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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2010년)는 치욕의 경술국치 100년,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한국전쟁 60년, 4·19혁명 50주년, 5·18 광주항쟁 30주년, 평화통일의 초석을 다진 6·15 남북공동선언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동갑내기 아내와 몇 달 간격으로 환갑을 맞는 해라서 더욱 새롭게 느껴진다.

아내와 결혼하고 한 번도 외국 여행을 다녀오지 못해서 항상 마음에 걸렸다. 결혼하던 1982년 여름이었다. 필자가 다니던 교회와 결연을 맺은 대만의 '담수교회'에서 초청이 왔다. 교회에서는 방문하고 싶으면 신청하라기에 아내에게 말했더니 흔쾌히 허락해서 그해 연말에 혼자 다녀왔다. 그래서 미안함이 더하다. 

올해는 1박2일 코스라도 어디든 다녀와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도마 안중근 순국 100주년을 맞아 '평화통일 대구시민연대'가 동북삼성(오녕성·길림성·흑룡강성) 지역의 주요 항일 유적지를 둘러보는 만주기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와 상의 끝에 다녀오기로 했다.

북한 산천을 배경으로 두만강 다리에서 촬영한 단체사진. 다리가 북한-중국 경계여서 중간에 발걸음을 멈춰야했습니다. ‘비극’이라는 낱말이 떠오르더군요.
 북한 산천을 배경으로 두만강 다리에서 촬영한 단체사진. 다리가 북한-중국 경계여서 중간에 발걸음을 멈춰야했습니다. ‘비극’이라는 낱말이 떠오르더군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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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탐사지는 심양의 9·18사건 기념관, 조·중·러 3국 국경지대 훈춘, 방촌 두만강, 백두산 천지, 윤동주 시인 묘지, 민족교육의 요람 대성중학교가 있는 용정과 명동촌 일대, 화룡 청산리전투 유적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하얼빈, 잔학한 생체실험을 진행했던 731부대, 압록강 철교가 있는 단둥(丹東) 등이었다.

8월 12일 인천공항을 출발해서 19일 귀국하는 만주기행은 <만주를 가다>의 저자 박영희 시인의 안내로 독립운동사 발자취를 따라 당시 선조들이 일제에 어떻게 투항하다 사라져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민족의 명산 백두산 천지에 올라 북한 땅을 바라볼 수 있어서 더욱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백두산 천지. 볼 수 있는 확률이 20%라는 천지가 시원하게 병풍의 그림처럼 펼쳐진 것은 행운이었는데요. 중국은 ‘장백산’이라고 한답니다. 백두산이 아닌 장백산에 다녀왔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아프더군요.
 백두산 천지. 볼 수 있는 확률이 20%라는 천지가 시원하게 병풍의 그림처럼 펼쳐진 것은 행운이었는데요. 중국은 ‘장백산’이라고 한답니다. 백두산이 아닌 장백산에 다녀왔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아프더군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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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가보고 싶었던 만주

중국 땅이면서도 이웃처럼 느껴졌던 만주(간도)는 어려서부터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일제의 탄압이 노골화되던 1910년대 후반 고향을 떠나 봉천(심양), 장춘, 대련 등지에서 청년기를 보낸 아버지(1900년생)가 살아온 얘기를 듣고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어느 일요일 음악책을 꺼내놓고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금일도 상상봉에 임 만나 보겠네~에···"로 시작하는 '몽금포타령'을 지껄였더니 아버지가 학교에서 그런 노래도 배우느냐고 물었다. '군밤타령'도 배우고 기생 황진이의 시(詩)도 배운다고 하니까 그러느냐며 흡족해 하시던 아버지였다. 고향이 황해도 해주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 선생과 동향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셨던 아버지는 죄목도 모르고 봉천경찰서 지하실로 끌려가 말채찍으로 맞았었다며 "지독한 놈들!"이라고 하셨다. 직접 보거나 만나지는 못했지만, 입소문과 신문을 통해 소식을 들었다며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혜산진 일대를 김일성이 동료들과 습격해서 대승을 거둔 '보천보 전투' 이야기도 해주셨다.

