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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평화기념 자료관에 전시된, 원폭투하 후 폐허의 히로시마 거리 모습과 원폭피해를 입은 잔존물.
 히로시마 평화기념 자료관에 전시된, 원폭투하 후 폐허의 히로시마 거리 모습과 원폭피해를 입은 잔존물.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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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8월 22일)는 100년 전 서울에 다수의 일본군 부대가 집결한 위협적 분위기 속에서 한일 강제병합 조약이 체결된 날이다. 나는 올해 8월을 일본의 원폭 피폭도시인 나가사키에서 보내고 있다. 8월 6, 9일 원폭의 날을 비롯하여, 8월 15일 광복절도, 8월 22일 한일 강제병합 조약 체결 100년의 날도 이곳에서 맞이했다.

해방 후 우리에게 8월은 광복절의 8월이었다. 피해자의 아픔을 얼마만큼 진정성 있게 우리 사회가 함께 껴안고 치유하고자 했으며, 식민지 시대의 잔재와 친일파 청산을 얼마만큼 해냈는가 하는 문제의식과는 별도로, 한국 사회에서 8월은 과거 일본 식민지 지배에 대한 공분을 일으키고 조국의 독립과 주권회복의 기쁨을 다시 떠올리는 달이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8월하면 곧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 그리고 종전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달이다. 세계 2차대전 막바지에 일본은 아시아 침략을 넘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고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종국에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다. 그러나 인간이 역사상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아비규환 불지옥은 히로시마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사흘 후 나가사키에서 반복됐다.

결국 8월 15일 히로히토 일왕은 항복을 선언했다. 패전국이 된 일본은 승전국 미군정의 통치 아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면서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상징 천황제를 유지하는 기묘한 방식의 일본식 전후 민주주의라는 국가 틀을 만들어 갔다. 이어 1950년 우리에겐 너무도 처절한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의 특수를 누리며 일본은 다시 경제적 부흥과 번영의 길을 걷게 되었다.  

원자폭탄 투하, 일본은 어떻게 피해자가 되었나

핵무기 투하만을 두고 볼 때 미국은 가해자요, 일본은 피해자였으나 이 둘은 군사적 동맹을 맺었고, 누구보다 더 끈끈한 관계가 되어 전후 동아시아 질서를 장악해 왔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원자폭탄 피해에 대해서 미국에 대한 배상과 책임을 묻는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기로 합의했다(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951). 그리고 '비핵 국가', '원폭 피해국'이라는 가면 뒤에서, 실제로는 미국과 핵 밀약을 맺어 핵을 탑재한 미군의 원자력 항모 등이 일본 영해에 들어와도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는 입장을 일관하며 미국의 핵우산 아래 전후 65년 동안 자국만의 평화를 지켜왔다.

그러나 핵무기 투하의 순간과 그 이후만이 아니라, 원폭 이전의 역사에서 명백히 침략국이며 전범 가해국이었던 일본은 피해국 한국에 대하여 65년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일제가 과거 식민통치기에 끼쳤던 모든 피해 보상의 '일괄타결'을 시도, 한일 양국 사이의 모든 배상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제멋대로 결론을 내려 버린다.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라는 '돈질'을 해서 말이다.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라고 자칭하는 일본은 원자폭탄을 통하여 최후에 피해자가 되었으나, 사실은 피해자가 되기 전에 더 오랜 세월 항상 '남의 땅'에서 전쟁을 한 가해국이었다. 러일전쟁 때도 중일전쟁 때도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 지방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1944년 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줄곧 아시아와 태평양 각국의 점령지에서 학살과 강간, 인권 유린을 자행한 가해국이었다. 그러던 것이, 1944년 도쿄, 오사카, 규슈 등 일본 전국이 미군 폭격기의 공습을 받고, 본토를 지키기 위해 오키나와를 총알받이로 삼으면서 비로소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자국 땅이 전장터로 변해 갔다. 그 끝은 원자폭탄 피폭이었다.

