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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민주당 전당대회 '컷오프'를 치른 뒤 만난 정동영 상임고문은 상기된 표정이었다.

 

정 고문이 컷오프에서 떨어지리라는 예상은 거의 없었지만, 1차 관문을 통과했다는 안도감이 표정에서 묻어났다. 그와 문답을 나누는 동안, 특유의 저돌적인 면모가 살아났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실패한 대선후보'라는 당 안팎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드시 고지를 점령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처럼 보였다.

 

정 고문은 이날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빚쟁이로서 당과 국민에게 진 빚을 갚고 싶다"고 말했다. '한번 대선에 실패한 후보가 왜 돌아왔느냐'는 반문에 대한 답이다. 그는 "민주당이 살려면 전당대회가 활력이 있어야 한다"며 "내가 뛰어들면서 긴장감이 올라간 것 아니냐"고도 했다.

 

"여러 차례 반성문을 썼지만, 진정성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는 질문에는 "반성문을 안 쓴 사람들도 있다"는 뼈 있는 대답으로 맞받았다.

 

10년 전 민주당 정풍 운동의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486세대와 대척점에 서 있는 정 고문은 세대교체론보다 '조화'에 무게를 뒀다. "당의 노장청이 조화를 이루는 게 시너지 효과가 크고, 그게 민주당의 전통"이라는 것이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대립하고 있지만, 그는 당 대표가 될 경우 "486세대를 연합정치 전면에 내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부유세 도입하면, MB 공정사회도 진정성 있다고 본다"

 

 

이날 인터뷰에서 정 고문은 '부유세 도입' 전후를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썼다. 그는 "부유세는 당론 반대"라는 정세균 전 대표의 주장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라고 적극 반박했다. "민주당에서 공식적으로 부유세를 놓고 당론으로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또 10년 전 민주노동당이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부유세를 다시 들고 나온 이유에 대해 "당시에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시장근본주의 처방이 필요했다"면서 "지금은 진짜 공정사회로 가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만약 부유세를 도입한다면, 이명박 정부의 공정사회도 진정성이 있다고 본다"고까지 말했다. 부유세 도입이 사회양극화 해소 '의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정 고문은 "당 대표가 되면 민주당 당헌에 '역동적 복지국가'라는 문구를 집어넣을 것"이라며 부유세 도입을 강하게 추진할 뜻을 거듭 밝혔다. 그는 또 민주-진보 대통합과 관련해 "선거 막판의 단일화는 감동도 없고 승리할 수도 없다, 정권을 준비하려면 2년도 짧다"고 말해 올해 말부터 본격적인 통합 노력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정 상임고문과 나눈 일문일답.

 

- 지난 9일 컷오프 결과는 어떻게 생각하나.

"486의 약진이 보인다. 민주당에 변화가 있다는 거다. 10년 전, 2000년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나도 15명 나왔을 때 뛰어 들어갔다. 젊은 정치인들은 그게 맞다. 그래야 젊은 주자들의 대표성이 만들어진다. 지금 세대교체 요구도 있지 않나. 송영길, 안희정, 이광재의 승리가 증명하고 있다. 나는 백원우, 이인영, 최재성이 통과한 컷오프 결과를 매우 긍정적으로 본다. 떨어진 분들도 안타깝게 생각한다. 탈락하신 분들도 민주당의 보물이다."

 

- 거의 3년 만에 당 지도부 입성을 기대하고 있다. 감회는.

"대선 후보 이후 3년 동안의 성찰과 반성의 시간이었다. 빚쟁이로서 당과 국민에게 진 빚을 갚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다."

 

- 왜 정동영이 지금 뛰어들 수 밖에 없었는가를 묻는다면.

"민주당이 살려면 민주당 전당대회부터 활력이 있어야 한다. 내가 뛰어들면서 긴장감이 확 올라간 것 아닌가. 10년 전 민주당 전당대회는 집권 여당으로서 최초의 경선다운 경선이었다. 그때 시작된 당의 에너지가 2002년 대선 승리 에너지로 분출됐다. 10년이 지난 올해 10월의 전당대회 에너지도 2012년 대선 승리로 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리라고 본다."

