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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이해 잊혀 가는 독립운동가와 유적을 발굴하고 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의병장들의 숨은 역사를 찾아 떠나보자.

임진일록과 이화삼의 항일실기에 등장하는 전남 장성의 이사유 의병장은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빛나는 성과를 여러 차례 거둔 기록이 확인됐지만 국가보훈처에는 아직 등재 되지 않아 이사유 의병장의 업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먼저 학술자료들을 살펴보면, 이사유 의병장은 1856년 2월 25일 영광군 삼북면 자초리 621번지(현 장성군 삼계면 수산리 자초마을)에서 태어나 부친 이문발(통정대부 추증)의 효우(孝友) 사상을 전수 받아 자초 마을에 서당을 열고 인근 마을 유생인 기우만, 기삼연 등과 깊이 교유했다.

이들은 평소 선생이 흠모하고 사숙 이였던 호남출신 대 성리학자 기정진의 후손들이며 후일 위정척사 운동과 의병 활동에 함께 투신 하게 된다.

또한 의병활동을 함께 했던 이화삼(李化三:1990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대장, 이극빈 참모장은 집안의 종질과 종손으로, 의병 활동 중 순국한 이학신은 선생의 장자로 기록(이화삼 항일실기)돼 있다. 

이화삼의 항일실기(抗日實記)에 의하면 영학당 사건을 주도한 이화삼과 흥덕 농민항쟁을 주도 했고, 그 당시 이사유 의병장은 종질인 이화삼대장과 가산을 군자금으로  출자해 각종 전투에서 대승하게 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 되자 이듬해인 1906년 6월 4일 최익현이 의병을 주도 하고 보성군 우치면 장춘 재에서 보성인 백홍인, 함평인 심남일, 장흥인 백형칠, 화순인 양회일, 강진인 김영근, 영암인 박기성, 신준성 등과 함께 구국항일 할 것을 혈맹했다.

또한 임전일록에 의하면 이사유의병장은 이백래가 주도하는 전남 화순군 쌍산의 소(2007년 8월 3일 87천550㎡가 사적 제485호로 지정)에 합류해 유격도장을 맡아 활동 하다가 부대가 분진 할 때 6로군(장성. 영광 등) 을 이끌고 곳곳에서 일본군과 대치해 큰 승리를 거뒀다.

이후 순종의 해산령이 내려지고 고성산 토굴에서 은둔 생활을 해오다 1909년 11월 체포돼 일본군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며 사창전투에서 입은 총상의 후유증으로 병마와 싸우다 1922년 6월 13일 나라 잃은 통한을 비분강개 하며 타계했다.

이사유 의병장의 시신은 장성군 삼계면 자초리에 안장 됐고, 그 후 2009년 8월 10일 이사유선생 기념 사업회를 조직해 함평군 현암리 선영으로 천장했으며 선생의 위업을 받들어 기념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이사유 의병장 후손들은 조상의 숭고한 희생이 세월 속에 묻혀 가는 것이 안타깝다며 현재도 업적의 진실을 찾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후손 이현곤씨는 "지난 수년 간 조부님의 서훈을 위해 많은 공을 들였는데 이번 광복절 심사에서 탈락 되고 말았다"며 "생명과 가산을 모두 바쳐 일제 국권 침탈에 장열하게 맞서 싸운 조상님의 숭고한 희생을 후손의 도리로 꼭 찾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현곤씨는 그 동안 수집해 온 자료 '임전일록'과 의병장 '이화삼의 항일실기' 및 '이사유 선생의 기념 사업회 학술지', 대한독립운동사 편찬 위원장인 김병기 박사의 '이사유선생의 평생 이력요약'을 보이며 학계에서도 지난 의병생활을 검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성군 삼계면 자초리에 있는 이사유 의병장의 영학당 서당터가 있는 곳이다. 주민 고제구씨가 당시 상황을 기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 장성군 삼계면 자초리 영학서당터 장성군 삼계면 자초리에 있는 이사유 의병장의 영학당 서당터가 있는 곳이다. 주민 고제구씨가 당시 상황을 기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 고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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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사유 선생의 생가 터가 있는 장성군 삼계면 자초리 마을에는 당시 '영학당' 서당 터가 있다고 했다. 자초리에 60년을 살고 있는 주민 고제구씨를 만나 서당터(위 사진)에 가보았지만 영학당의 실체는 없었으며 배나무와 잡초만 우거져 있다. 고제구씨에 따르면 "이사유선생은 영학당이란 서당을 운영했고 많은 제자를 길러 내셨다" 며 "저기 한쪽엔 이사유 의병장의 어머니와 부인 묘소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구한말에 서당(영학당)에다 본부를 설치하고 앞 산(고산)에 의병들의 은신처와 훈련장을 두어 일제와 싸워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고 당시 상황을 피력했다. 특히 "지금도 고산에 가면 토굴 등 움막 터가 있으며, 얼마 전 역사학자들이 찾아와 서당 터를 둘러보고 화순 쌍산의 소도 따라가 보니 두 곳이 별 차이 없다"고 부연했다.

이사유 의병장의 업적에 대해 구체적 사실은 물론 유적지까지 남아 있어 사실 검증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한 것이 의문이다.

후손 이현곤씨에 따르면 "당시 이화삼 대장은 이사유 의병장의 종질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됐지만 삼촌 되는 이사유 의병장은 추서 받지 못했다"며 "나이로 보나 당시 촌수로 따져 보아도 맹주로 총 지휘한 사실들이 뒷받침 되고 있지만 보훈청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순천대 홍영기 박사 학술서에 따르면 "당시 의병들은 일본군에 추격을 받고 있어, 일시적으로 몸을 피할 수 있는 막사생활을 해 유적지나 유물이 남아 있을 수 없다. 또한 일본군이 침투해 막사에 존재한 모든 것을 불태워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한편 고제구씨의 설명에도 일본군이 자초리 마을로 들이닥치자 마을주민인 '광주댁'이 조직표와 의병명단을 모두 불태워 사상자가 없었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비춰본다면 이사유 의병장의 자료는 남아 있으리 만무하다는 것.

하지만 후손들은 조상의 숭고한 정신을 꼭 되찾고 싶어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자료를 수집하는데 전력하고 있다.

이사유 선생은 호남 의병사의 여러 곳에 참여 해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싸웠고 맹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가산을 모두 내놓았으며 초개 같이 목숨을 버리신 고귀하고 義로운 분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전설과 현실은 자손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자료가 부족 하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추서를 미루고 있어, 조상들의 고귀하고 장엄한 희생이 묻혀 버린 현실은 후손들에 억울하고 통탄의 한을 가슴에 새기는 안타까움이 남아서는 안 될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기며 활동해야 했던 시대 사항을 비추어볼 때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서훈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것은 역사의 진실 앞에 수레바퀴를 되돌리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태그:#의병장, #장성군, #삼계면, #영학당, #이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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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처럼 인간성이 점점 고갈되어가는 시점에서 무엇이 인간의 도리이고 어떵게 사는것이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사는 길 인지 조금만한 목소리로 외치고 싶어요. 또한 이기주이가 만연되고 가족 중심주의가 만연된 사회에 진정한 효.충 의가 무엇이며 금전지상주의에 살아가는 이시대에 돈이 최고가 않이라는것을 사회 전반에서 찾아보고 여러분과 함꼐 허심탄회 하게 이야기 하고 싶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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