북한도 중국도 적성국가로 교과서에도 '괴뢰'와 '중공'으로 표기되던 시절에 아버지는 "중국은 땅덩어리가 큰 만큼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릇도 크다"면서 "대한민국은 미국보다 중국하고 손을 잡아야 살아남는다!"라고 하셨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의 혜안이 얼마나 깊고 넓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두만강아 잘있거라', '광복군', '지평선은 말이 없다' 등 독립군들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영화가 유행했는데, '광복군'에서 최남현 딸로 출연했던 문정숙이 하얀 토끼털 깃이 달린 검정 점퍼를 입고 모래먼지를 날리며 말을 타고 달려오는 장면은 만주를 동경하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점심때 밥과 함께 나온 만두. 연길에 도착, 아버지가 들려준 얘기가 떠올라 가이드에게 왕만두집을 물어봤더니 모른다고 하더군요. 아쉬웠습니다.
 점심때 밥과 함께 나온 만두. 연길에 도착, 아버지가 들려준 얘기가 떠올라 가이드에게 왕만두집을 물어봤더니 모른다고 하더군요. 아쉬웠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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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동네에 찐빵과 만두빵을 직접 쪄서 파는 빵집이 나란히 네 곳 있었는데, 그곳에서 빵을 사다 먹을 때마다 아버지는 봉천과 대련 등지의 만두와 호떡 이야기를 하셨다. 크기가 어른 주먹만 해서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는 만두와 앙꼬도 들어 있지 않고 손바닥처럼 두꺼웠지만,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는 호떡 얘기는 듣기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아버지는 남한 사람들은 사치와 허세가 심하고 게으른데, 북한과 만주 사람들은 근면하고 부지런하다는 얘기를 귀가 아프도록 하셨다. 그런데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만주 사람들도 한국전쟁 때 꽹과리와 징을 치면서 쳐들어와 북진 통일을 방해했던 오랑캐들인데 좋아 봐야 얼마나 좋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더욱 가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신의주와 마주한 도시 단둥의 새벽 뒷골목과 만주벌판을 달리는 기차가 독립운동자금을 전하기 위한 접선장소로 영화에 등장할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하곤 했다. 결혼해서는 장인·장모가 신혼 때 만주 용정에서 살았다는 얘기를 듣고 기회가 오면 한 번쯤 가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외국 여행은 여권 발급부터 시작

만주기행 스케줄을 보니까 빡빡하게 짜여 있고, 7박8일 중 3일은 밤새도록 기차를 타게 되어 있어,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또 즐거운 여행일수록 일찍 결정해 놓고 준비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상상하는 것도 여행지에서 느끼는 것만큼 행복감을 느낄 수 있기에 일찍 접수를 마치고 준비에 들어갔다. 그때가 6월 중순.

국외여행은 여권 발급부터 시작한다. 해서 며칠 후 아내와 사진을 찍고 시청으로 여권을 신청하러 갔다.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앞두고 가방을 사러 가는 기분이었다. 민원실로 향하면서 옆을 힐끗 훔쳐보니까 아내도 상기된 표정이었다. '난생 처음 만드는 여권이니, 얼마나 흥분되었을까?' 이해할 수 있었다. 웃음이 나오면서도,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차례가 되어 여직원과 마주앉았는데, 되도록 여권을 빨리 보내달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서류를 정리하던 여직원이 눈치를 챘는지, 다음 주에 시청으로 찾으러 나올 필요 없이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등기로 직접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대구 주소를 적는데 '세상 참 좋아졌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여행가방과 운동화를 사려고 가게에 들렀다. 몇 군데 다녔지만, 어떤 걸로 사야 할지 망설이다 눈요기만 하고 나왔다. 3만 원짜리 운동화면 되는데, 비싸도 메이커가 발이 편하다는 아내와 의견일치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운동화는 훗날 본인이 알아서 고르기로 하고, 가방은 여행 기념으로 중국에 가서 구매하기로 정했다.

아내 용돈은 내 비자금으로

아내가 만주기행 접수를 마치고 2개월여 동안 집안에 행사가 많았다. 어머니 제사에, 장모님 생일, 셋째 누님 칠순, 형수 생일, 조카의 저녁 초대 등 술 마실 날이 많았다. 그래도 빽빽하게 짜인, 그래서 조금 무리할 것 같은 7박8일의 여정을 생각해 과음을 피했다. 

일 주일 전부터 세면도구와 입고 다닐 옷가지 등을 준비했다. 현지에서 사용할 용돈은 3년 가까이 모아놓았던 비자금을 털어 중국 원(圓)화로 환전해서 절반을 아내에게 주었다. "남아도 받지 않을 것이니까, 내 눈치 볼 것 없이 부담 없이 쓰라고···."했더니 깜짝 놀라며 고마워했다. 

운동화는 출발 이틀을 남겨놓고 시내에 나가 큰 맘 먹고 메이커를 골랐고, 내친김에 비싼 양말도 두 켤레나 구입했다. 초등학교 동창이 운영하는 이발소에 들러 이발도 하고, 아내 멀미약도 사고, 시장에도 들렀는데, 이마에 '소금꽃'이 피어날 정도로 땀이 많이 났고 무더웠다. 하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출발 전날은 아내와 마주앉아 인천공항까지 승용차를 몰고 갈 것인지, 버스를 타고 갈 것인지 잠시 고민에 빠졌는데, 새벽 5시30분 버스를 이용하기로 쉽게 결론이 났다. 즐겁고 의미 있는 여행을 앞두고 하는 행복한 고민이라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8월 12일,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가스레인지, 전기 콘센트, 보일러 등을 다시 점검하고 집을 나섰다. 가슴속 깊이까지 파고드는 농촌의 새벽공기가 유달리 상쾌하게 느껴졌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콩나물 해장국으로 요기를 하고 5시30분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외국여행은커녕 10년 전에 개항한 인천공항도 처음 가는 촌뜨기 부부의 7박8일 만주기행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태그:#아내, #만주기행, #외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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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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