 

- 10년 전에는 세대교체 주역이었지만, 지금은 세대교체의 대상이 된 것 같은데.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때 내가 새로운 물결을 밀고 가는 주체였다면, 지금은 새로운 물결을 요구하는 후배들과 경쟁하고 협력하는 상황이 됐다. 그런 의미에서 집단지도체제가 의미있는 것이다."

 

- 컷오프 결과를 긍정적으로 본다고 했지만, 사실은 486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갖고 있다. 당 대표가 되면, 경쟁한 이들을 중용할 수 있겠나.

"486 주자들이 특히 연합정치의 전면에서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젊은 주자들의 진보성과 개혁성이 통합과 연대에 중요한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2000년 8월 전당대회 경험으로 비춰볼 때, 당의 노장청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게 시너지 효과가 컸다. 그게 민주당의 전통이다."

 

"억울함 호소하는 민원인들 발길 끊겨... 가슴이 철렁했다"

 

- 정 고문이 벌써 여러 차례 반성문을 썼다. 하지만 여전히 진정성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반성문을 썼지만, 반성문을 안 쓴 사람도 있지 않나. 사실 그 반성문은 내가 미국에 있을 때부터 준비하던 책의  초록 일부다. DJ 5년 동안 젊은 주자로서 내 역할에 비하면, 노무현 정부 5년간 내 역할은 미약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그 결과로 도래한 격차사회, 그것을 만든 정책과 노선, 이것을 꿰뚫고 제동을 거는 노력이 없었다. 대표적인 게 한미FTA가 아닌가. 좌회전 깜빡이 켜고 우회전하려는데, 그때 관료 중심의 시장중심주의 권력에 대한 경고음을 내고 적극적인 정부의 역할을 주문했어야 했다. 그렇지 못한 데 대한 참회록이 그 책이다."

 

- 참회록은 계속 쓰는 중인가.

"그렇다. 대선에 실패한 뒤 3년 동안 내 질문은 '왜 떨어졌느냐'였다. 물론 능력이 모자라서였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성찰해 보고 싶었다. 대선 후 9개월 뒤 미국 월가가 무너졌다.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나는 왜 불과 9개월 뒤로 임박한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미국 월가의 붕괴도 상상하지 못했나…. 어쩔 수 없다면서 시장중심주의를 수용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과 노선에 대한 선명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고 끌려갔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참회록을 쓰게 된 동기다."

 

- 지난 2년간 민주당을 냉정히 평가한다면.

"민주당에 오래 근무한 수위 한 분이 하신 말로 답을 대신했으면 한다. 그 분 말이 '언제부턴가 민주당이 변했다,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민원인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민노당에는 찾아가도 민주당에는 안 온다, 노동자·농민·철거민이 피눈물 나는 사연 호소하면서 억울함을 외치는 민주당을 본 지 오래됐다'고 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또 '머리때 매는 사람들은 공천이 잘못됐다는 사람들 뿐'이라고도 말하더라. 지금 민주당을 가장 정확히 짚어낸 것이라고 본다."

 

- 손학규·정세균 전 대표에 대한 평가는 없나.

"지난 3년간 민주당은 손학규, 정세균이 이끌어 왔다. 손 전 대표 때는 대선 참패의 쓰나미가 덮쳤다. 총선은 어쩔 수 없었다. 홍수 속에서 살아남기 급급했다. 그 뒤에도 마찬가지였고, 두 분의 공이 크다. 하지만 민주당 수위 아저씨의 말을 빌리자면, 민주당이 서민을 대변하는데 한나라당보다 뒤진다는 게 문제다. 지금 중산층은 서민으로, 서민은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민주주의와 남북관계 회복, 지식경제의 도래, 외환위기 극복 등 많은 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현재의 위기에 대답을 내놔야 한다. 그러기 위해 반성문을 쓰자는 거다."

 

"'역동적 복지국가' 당헌에 명시, 연합정치 고속도로 뚫릴 것"

 

- 부유세 도입을 들고 나왔다. 민주당 당론은 부유세 반대 아닌가.

