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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나교의 24인의 위대한 스승중의 하나인 티르탕카르의 탄생지인 사르나트에 세워진 자이나교 사원
▲ 불교 3대성지 사르나트에 세워진 자이나교 사원 자이나교의 24인의 위대한 스승중의 하나인 티르탕카르의 탄생지인 사르나트에 세워진 자이나교 사원
ⓒ 김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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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동안 마을공동체 일을 하면서 작은 입장차가 생겨났고 그것은 점차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를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완벽주의자인 데다가 사람의 말에 쉽게 상처를 입는 내게 그것은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졌다.

동물은 위협 상황에서 싸우거나 피하는 두 가지 행동양식을 나타내는 데 이를 Fight or Flight반응이라고 한단다.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처음엔 적극적으로 나의 입장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세상에는 '그냥 그 사람이 싫은' 경우가 있나보다.

내가 선의를 가지고 행동과 말을 하더라도 그것이 또 다른 오해를 낳고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하고 극단의 상황으로 치닫기도 한다. 서서히 내 마음에도 불신과 미움이 싹트기 시작했고 그 다음부터는 아예 상종을 하지 않는 것으로 나의 태도는 바뀌었다.

오후 늦게 윤숙정 선생님께서 다율재에 다니러 오셨다.

"우린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 같아. 말을 많이 하다 보면 그 말이 오해를 낳고 서로 상처를 주게 되니 말이야."

내가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다.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것인지 모른 척 외면해야 하는 것인지 스스로 갈피를 찾지 못하고 있노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옛날에 흑산도에서 서울로 활어를 보내는데 운송과정에서 하도 물고기가 죽다보니 남는 게 없었다네. 그런데 우연히 그 안에 그 물고기의 천적이 뒤섞이게 됐고 서울에 도착하니 한 마리도 죽지 않았다더군.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으레 활어차에는 운송 활어의 천적이 들어가게 된다더군."

나는 내 마음에 미움을 버리고 용서하라는 말씀을 하실 것이라고 흔한 충고를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시때때로 변덕을 부리는 나의 마음과 달리 마음공부가 되어 있는 어른의 생각은 달랐다.

"그 사람들이 선생님의 은인이라고 생각해. 살아가면서 자만하거나 실수하지 않도록 항상 긴장하고 깨어 있도록 긴장하게 해주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 아닌가. 당장 내가 내일 죽을 날을 받아놓았다고 생각해봐. 부모죽인 원수가 아닌 다음에야 세상의 미움은 다 부질없는 것이야."

하늘을 입고 옷을 벗은 자이나 교도들
옷을 벗고 하늘을 입은 사람들.
나는 인도에서 사르나트에서 만난 적 있는 자이나교 교도들이 생각났다.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고자 깨달음의 길을 가는 수행자들은 옷을 입지 않고 알몸으로 생활한다. 우리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육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우리 안에 스스로 정화하지 못하고 있는 욕망과 집착이 있기 때문으로 이야기 한다.

석가모니는 자이나교의 교조 마하비라가 탄생한 마가다국에서 불교의 꽃을 피웠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충돌했고 그것은 철학적 논쟁으로 이어졌다.
▲ 석가모니의 경쟁자이자 자이나교의 교조 마하비라상 석가모니는 자이나교의 교조 마하비라가 탄생한 마가다국에서 불교의 꽃을 피웠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충돌했고 그것은 철학적 논쟁으로 이어졌다.
ⓒ 김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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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나트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어 첫 설법을 한 불교의 3대 성지이기도 하지만 자이나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이곳에 1824년에 지어진 사원은 자이나교의 24명의 티르탕카르(24명의 위대한 자이나교 스승들) 중의 한 사람인 쉬레얀쉬나트의 탄생지다.

"자이나교도들은 알몸으로 산다는데 당신은 왜 옷을 입고 있는가?"

자이나교 사원을 관리하는 관리인은 웃옷은 입지 않았고 허리에 하얀 천을 두르고 하체를 가리고 있었다. 군살이라고는 발견할 수 없는 깡마른 체격에 신발은 신지 않았고 팬티도 입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하루 종일 털 채를 들고 사원 안팎을 쓸어 내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 그것이 사원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사원에서 혹시나 생명이 사람에 발길에 밟히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라는 것을 듣게 되었다.