일본의 경우 원자폭탄 피해 문제를 말할 때, 가해와 피해의 이중적 딜레마를 가진 나라라 할 수 있으나, 7만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처지는 달랐다. 강제병합과 피식민지 지배라는 첫번째 피해, 그리고 생계 피폐와 수탈 및 강제동원, 민족차별이라는 두번째 피해가 먼저 있었다. 그리고 미국이 "전쟁을 하루 빨리 종결시켜, 더 많은 미군과 일본 사람, 아시아 민중의 생명을 구제하기 위해"라는 논리로 투하한 원자폭탄의 피해, 그리고 핵 피해를 은폐하고 군사기밀로 억압해온 미국의 전후 핵정책의 피해자라는 세번째 피해를 겪어야 했다.

일제는 피식민지의 백성들을 '조센징'이라 차별하면서도, '일본인'으로서 천황에 충성하라고 전쟁터로, 군수공장으로, 성노예 위안소 등으로 끌고 갔다. 그래 놓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일본인이 아니니까 책임질 이유가 없다고 내팽개쳐진 일제피해자의 공통적인 피차별은 원폭피해자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원폭피해 문제가 65년의 시점을 지난 현재도 대단히 중요한 까닭은 생존자가 아직 이땅에 존재하고 그분들의 아픔이 치유되지 못하고 있는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가 남겨져 있다. 그것은 원폭의 피해가 그 자녀 세대는 물론이고, 몇 세대를 거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핵무기 피해의 특수성이란 것은 엄청난 방사능에 노출된 피해자 자신은 물론이고, 그 피해자가 혹시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건강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그 몸 속에 잔존한 방사능이 혈액과 미세한 세포 속에 스며들어 큰 변이를 초래한다. 이것이 얼만큼 자녀 세대에 영향을 끼치는가는 정확히 규명되고 있지 못하다.

"아직은 영향을 준다고도, 안 준다고도 할 수 없다"는 애매한 주장은 미국과 일본의 국가 논리이며 그 국가 논리를 뒷받침하는 과학 논리이다. 물론 이 논리는 한국 정부도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동물 실험을 통해서 핵무기 피해가 2세뿐 아니라 몇 세대까지도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 결과가 밝혀진 바 있다. 또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피해자뿐 아니라 미국 핵실험 피해의 땅인 환태평양 비키니 섬 등에서도 방사능이 섬 사람의 생명과 삶, 그 자녀들의 건강까지 파괴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히 폭로되었다.

문제는 핵무기를 사용한 미국 및 그 미국과 동반하여 전후 일본의 질서와 안정을 구축해온 일본의 입장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절대로 핵무기 피해를 정직하게 공개할 수 없다는 점이다. 65년 전의 원자폭탄에 대해서 미국은 '미일 합동 원폭 상해조사연구소(ABCC)'를 설립해 피해실태를 연구하는 것처럼 포즈를 취했으나, 실제로는 전혀 피해자를 구제하지 않았다. ABCC는 피해자와 그 자녀들의 혈액을 마음대로 체취하고, 피해자를 실험용 쥐처럼 조사하여 방대한 인체 정보를 수집했지만, 치료는 실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보를 수집하여 어떻게 사용하는지 구체적으로 피해자에게 공개하지도 않았다.

미국은 원폭투하 후 "죽을 사람은 이미 다 죽고, 살아남은 피폭자에게는 후유증은 없다. 방사능 오염도 더 이상은 없다(미군 준장 파렐)"고 말하며, 핵무기와 방사능이 가져온 파괴적인 힘을 은폐하고자 했다. 핵무기를 사용한 것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과 부담을 덜기 위해서, 철저히 보도 통제를 실시했다. 피해 당사자가 피해를 말하거나 글로 쓸 기회조차 미군의 감시와 검열에 의해 박탈당했다. 결국 핵 피해 실태에 대한 은폐와 군사기밀주의는 핵 개발을 당당하게 하도록 힘을 실어 주었고, 현재도 국제사회는 '핵 억지론'이란 망령을 걷어내지 못하고 있다. 즉 대립과 갈등을 겪는 국제사회에서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핵 위협'이 오히려 상호간의 전쟁과 섣부른 행동을 저지하는 효과를 가진다는 것이 핵 억지론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작년 프라하에서 원자폭탄 투하의 도의적 책임을 인정하며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선언했다. 일본에서는 많은 이들이 환영하였으나,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 척결을 명분으로 전쟁을 하며,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어서도 여전히 이스라엘 편인 미국의 진정성에 대해서 의심하고 고개를 젓는 이들도 있었다.