"당에서 공식적으로 부유세를 놓고 당론으로 이야기한 기억이 없다. 당론 반대는 사실이 아니다. 당원들은 80%가 부유세 도입 지지한다. 정세균 대표도 본인이 반대하는 것이지, 당론 반대는 아니다. 10년 전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가 부유세 들고 나왔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그때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시장근본주의 처방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진짜 공정사회로 가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헌법 119조에도 경제민주화조항이 있다. 진짜 공정한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부유세를 도입해야 한다. 만약 이명박 정권이 부유세를 도입한다면, 나는 공정한 사회의 진정성이 있다고 본다."

 

- 정 고문의 말처럼, 부유세 도입 주장은 민노당의 대선공약이었다. 너무 갑작스럽게 추진하는 것은 아닌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틀, 정책과 사고로는 현재의 격차사회를 뛰어넘을 수 없다. 새로운 비전이 요구된다. 나는 역동적 복지국가가 국민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복지를 말하면서 재원을 얘기하지 않으면 거짓이다. 부유세 자체는 큰 액수는 아니다. 5~10조원 사이라고 본다. 하지만 설계에 따라 달라진다.

 

부유세를 도입하면 무엇보다 지하경제가 줄어든다. 이미 우리 사회는 실명제가 실시되고 있다. 여기에 부유세를 도입하려면 모든 주식, 은행, 부동산 거래가 실명으로 가족단위 별로 투명하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고서화, 보물, 양도성 채권, 무기명 채권 등 고가품 거래도 마찬가지다. 지하경제가 10%만 줄어들어도 100조 원이 햇볕에 드러난다. 부유세 도입 과정 자체가, 지하경제에 햇볕을 내려쬐는 것이다."

 

- 당내에서도 논란이 있는데, 과연 민주당이 부유세를 도입할 수 있겠나.

"그것을 극복해야 정권을 잡는다. 당내 전문가 논의, 광범위한 지방단위의 논의, 정책위에서의 검토 등 단계를 밟아나갈 것이다. 되고 안 되고는 리더십의 문제다. 나는 역동적 복지국가를 민주당 당헌에 박자는 것이다. 또 그렇게 되면 가치연합으로 민주진보 연합정부의 고속도로가 뚫린다. 민주노동당이 부유세 원조 아닌가. 이번 6·2 선거 때 무상급식도 민주당이 받아들여서 연대, 연합이 이뤄지지 않았나. 복지동맹, 평화동맹으로 민주정부 3기를 만들자는 것이다."

 

"당 대표 되면 가장 먼저? 용산 유가족과 점심 먹고 싶다"

 

- 민주당 내 민주진보연합 수권준비위원회를 만들자고 했다. 단일정당화 수순인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놔야 한다. 먼저 논의를 하기 위해 당내에 통합과 연대를 위한 추진기구를 즉각 설치하고, 시민사회-야4당과도 상설협의기구를 만들도록 하겠다. 명칭은 어떤 것도 좋다."

 

- 민주-진보 통합은 어느 시기까지 마지노선으로 보는가.

"시기를 점칠 수 없다. 하지만 선거 막판의 단일화는 감동도 없고, 승리할 수도 없다. 정권을 준비하려면 2년도 짧다. 민주당이 문호를 활짝 열고 체질을 바꿔야 한다. 지난 10년간 언론, 노동, 환경, 지역 등 각 단체의 역량과 인재가 많이 성장했다. 한나라당 정권을 종식시키려면, 참여하라고 얘기해야 한다."

 

- 통일부장관을 지냈는데, 대북 쌀 지원은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보나.

"좀 통 크게 했으면 좋겠다.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하고, 우리가 먼저 증오와 적대를 버려야 한다. 증오와 적대감을 갖는다고 북한이 그냥 넘어가나? 주려면 좀스럽게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쌀 적정 보관량이 900만 가마니 정도인데, 지금 창고에 1900만 가마니가 들어있다고 한다. 또 곧 추수다. 수백만 가마니를 야적할 수밖에 없다. 그 쌀을 줘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시기를 놓치지 않고 대북 결단을 하면 남북관계가 뒤집어진다. 남한이 북한의 부족한 식량을 메워주고, 남북경제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민주당이 정권을 되찾아야 할 이유가 그렇다."

 

- 당 대표가 되면 가장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누군가.

"용산 유가족들 모시고 점심 대접을 하고 싶다. 재판받는 사람들 면회도 한번 가보고 싶다."


태그:#정동영, #민주당, #전당대회, #부유세, #연합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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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부 기자입니다.

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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