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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가는 비가 오락가락한다. 요 며칠은 가을날씨치고 엉망이다. 더욱 주말마다 비가 오다시피 하여 나들이에도 차질이 많다.

 

산행이 계획되었던 터라 옆집아저씨는 우산을 받쳐 들고 우리 집에 오셨다. 어릴 적 소풍가는 날에 비가 오면 이른 아침부터 비 멈추기를 바라면서 서성이듯 아저씨는 하늘을 쳐다보고 또 쳐다보신다.

 

"이놈의 날씨, 오늘은 좀 참아주지 하늘이 먹구름일세 그려!"

"그래도 한쪽 구석은 벗어지고 있는데요, 뭐. 산행은 진행하죠?"

"그러자구. 몇 주째 산에 못 오르니까 몸이 근질근질 해!"

"그렇죠? 날이 개면 하점면에 있는 봉천산에 갑시다!"

 

아저씨는 파란 하늘이 드러나는 쪽의 하늘을 응시한다. 하늘이 벗어지는 느낌에 희망을 품으시는 표정이다.

 

"그럼, 이따 출발하게 서둘자구. 새집할아버지께서도 봉천산에 간다면 좋아하실 거야!"

 

나는 산행에서 먹을 간식거리를 준비해야겠다. 아내가 감자를 찌고, 사탕봉지며 매실차도 준비해 배낭에 챙겨준다. 산행을 할 때면 늘 가지고 가던 막걸리는 길이 미끄러울 것 같아 챙기려다 말았다.

 

"당신, 새집할아버지께선 연로하시니까 오늘 같은 날은 막걸리는 안 돼요?"

"그렇지 않아도 막걸리는 뺐으니까 염려 붙들라고!"

 

금세 반짝 햇볕이 났다. 어르신들은 벌써 우리 집 마당에 와 계신다. 옆집아저씨 손에는 집에서 딴 사과 한 봉지가 들려있다.

 

새집할아버지께서 "비는 저 멀리 갔어! 그래도 소나기삼형제라고 하니 우산을 챙겨야지!"라며 길을 재촉하신다.

 

소나무숲길이 있는 아름다운 봉천산

 

강화군 하점면에 봉천산은 해발 291m로 나지막한 산이다. 정상에는 고려 때 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평안을 하늘에 빌려고 쌓은 봉천대가 있다. 봉천대는 처음에는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던 곳이었으나 조선시대 중기에 이르러 봉화를 밝히는 봉화대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곳 봉천산에는 5층석탑(보물 10호)과 석조여래입상(보물 615호) 등 고려시대 문화재가 몇 점 남아있다. 봉천산 들머리에 도착하자 하늘이 또 꾸물꾸물한다. 새집할아버지의 걱정스런 표정에 옆집아저씨가 말을 꺼낸다.

 

"이런 날 산 타기가 되레 수월해요. 시원하고 좋지요. 걱정 말고 산에 오릅시다."

"비도 비지만 봉천산에서 북녘 땅을 봐야하는데 앞이 가로 막힐까봐서 그러지!"

 

실향민인 할아버지는 봉천산 정상에서 북녘 산하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내보이신다.

 

'북녘 땅이 보이는 봉천산 등산길'이라 쓰인 들머리문이 우리를 반긴다.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뻗은 소나무숲에 들어서자 마음이 편안해진다. 비에 젖은 소나무숲길이 정말 신선하다. 며칠 많이 내린 비로 인해 계곡의 물소리가 거친 숨소리를 내고 흐른다.

 

소나무숲길에서 여유 있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가느다란 빗줄기가 기어이 쏟아진다. 빗줄기 정도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두 분 어르신은 묵묵히 발길을 옮기신다. 땀이 비에 섞여 이마를 타고 내린다. 입술에 닿은 빗물이 짜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 산림욕장으로 안성맞춤인 소나무숲길이 끊어져있는 게 아닌가! 옆집아저씨가 혀를 끌끌 차신다.

 

"어! 이거 뭐야? 이곳에 48번국도 확장공사를 한다더니 봉천산을 잘라먹고 있네 그려! 이곳을 비켜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까! 수십 년을 자란 소나무숲을 파헤친 몰골이 좋아보이지가 않는구먼!"