"아직 수행이 부족해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서이다. 부끄럽게 생각한다. 수행을 통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나 또한 옷을 벗을 것이다."

관리인은 허름한 인도 전통 옷차림에 수염이 덥수룩한 나의 모습을 보고 수행자로 생각하였는지 사원을 구경하는 것을 허락한다. 신발을 벗고 손과 발을 씻은 다음 입장하도록 한다. 나는 자이나교를 일으킨 마하비라 상 앞에 서서 잠시 묵상을 했다. 자연이건 사람이건 가르침을 주는 대상은 모두가 스승이다.

나는 나의 종교에 대해서 존중 받고 싶으면 남의 종교도 존중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목사님이 들으면 경을 칠 일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나의 뒤를 이어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방문한 영국의 관광객들은 입장이 허락되지 않았고 밖에 앉아 가이드로부터 설명만 들어야만 했다. 그럴 리야 없지만 나의 묵상이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싶어 괜히 미안해졌다.

마가다국에서 만난 숙명의 경쟁자 석가모니와 마하비라
창시자가 따로 없는 다신교인 힌두교와 달리 자이나교는 바르다마나(BC 599-727)가 창시했다. 불교에서 부처님과 대립 한 것으로 나오는 니칸타 나타 푸타(Nigantha Nataputta)가 바로 바르다마나의 별칭이다. 마하비라(대영웅)는 훗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붙여 준 이름이다.

자이나교의 석상들과 마하비라의 상은 불교의 석상들과 흡사하다.
▲ 자이나교의 석상들 자이나교의 석상들과 마하비라의 상은 불교의 석상들과 흡사하다.
ⓒ 김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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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카필라 국에서 왕자로 태어난 부처님과 마가다국에서 왕족으로 태어난 마하비라는 평생 경쟁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부처님의 주요 활동 무대가 자이나교의 탄생지인 마가다국이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애제자인 가섭존자도 마가다국 출신이었고, 마하비라의 제자 우바리와 논쟁을 벌여 그를 설복시킨 일도 유명하다. 이러한 대립은 마하비라의 아들까지 대를 이어 이어진다.

관리인은 구경을 마치고 나가려는 나를 다시 불러 세웠다. 자신들의 성인과 수행자들을 찍은 사진첩을 보여주었다. 사진 촬영을 해도 되냐고 묻자 흔쾌히 허락한다. 사진에는 사원을 방문한 수행자들의 모습과 깨달음을 얻었다는 성자의 모습, 달라이라마를 축복하는 종교지도자의 모습들이 있었다. 모두 알몸이었다. 옷을 입은 자신을 보고 이국의 이교도가 자신의 종교에 대해 오해할까 염려스러웠나 보다.

사르나트 티르탕카르 탄생지를 찾은 찾은 자이나교의 수행자들과 녹야원에 자리잡은 스리랑카 불교사찰의 스님
▲ 자이나교 수행자들과 스리랑카 스님 사르나트 티르탕카르 탄생지를 찾은 찾은 자이나교의 수행자들과 녹야원에 자리잡은 스리랑카 불교사찰의 스님
ⓒ 사르나트 자이나교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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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만이 지배하는 힌두교와 베다의 교권을 부정하고 정신(正信)·정지(正知)·정행(正行)의 삼보(三寶)를 최대 가치로 삼고 뼈를 깎는 고행의 실천과 불살생, 엄격한 계율을 지키고 사는 그들에게서 자연의 지배자로서 인간은 발견할 수 없었다. 자연의 일부이자 스스로가 자연이고 우주인 듯 보였다.

