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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한도전> 프로레슬링 특집의 촬영기간은 그 어느 장기 프로젝트보다 길었다.
<무한도전> 프로레슬링 특집의 촬영기간은 그 어느 장기 프로젝트보다 길었다. ⓒ MBC 화면캡쳐

"근데 이거 방송 언제 나가는 거니?"

"모르겠어."

"한 넉 달 되지 않았어, 시작한지? 이거 일단 해보고 안 내보내는 거 아냐? 재미없어서?"

"해보고 안 내보내는 걸 이렇게 찍어? 해보고 안 내보낼 거면 적당히 찍어야지."

 

우려와 푸념이 반씩 섞인 정준하의 질문에 웃으며 대답해주는 유재석의 목소리도 개운하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매년 진행되는 달력 촬영과 장기 프로젝트를 경험하며 기다리는 데는 이골이 난 그들이었지만 이번처럼 기약없는 촬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장난'으로 시작한 프로레슬링 그리고 상상 이상의 고통

 

첫 촬영일, 2009년 7월 2일. 첫 방영일, 2010년 7월 3일. 정확히 1년이 걸렸다. 지난 11일 '무한도전'은 프로레슬링 특집 마지막 이야기를 내보냈다.

 

한 여름에 시작한 <무한도전>의 프로레슬링 특집은 하얀 눈이 세상을 뒤덮은 겨울을 지나고, 방송국이 들썩이는 총파업을 건너, 다시 매미가 우는 여름이 되어서야 전파를 탔다. 그 사이 전진은 나라의 부름을 받아 하차했고, 길은 고정 멤버가 됐으며, 소집해제를 마친 하하는 복귀했다. 실로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프로레슬링 특집은 디데이(D-Day)로부터 통상 3개월 정도 여유를 두고 시작했던 예년의 장기 프로젝트와는 달랐다. 공인된 대회나 시합에 출전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목표로 한 디데이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레슬링 특집은 이전의 다른 장기 프로젝트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비장하거나 무거운 마음을 갖고 시작하지 않았다.

 

댄스스포츠나 에어로빅, 봅슬레이와는 달리 프로레슬링은 멤버들에게 친숙한 스포츠였다. 프로레슬링에 대한 유년시절의 추억을 하나쯤은 갖고 있던 멤버들은 처음에는 장난스럽게, 좋아했던 프로레슬러들의 의상과 그들의 대표기술을 어설프게 흉내내며 사각의 링 위에서 말 그대로 '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장난스러움도 잠시, 멤버들은 곧 그 어느 도전보다 힘겨운 사태에 직면한다. 프로레슬링 스승으로 '삼초고려(손스타가 <무한도전> 멤버들의 프로레슬링 특집 참여 제안을 받고 승낙할 때까지 고려한 시간이 3초라는 의미)'한 손스타(체리필터)로부터 기본이 되는 낙법을 시작으로 하나둘 프로레슬링 기술을 배워나가기 시작하면서, 멤버들은 신체에 가해지는 상상을 초월한 고통에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져 갔다.

 

프로레슬링은 가혹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멤버들을 극한으로 몰고 갔다. 에어로빅이 멤버들에게 체력적 한계를 느끼게 했고, 봅슬레이가 멤버들에게 정신적 한계를 느끼게 했다면, 프로레슬링은 체력과 정신력 모두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도전이었다. 멤버들은 하나의 게임을 소화해내기 위한 최소한의 체력과, 기술을 받아낼 때 온몸에 느껴지는 고통을 참아내기 위한 정신력을 갖춰야 했다.

 

댄스스포츠나 에어로빅은 무경험자인 멤버들을 배려해 프로그램의 난이도를 낮출 수 있었다. 그것은 그 둘이 심사위원에게 보여지고 난이도에 따라 채점당하는 스포츠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프로레슬링은 심판에게 보여주고 평가받는 스포츠가 아닌,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일종의 '쇼'다. 때문에 멤버들의 수준을 고려한다고 해도, 그들이 구사하는 기술의 난이도는 어느 정도 이상은 되어야 했다.

 

한 편의 잘 짜여진 소설처럼 전개된 <무한도전>

 

 노홍철과 길의 한심한 모습에 끝내 폭발하는 손스타.
노홍철과 길의 한심한 모습에 끝내 폭발하는 손스타. ⓒ MBC 화면캡쳐

멤버들이 고통 속에 이를 악물고 기술을 익혀나가는 과정에서, 프로레슬링 특집은 전에 없던 서사를 갖추기 시작했다. 기술을 습득하면서 멤버들은 두 부류로 나뉘게 됐다. 비교적 기술을 빠르게 흡수해 자기 것으로 만든 정형돈, 정준하, 유재석과, 그렇지 못한 박명수, 노홍철, 길. 멤버들이 이렇게 두 그룹으로 나뉘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이들과 손스타 사이에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

 

고도의 신체능력과 담대한 배짱이 필요한 프로레슬링에서 우등생과 열등생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길은 고통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기술을 받아내지 못했고, 노홍철은 몸치에 가까운 신체능력과 두려움에 겁을 먹었으며, 박명수는 원래 약했던 몸에 부하가 걸리기 시작하면서 능동적으로 나서길 주저했다.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손스타와 유재석의 마음은 시합 날이 다가올수록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파워슬램'을 잘한다며 기세 좋게 나선 길과 노홍철은 기본자세조차 잡지 못하고 허둥댔고, 손스타는 답답한 마음에 "1년 동안 뭐한 거냐?"며 소리쳤다. 미안한 마음에 고개만 숙이고 있는 이들을 유재석은 "지금 이렇게 배꼽을 잡고 웃는 건, 우리가 '경기 땐 잘하겠지'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기 때문인데, 경기 때도 이렇게 하면 너희 정말 욕먹어. 1년을 준비했는데…"라며 더 따끔하게 혼을 냈다.