 

울창한 멋진 소나무숲을 허물다니! 볼썽사나운 모습이 못내 아쉽다.

 

능선을 따라 발아래 펼쳐지는 산하가 그만이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진다. 약수터에 오르니 약수가 폭포수가 되어 흐른다. 목을 축이는 것을 포기하고, 손으로 물을 받아 얼굴을 씻어내니 너무도 시원하다.

 

"자! 정상에 오르면 정자가 있으니 소나기는 피할 수 있을 거예요. 빨리 오릅시다."

 

지금부턴 가파른 코스가 기다린다. '능선코스'와 '계곡코스'의 갈림길이 나온다. 망설일 필요도 없이 우리는 '능선코스'를 택했다. 아무래도 빗길에는 능선을 타고 오르는 것이 안전할 것 같아서다.

 

약수터에서 5분 정도 오르니 시야가 확 트이는 능선에 도달했다. 다시 하늘이 맑아지며 비가 멈췄다. 다행이다. 산행에 오르며 한 사람 한 사람 쌓은 돌탑이 있다. 새집할아버지께서 돌탑에 정성스레 돌 하나를 올려놓는다. 산행을 마칠 때까지 하늘이 활짝 개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 같다.

 

이제부터 능선을 따라 걷는데, 발아래 펼쳐진 산하가 그림 같다. 바윗길도 예쁘다. 내딛는 발걸음에 여유가 있다. 힘든 줄 모르는 능선길이 참 좋다.

 

마지막 언덕에 올라섰다. 봉천대가 멋지게 서있다. 자연석으로 차곡차곡 쌓은 제단이 오르면서 좁아진다. 한쪽 면만 보면 사다리꼴이다. 균형 잡힌 봉천대에 담쟁이 넝쿨이 친구가 되어 놀아준다.

 

봉천대에서 정상 봉천정 정자까지는 코앞이다. 정상 주변의 경관이 너무도 좋다. 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고려산, 뒤로는 혈구산, 마니산이 펼쳐진다. 서쪽으로는 바둑판 모양의 벌판의 색깔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벌판 너머 서해바다도 눈에 다가온다. 산 아래 올망졸망 모여 있는 마을들이 정겹다.

 

봉천산 정상에서의 또 다른 묘미는 무엇보다도 북녘 땅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흐릿한 날씨 탓에 북녘 땅이 가까워지듯 멀어지듯 시야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예성강 너머 북녘의 낯선 풍경들이 뚜렷하고, 개성 송악산과 황해도 연백의 붉은 산까지 살필 수 있다.

 

"아, 북에 있는 내 형제들!"

 

이북이 고향인 새집할아버지께서 북쪽을 바라보시며 눈길을 떼지 못한다.

 

"이번 추석에 북에 있는 내 형제들을 만나 차례를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형제들, 이번 큰비에 피해는 없는지? 부모님 산소에 벌초는 했을라나! 죽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죽어야할 텐데…."

 

할아버지는 열아홉에 혈혈단신 남으로 내려왔다. 북에 두고 온 형제들이 사무치게 그립다고 한다. 추석 명절이 다가오니 그 마음이 더 하신 것 같다. 이산가족 면회 신청을 한 지가 몇 년이 되었는데 함흥차사라고 한다. 이번 추석에 이산가족 상봉을 북측이 제의하였다고 하여 기대를 하는 모습이다.

 

비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은 북녘 산하를 주시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할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아저씨는 나더러 짊어지고 온 배낭을 풀란다.

 

"할아버지, 여기 싸온 간식을 듭시다. 감자가 따끈따끈 식지 않았네요.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형제들 잘 살고 있을 거예요!"

 

비 내린 뒤의 맑고 깨끗한 산하. 하얀 안개구름이 산허리를 감싸고 있다. 그림처럼 펼쳐지는 봉천산의 아름다운 풍광이 북녘 땅을 한없이 바라보시는 할아버지의 허허로운 마음을 달래주는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지난 9월 11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봉천산, #하점면, #봉천대, #실향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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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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