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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당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그럼 그는(그곳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요. 웬 쓸데없는 질문이냐고 하실 겁니다. '쓸데없는' 궁금함이 나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나의 기원, 그리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어디서 왔을까 하는.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냐고 하는 분들 중에 상당수는 단군할아버지의 기원을 말할 것이 뻔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흔치 않은 역사 교과서에서는 그분, 단군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는 모두 단군에서 비롯되었다고 말입니다.

성경 창세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주 할망은 제주도에서 벌어진 '세상의 탄생' 비화다.
 성경 창세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주 할망은 제주도에서 벌어진 '세상의 탄생' 비화다.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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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경보다 훨씬 전에 존재했다는 '금속활자'에 대한 뉴스를 접했습니다. 아직 학계가 동의한 상태는 아닌 것 같더군요. 동의를 받으면 정설이 된다는데 그럼 역사, 과거는 현세의 우리가 '인정'하는 객체로 존재하는 것이로군요.

아이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옛날이야기를 해 주고 싶습니다. 디즈니 캐릭터가 등장하는 그림책이나 그림형제의 동화가 아닌 좀 더 '신선한 것'으로 말이죠. 머리를 굴려봐야 나올 게 없습니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은 세계동화전집, 이솝우화 등이었으니 거기서 벗어나긴 힘든 겁니다.

어느 날은 하도 졸려서 생각이 닿는 대로 캐릭터와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멍'이라는 캐릭터에 숲과 곤충, 동물들과 주변인들을 잔뜩 버무려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말이죠. 얼마 전까지는 내 캐릭터, 어멍이 내는 어멍어멍 소리에도 까르르 웃던 아이가 요즘은 심드렁합니다. 빈곤한 상상력이 긴 이야기를 흥미롭게 이끌어갈 리 없습니다. 결국 5분도 안되어 초롱초롱 이야기를 기다리는 아이의 눈망울을 외면한 채 "끝"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아이와 마찬가지로 저에게도 낭패감이 밀려왔습니다. '차라리 동화책을 읽어줄걸 그랬어~ 괜히 이야기 만들었어~'하며 후회했습니다. 며칠, 몇 번의 실패 이후로 아들은 더 이상 기대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졸려서 짜증나는데 방해하지 말라고, 본인이 요청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제 입을 막습니다. 고민입니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좀 이른 것 같고, '잭과 콩나무'는 너무 이국캐릭터고 '토끼와 거북이'도 상투적이라 말이죠.

지구상 어디에도 설문대할망처럼 위대한 여신은 없다

오늘 다 읽은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고혜경 지음, 한겨레출판) 는 이런 제게 수많은 영감을 불어 넣었습니다. 설문대할망의 신화는 제주에서 전해집니다. 신화를 연구하는 학자인 지은이는 신화와 꿈을 연구했습니다. 남성캐릭터 위주의 기존 신화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신화의 근원은 여성성이 강조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흥분합니다. 그리하여 섬나라 제주도의 설문대할망을 중심으로 신화에 관한 구수한 입담을 풀어냅니다.

설문대할망의 신화-의례 또한 전 인류에 되풀이되어 등장하는 '위대한 여신'(Great Mother)이라는 원형의 예입니다. 이 원형은 신의 여성적인 측면, 즉 여신 원형으로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관장하고 지역과 지구 생태계 생명의 도래와 소멸, 그리고 모든 유기체의 위대한 그물망이 조화롭도록 관장하는 '어머니이신 자연'(Mother Nature)으로 더 잘 알려졌습니다. 지구상 어디에도 설문대할망과 똑같은 '위대한 여신'은 없습니다. 할망은 한국의 고유한 여신이며, 수천 년간 제주 땅에 살아온 제주민들의 여신입니다.

고유함을 지닌 여신. 할망. 제주도에서는 '옛날 옛적에'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는답니다. '설문대 시절에'라고 시작하지요. 바야흐로 새 시대가 열린 셈입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광석이 보석으로 빛을 발하기 전이라고 할까요. 이런 이야기를 발굴해내어 정리한 저자의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할망을 처음 만난 것은 유학시절이었다. 신화에 대한 감각을 익혀가던 때 방학기간 한국에 왔다가 서점에 들렀다. 우연히 뽑아 든 문고판의 책장을 넘기다 만나 온몸으로 전율했다. 이 찬란한 정신의 보물이 스스로 그 빛을 감추었는지, 아니면 보물을 알아볼 눈이 없었는지, 집단의 의식이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 이 신화가 이다지도 오래 묻혀 있었던 이유를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식자층이나 지배계층이 정교하게 편집하거나 공식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설문대 시절에···"로 시작하는 이 신화는 닳고 닳아 군더더기는 마모되고 순도 높은 황금처럼 광채를 발하고 있다." - 저자 서문중

과연 제주의 여신, 할망에겐 독특함이 있습니다. 돌하르방만 알던 저에게 새로운 제주를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로 새겨집니다. 설사똥으로 제주의 수많은 '오름'들을 완성하고 오줌으로 바다를 이루셨습니다. 섭지코지의 고기를 할망은 '그곳'으로 낚습니다. 이때 엑스트라, 하루방이 등장합니다. 거대한 하루방의 '거시기'가 물을 젓고 물고기들을 모는 것이지요. 할망의 하문이 고기들을 모두 빨아올립니다.

'어머, 쑥스럽게도 생명을 낳고 몸에 쌓인 노폐물을 배출하는 곳으로 낚시라뇨.' 여성이 모태, 자궁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듯도 합니다. 생명의 상징인 물고기와 할망의 자궁이 만나는 사건은 '창조의 신화'로 이해해야 할 듯 합니다.

오늘밤에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선문대 할망이 등장하겠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재탄생도 가능할, 그럴듯한 '잠자리 이야기(bedtime story)'라고나 할까요.

아들아, 기대해라.

덧붙이는 글 |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 고혜경 지음/ 한겨레출판/ 12,000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 - 우리의 창세여신 설문대할망 이야기

고혜경 지음, 한겨레출판(2010)


태그:#태초에할망이있었다, #선문대시절, #선문대할망, #할망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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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데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데로 살기 위해 산골마을에 정착중입니다.이제 슬슬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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