 

큰 문제나 별 탈 없이 흘러가는 듯 보였던 프로레슬링 특집은 레슬링 열등생 멤버들로 인해 위기를 맞았다. 그리고 그 위기는 시간이 갈수록 커져 멤버들은 물론 그 과정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의 마음까지 졸이게 만든다. 노홍철은 대회가 코앞인데도 경기의 순서를 외우지 못하고, 박명수는 몸이 아파 가장 중요한 기술의 연습을 거부한다.

 

결국 손스타가 열등생 3인방을 대회에서 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됐을 때 쯤, 예상치 못했던 최악의 사태가 찾아오니, 바로 정형돈과 손스타가 부상을 당한 것. 정형돈은 뇌진탕으로 더 이상 연습을 진행할 수 없었고, 손스타는 갈비뼈에 금이 가고 말았다. 설상가상 대회 당일에는 경기 시작 2시간을 앞두고 정준하가 허리 통증을 호소하고 나서, 프로레슬링 특집의 위기는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무한도전>, '진정성' 담은 리얼 버라이어티의 진수를 보여주다

 

 유재석과 손스타가 팀을 이뤄 정준하를 공격하고 있다.
유재석과 손스타가 팀을 이뤄 정준하를 공격하고 있다. ⓒ 변광재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그리고 결말. 마치 시청자들은 한 편의 잘 짜인 소설이나 드라마를 본 듯한 기분이 휩싸인다. <무한도전> 멤버들은 장난스럽게 프로레슬링에 발을 들여놓았다(발단) 진지해져가고(전개), 열등생 무리가 생겨나 갈등이 싹텄으며(위기), 부상이 속출하는 등 악재가 겹쳤으나(절정), 결국 시합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결말).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출렁이게 만들었던 프로레슬링 특집.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계획된 시나리오가 아니라, 말 그대로 '리얼'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점이다. 멤버들이 스스로를 육체적, 정신적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도출되고 완성된 이 완벽한 서사는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뚜렷한 명암을 갖고 있다. 말 그대로 리얼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살아 있는, 날 것과 같은 예능을 보는 신선함에 휩싸이지만, 반대로 리얼하기 때문에 이전의 잘 짜인 대본에 의해 만들어진 예능만큼의 재미는 일정부분 포기해야 했다. 감독의 연출과 작가의 대본이 주는 영향력이 최소화된 상황에서 출연진이 자율적인 의지를 갖고 능동적으로 움직이면서 만들어지는 예능, 그것이 리얼 버라이어티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만드는 제작진은 늘 '웃음'과 '재미'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그것도 '리얼'함이 바탕에 깔린 웃음과 재미를. 작위적이지 않고, 일부러 만들지 않은 진짜 웃음을. 이제 시청자들의 눈높이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올라갔다. 그들은 예능을 보면서도 항상 의심한다. '웃기면 그만 아니냐'는 변명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시청자들은 '리얼 버라이어티쇼'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유재석이 관객들을 향해 "여러분들의 함성이 필요합니다, 나를 응원해주세요"라고 말하고 있다.
유재석이 관객들을 향해 "여러분들의 함성이 필요합니다, 나를 응원해주세요"라고 말하고 있다. ⓒ 변광재

과거 <패밀리가 떴다>의 대본 논란이나 최근 <1박2일>에서 불거졌던 작위성 논란은 모두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시청자들은 리얼 버라이어티의 '리얼'이 100%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다. 때문에 언제라도 의심이 가는 대목이 있으면 그들은 주저 없이 의혹을 제기하고, 제작진의 해명을 요구한다. 물론 이에 대처하는 제작진의 대응 또한 한결같다.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리얼'이 훼손되는 순간, 방송의 생명 또한 끝나기 때문이다.

 

<무한도전>의 장기 프로젝트에 멘토로 등장했던 사람들은 언제나 도전이 끝나면 "TV로 볼 땐 이렇게 열심히 하는 줄 몰랐다"고 말한다. 이번 프로레슬링 특집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 멘토들이 느꼈던 그 마음 그대로를 시청자들도 느낄 수 있었던 것. 어떤 연출이나 작위적 설정 없이, 순수한 열정으로 온힘을 다해 목표를 향해 나가는 <무한도전> 멤버들의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진정성을 느끼게 된다.

 

그런 진정성은 지금까지 그 어떤 리얼 버라이어티쇼도 갖지 못한 것이었다. <무한도전>은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효시로 숱한 후발주자들을 양산해냈고, 이제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기존의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입으로만 떠들고 있었던 진정성을, 온몸으로 부딪친 끝에 얻어냈다. 이제 <무한도전>의 웃음과 재미에 진정성을 논하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새 역사가 쓰이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무한도전#프로레슬링#손스타#유재석#정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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