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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역사적 초상〉
▲ 책겉그림 〈예수의 역사적 초상〉
ⓒ 영림카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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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근간으로 하는 종교다. 기독교는 예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을 토대로 세워진 종교다. 그만큼 예수 없이는 기독교를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수를 둘러싼 논쟁은 지난 2000년 동안 연이어 왔다. 이른바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논쟁이 그것이다.

성령을 통해 잉태된 동정녀 탄생을 비롯해,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인 사건, 파도와 풍랑을 잠잠케 하고 또 물 위를 걸으신 사건,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은 그 분이 3일만에 다시 살아난 사건 등은 예수의 신성을 부각시킨다.

예수의 인성에 관한 초점은 무엇인가? 금식 후 배고파 하신 모습, 나사로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린 모습,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보고 상을 엎으시면서 분노하시는 모습, 그리고 십자가의 고통 앞에 절규하는 모습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인간이 느끼는 희노애락을 모두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인성을 지닌 예수를 뛰어넘어 더 인간적인 예수에 초점을 맞춘 이들이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제인 샤버그와 스퐁 주교다. 샤버그는 〈The Illegitimacy of Jesus〉라는 책을 통해, 스퐁 주교는 〈Born of a Woman〉이라는 책을 통해 예수가 사생아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로마 병사들이 반란 소굴인 세포리스를 약탈할 때 그곳의 소녀 마리아도 겁간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출생도 그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요 그리고 영화감독인 폴 버호벤의 〈예수의 역사적 초상〉(폴 버호벤 저, 영림카디널 펴냄)도 그런 흐름에 서 있다. 그는 〈로보캅〉〈토탈리콜〉〈원초적 본능〉〈블랙북〉을 연출했다. 그만큼 예수를 둘러싼 신성은 그의 영역 밖에 있다. 수학과 과학적인 지식으로는 예수의 신성을 용납할 수 없는 이유다. 인간의 논리적인 사고로 어찌 예수의 신비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물론 이 책은 거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까무러칠 정도의 숭배와 과도한 신성함이 깃든 복음서의 외피를 벗겨내려고 한다. 이른바 복음서 속에 들어 있는 기적과 치유와 부활 등의 신성을 벗겨내고,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인간 예수를 밝혀내는데 집중한다.

하지만 그 역시 너무 지나쳐 있다. 그 흐름이 제인 샤버그와 스퐁 주교, 그리고 로버트 펑크(Robert W. Funk)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버호벤이 영화감독이듯이 그는 일반 대중들의 지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뭔가 획기적인 반전과 논리적인 명쾌함을 도출해 내는 게 그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에게 있는 기적과 치유와 부활 사건 등의 신성을 기적 사화와 정치적인 정보력으로 환원시킨 이유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나사렛 출신의 예수, 인류의 구원자가 아닌 독립 운동가 수준의 예수, 눈에는 눈의 동태복수법을 뛰어넘어 새로운 사랑의 규범을 궁리해 낸 예수로 재배치한 내용이 그것이다.

특별히 눈에 띄는 한 대목이 있다. 예수가 사생아였다는 것, 예수가 퇴마사였다는 것은 인간 예수를 밝히려는 사람들을 통해 많이 접한 내용이다. 그런데 예수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것을 두고 색다른 것을 추가한다. 이른바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갈릴리 바닷가에서 잡은 물고기를 군중들이 손에서 손으로 날랐다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의 제자들이 기적사화로 가미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건은 그것이다. 예수가 홀로 산으로 떠난 것. 군중들은 그때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룬 예수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하지만 예수는 산으로 떠난다. 그에 대해 버호벤은 예수가 세례 요한처럼 숙청당하지 않으려고 도망친 것이라고 말한다. 곧이어 예수가 풍랑을 잔잔케 하고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연출한 것도, 실은 제자들이 예수를 띄우기 위해 불과한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모든 일련의 주장들은 예수를 정치적인 인물로 묘사한 것에 다름없다. 부조리한 사회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해방의 역사를 쓸 수 있는 홍길동이나 체게바라 같은 인물전이 바로 그것이다. 이 땅에는 그런 역사를 꿈꾼 이들이 많았다. 예수도 그 당대의 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아무리 방대한 자료와 명쾌한 논리를 동원하여 드라마틱한 예수를 밝혀내려 해도 그게 과연 타당한 것일까?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면면은 그가 써내려간 10가지 주제로 한정될 수 있는 것들이던가. 역사적 예수는 그가 재구성한 예수의 면면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풍부하지 않던가.

그리고 중요한 게 있다. 어느 누가 감히 제 목숨을 내 놓으면서까지 해방자가 되려고 하겠냐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정치적인 해방을 목적에 둔 게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단절을 잇고자 함이었다. 인간의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이 그것이다.

더욱이 예수의 신성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 누구도 예수의 기적과 치유와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다. 과학과 논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것으로 가늠할 수 없는 기적과 치유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예수는 설득력 있는 우화들을 창조하고, 윤리에 대한 새로운 규범을 궁리해냈다. 만약 어떤 무엇이 기적으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현실에 대해서 잘못 판단한 예수의 관점이 지난 2천 년간 가장 중요한 윤리적인 부활을 이끌었다는 것이 될 것이다."(290쪽)

아마도 이것이 이 책을 읽는 유익함이 아닐까? 이 책은 예수가 이야기한 새로운 우화들과 새로운 윤리적 규범들을 더 세밀하게 추적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예수의 신성이나 인성과는 관계없다. 오직 나사렛 출신의 한 인간 예수의 초상화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역사적 초상 - 나사렛 사람 예수의 삶에 대한 재구성

폴 버호벤 지음, 송설희 옮김, 영림카디널(2010)


태그:#역사적 예수, #예수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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