 무기창고가 두 개 남아 있었다. 지금도 형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무기고들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곳임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무기고가 있는 마을의 옛 이름은 '청파호'로 신도 대부분이 독립투쟁에 앞장섰던 대종교 본부가 있었다고 하는데 무기고로 사용하던 당시에는 풀로 덮어놓으면 모르기 때문에 붉은 벽돌을 쌓은 돌출된 부분은 없었단다.

용정으로 오는 길에 여성작가 강경애 문학비와 용정 기차역 광장에 들러 만주의 3·1운동으로 불리는 3·13운동(1919년)이 일어난 배경과 결과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점심으로 냉면을 먹고 오후에는 일송정, 용정중학교, 서전서숙 기념비, 용두레 우물 등을 둘러보았다.

비암산(琵岩山)에 우뚝 서 있는 일송정(一松亭)

해란강 맑은 물 허리에 두르고/ 백두의 정기로 기암이 솟아/ 그 이름 비암산// 용드레촌 지켜주는 아름다운 명산/ 일송정과 더불어 천만년 푸르른/ 낙원의 산// 수려하고 장엄한 그 자태/ 오르지 않으면 모르리라

용정시에서 서남쪽으로 약 4km 떨어진 비암산 기념바위 뒷면에 적힌 시(詩) 귀이다. 길이 질퍽거려 버스에서 내려 30분 가까이 걸어가야 했다. 자동차가 지나가면서 생긴 물웅덩이와 타이어 자국은 고향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일송정 가는 길,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30분 가까이 걸어갔는데요. 어렸을 때 시골 외갓집 가는 길 같았습니다.
 일송정 가는 길,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30분 가까이 걸어갔는데요. 어렸을 때 시골 외갓집 가는 길 같았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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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송정에서 내려다본 해란강. 물안개가 내리깔린 해란강은 세파에 시달린 순박한 시골 아낙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일송정에서 내려다본 해란강. 물안개가 내리깔린 해란강은 세파에 시달린 순박한 시골 아낙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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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암산 기념바위를 지나 일송정에 오르니까 안개 자욱한 서전벌과 평강벌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용정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조국과 고향을 떠난 조상들이 타국에서 겪었던 눈물과 한을 묵묵히 바라보았을 해란강은 분단 60년을 넘긴 지금도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눈물의 강, 어머니의 강, 피눈물나는 강으로도 불린다는 해란강은 두만강 지류이다. 화룡시에 있는 1621m의 베개봉 동북쪽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용정시를 휘돌아 145km를 굽이굽이 흘러 두만강과 합류한단다. 만주벌판을 거점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산화해간 조상들의 아픔을 기억이나 하는지.

일송정과 소나무. 한국에서는 선구자를 부르면서도 의미를 잘 몰랐는데, 직접 올라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며 부르니까 가슴이 뭉클해지더군요.
 일송정과 소나무. 한국에서는 선구자를 부르면서도 의미를 잘 몰랐는데, 직접 올라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며 부르니까 가슴이 뭉클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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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은 용정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들이 자주 올랐다는 비암산 정상에 정자 모양으로 서 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를 말한다. 그때 소나무는 일제에 의해 없어지고, 지금은 2003년 당시 한국 통일부가 백두산에서 가져다 심었다는 소나무가 서 있었다. 광복절인데 그냥 가면 되겠느냐는 인솔자의 제의로 항일투사 혼령들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선구자'를 합창하고 내려왔다.

용정(龍井) 시내의 항일 유적지

연길(옌지)에서 버스로 40분 거리에 위치한 용정시는 일제의 압박을 피해 만주로 건너온 조선인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삶의 터전을 마련한 도시이며, 한때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토지의 무대가 되었던 도시여서 낯설지 않았다.

대성중학교(현 용정중학교). 1921년 건축한 건물로 앞에는 윤동주 시비가 서 있습니다. 대성중학교 출신은 훗날 북한을 선택한 사람이 많다고 하더군요.
 대성중학교(현 용정중학교). 1921년 건축한 건물로 앞에는 윤동주 시비가 서 있습니다. 대성중학교 출신은 훗날 북한을 선택한 사람이 많다고 하더군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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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교육의 발상지 용정중학교 전신은 1921년 7월 11일 개교한 대성중학교이다. 일제 수난기를 거쳐 1946년 9월 16일 대성중학교, 은진중학교, 광명중학교, 명신중학교, 동흥중학교, 광명여자중학교 등 6개 학교가 연합해서 '길림성립 용정중학교'가 탄생했고, 순수 조선족만 다닐 수 있단다. 