그들은 알몸에 붓처럼 생긴 큰 털 채를 들고 걸을 때도 길을 쓸고 다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을 삼킬까봐 마스크를 쓰고 어두운 곳에서는 물도 마시지 않는다. 심지어는 밭을 갈면서 쟁기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혹시나 실수로라도 생명을 해칠까봐 염려하는 것이다. 처음엔 그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들은 동물은 3개, 나무는 2개의 지바(Jiva)라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일반 신도들에게 한 개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쌀과 채소, 콩, 과일, 우유, 물 등만을 먹으라고 가르친다. 단식, 절식, 육체적 고행, 출가한 수행자와 같은 엄격한 윤리적 생활을 강조하고 쾌락을 피하고 결혼 후 완전한 정절을 지켜야 하며, 생을 마감할 때는 살아 있는 동안 가진 모든 소유물을 버리라고 말한다.

하늘을 입고 옷을 벗은 성인의 앞에는 항상 털 채가 놓여있다.
▲ 자이나교 성인의 사진 하늘을 입고 옷을 벗은 성인의 앞에는 항상 털 채가 놓여있다.
ⓒ 사르나트 자이나교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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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적으로 삭발을 하는 불교의 스님들과 달리 자이나교 수행자들은 3개월에 한 번씩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다. 머리를 깎는 과정에서 생명을 해칠까봐 경계하는 것이다. 하루에 한번 식사를 하는데 벌레가 있을 수 있는 뿌리채소는 피하고 콩과 가지처럼 줄기에 달린 채소만 먹는다. 과일은 따지 않고 땅에 떨어진 것만 취한다. 이때만 물도 마실 수 있다.

카르마(업)를 극복하여 영겁의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 이러한 고행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지속된다. 드물기는 하지만 계율을 지키기 위해 단식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탄생시킨 자이나교
'죽음에 이르는 단식(the fast-unto-death)'으로 인해 인도의 국부로 추앙받는 간디는 우리나라에서 자이나교도로 잘못 알려져 있다. 간디의 어머니는 자이나교에 영향을 받은 힌두교도이었으며 간디 또한 자이나교들 사이에서 자랐다. 간디는 기독교인들과도 어울렸으며 찬송가도 곧잘 따라 부르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 영향을 받은 간디 또한 인도를 식민지화 한 영국에 대해 폭력투쟁 노선을 택하지 않고 비폭력 무저항으로 싸웠다.

왠일인지 자이나교 사원 관리인은 영국 관광객들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 사원에 들어가지 못한 영국 관광객들 왠일인지 자이나교 사원 관리인은 영국 관광객들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 김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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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비폭력주의는 자이나교의 '아힘사'에 뿌리를 둔다. '아힘사'는 영혼을 가진 모든 생명체에 대한 동정(同情)의 마음이다. 행동으로 나타난 폭력뿐만 아니라 말과 행동에 의한 폭력도 죄악시 하는 자이나교도에게 폭력적인 영국 제국주의는 분노의 대상이 아니라 동정의 대상밖에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총칼을 뒤에 숨기고 때를 노리던 영국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간디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화해와 상생을 위해 평생을 힘썼지만 이에 불만을 느낀 극단적인 힌두교도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사람의 몸에 습(습관)이 배는 것은 99번의 반복을 통해서 가능해진다고 하지. 사람이 탁한 행동을 하는 것도 그것이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탁한 마음과 행동이 99번 반복되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고 맑은 말과 행동을 하는 것도 99번의 선행을 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알몸으로 수행에 정진중인 노 수행자의 모습
▲ 자이나교 노 수행자의 모습 알몸으로 수행에 정진중인 노 수행자의 모습
ⓒ 사르나트 자이나교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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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어리석고 고루한 전통이라고 여겼던 자이나 교도들의 알몸과 털 채가 이들에게 어떤 습을 만들었을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일이었다. 탁한 마음을 품게 되면 내게 탁한 습이 배이기 마련이고 그 탁한 습이 악취를 내뿜게 되면 탁한 사람들이 몰려들게 마련인 것이다. 남의 탓 할 일이 아니다. 오롯이 내 탓이다.

결국 사람에게 맑은 마음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맑은 행동이 오랜 시간 동안 지속돼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나는 원망의 마음을 버리고 내 마음 속에 털 채 하나를 든다.


태그:#인도여행, #사르나트, #자이나교, #마하비라,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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