건물은 신관과 구관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신관은 용정중학교로 개명되어 조선족 중학교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다. 구관 2층은 대성중학교 역사와 용정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독립운동 관련 사진과 자료를 전시해놓은 사적전시관이었다. <윤동주기념관>과 <이상설역사기념관>도 설치해놓고 여성 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었다.

용정 시내 공원에 있는 용두레 우물. 두레박을 지렛대처럼 매달아 물을 퍼 올렸다고 합니다.
 용정 시내 공원에 있는 용두레 우물. 두레박을 지렛대처럼 매달아 물을 퍼 올렸다고 합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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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선구자와 소설 토지에도 등장하는 용두레 우물은 우리 민족이 처음 용정에 이주하여 발견한 우물이라 한다. 가이드는 우물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도 들려주었다. 화강암 기념비에 한자로 <용정지명기원지정천>이라고 새긴 아홉 글자는 조선 백성의 만주 이주 역사를 말해주는 듯했다. 

19세기 말 장인석, 박인언 농부가 육도구(현 용정)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우물을 발견했다고. 그들은 식수를 해결하려고 부근 한족 농민들과 우물에 용두레를 설치하여 물을 마시면서 용두레의 '용(龍)'과 우물 '정(井)'을 합해 '용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단다.

서전서숙 기념비. 처음엔 반을 갑·을로 나누어 가르쳤는데 ‘갑’ 반은 고등반, ‘을’ 반은 초등반이었으며, 갑은 20세 전후의 청년들이 등록하였다고 합니다.(옆에 서 있는 탑은 서전서숙과 관련이 없다고 합니다)
 서전서숙 기념비. 처음엔 반을 갑·을로 나누어 가르쳤는데 ‘갑’ 반은 고등반, ‘을’ 반은 초등반이었으며, 갑은 20세 전후의 청년들이 등록하였다고 합니다.(옆에 서 있는 탑은 서전서숙과 관련이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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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이동녕, 이회영, 정순만, 여준 등 민족 운동가들이 사재를 털어 1906년 8월 서전평야 이름을 따 설립했다는 '서전서숙'(瑞甸書熟)은 북간도 근대교육의 효시이며 해외독립운동 기지로 만주지역에 최초로 설립한 교육기관으로 전해진다.

교육 내용은 철저한 항일민족교육이었으며 무상교육으로 운영하면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독립군과 민족운동의 인재 양성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이상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떠나자 재정난에 부딪히고, 일경의 감시와 방해가 강화되면서 이듬해 폐교되었다.

서전서숙은 짧은 역사에도 만주지역 민족교육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교사였던 박정서가 김약연과 함께 명동서숙을 세워 계승했으며 그 후 많은 신식교육 기관이 설립되어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박영희 시인은 항일 운동가들이 교육을 얼마나 중요시 여겼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주 땅을 다녀보면 항일 운동가들이 교육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가는 곳마다 알 수 있어요. 어차피 당장 싸워서 일본을 이기지 못한다. 우리가 부족해서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에 일본에 맞설 수 있는 지식과 힘을 쌓아야 한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무관학교와 일반학교를 세우기 시작합니다.

당시 항일 운동가들이 교육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면 조선족 사회는 끝났을 거예요. 교육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계속해서 역사를 만들어 내면서, 오늘이 있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교육은 무섭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누군가 후세들에게 전해 줘야 되고 이어줘야 합니다. 그게 교육의 역할이지요."

용정 시내 항일 유적지들을 돌아보고 숙소가 있는 연길로 돌아와 돌솥밥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숙소에 도착하니까 저녁 7시 40분이었다. 그대로 잠들고 싶었지만, 속옷도 빨고 샤워도 했다. 호텔을 나와 이틀 전에 들렀던 휴대전화기 가게(국보통신)로 향했다. 그동안 촬영한 사진을 USB에 저장하기 위해서였다.

슈퍼에 들러 음료수를 사 들고 가게에 들어서니까 '청년사장'이 반갑게 인사하며 컴퓨터를 내주었다. 고마웠다. 다음날에는 하얼빈으로 이동할 거라고 했더니, 찜을 해서 보관하고 있다며 지난 3월 17일 기사 '안중근 의사, 안중근 장군으로 바꾸자!'를 보여주며 웃었다. 그는 안중근 의사를 무척 좋아하고 존경한다고 했다.

다음날(16일) 일정이 아침 6시 수상시장에 다녀오는 것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해서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또 들르지요"라고 인사를 건네고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덧붙이는 글 | 현지 가이드와 박영희 시인의 설명, ‘2010만주기행’ 자료집을 참고했습니다.



태그:#일송정, #선구자, #용두레우물, #용정중학교, #서전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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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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