미국은 왜 원자폭탄을 투하했을까

히로시마 평화기념 자료관내 전시물. 원자폭탄이 투하된 당시 히로시마의 모습을 본뜬 모형물이다.
▲ 히로시마 평화기념 자료관 히로시마 평화기념 자료관내 전시물. 원자폭탄이 투하된 당시 히로시마의 모습을 본뜬 모형물이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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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세계 2차 대전에서 일본과 전쟁을 했던 미국은 핵무기를 두 번이나 투하했던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서 과연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을까. 작년 프라하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원폭을 투하한 국가로서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있다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도의적 책임'을 인정했다.

지금껏 미 역대 대통령 중에서 오바마 수준의 발언을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미국측 대표급 인사도 지금까지 한 번도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희생자 추모 평화기념식에 참석한 적이 없다. 올해 최로로 주일 미국 대사가 참석을 했는데 이는 오바마 대통령의 프라하 선언을 뒤잇는 나름의 행보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에서는 원자폭탄이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고, 수많은 인명을 구했으며, 진주만 등에서 미국 사람들을 희생시킨 일본의 범죄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다, 일본이 먼저 침략을 했으며 미국은 일본과는 다르다는 견해가 강력하다.

실제로 미국은 전후 일관되게 일본에 대한 원폭투하의 정당성을 주장해왔다. 원폭투하야말로 일본의 항복과 전쟁의 조기종결을 가져왔고, 그 결과 본토 결전까지 갔을 경우에 50만~100만 명에 이르는 미군이 희생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한 불필요한 희생을 줄였으며 그 이상의 일본인과 아시아 사람들의 생명까지 동시에 구했다는 논리다. 이것이 현재 미국에서 지배적인 견해를 이루고 있다. 미국과 처지는 다르지만, 아시아에서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억압에 고통받아온 민중들에게도 원자폭탄은 해방을 가져다 준 선물이자 철천지 원수 일제의 인과응보적 당연한 귀결이라고 인식되어 왔다.

최근 국제적인 원폭 연구의 대세는 당시 소련의 대일 참전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전후 질서에서 소련의 영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미국이 원폭투하를 통해 "일본을 항복시켜, 전쟁 종결에 공헌한 것은 미국이다"는 점을 강조하여, 전후 세계 질서에서 우위를 점할 목적으로 원폭을 사용했다는 '소련 영향력 억제' 설이 유력해지고 있다. 이를 두고, 미국의 원폭 투하는 제2차 세계대전의 최후의 대사건이 아니라, 미소 냉전의 서막을 여는 최초의 가장 충격적인 대사건이라는 해석이 덧붙는다.

한편 엄청난 개발 비용을 투입한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 '맨하탄 계획'의 성과물로서 개발과 실험에 성공한 새로운 무기를 실전에서 꼭 사용해 위력을 실험해 보고자 했다는 '핵무기 실전 사용에 의한 인체 실험설' 등도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밖에도 일본의 '비겁한' 진주만 공격에 대한 보복이었다, 황인종의 생명을 경시했던 백인 미국인의 인종차별적 사상이 배경이었다,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 팀이나 미국의 당시 지휘자의 야심과 지나친 위력이 원폭 사용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미국의 핵무기 실전 사용에는 단 하나의 이유가 아닌, 복합적 이유가 작용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한국인 원폭피해자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 강제병합에 대해서든, 미국의 원폭 투하에 대해서든, 어느 쪽에서도 피해자의 입장에 서 있다. 한국인이 일본까지 가서 원폭피해를 당하도록 만든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렸던 일본에 우선적 책임이 있지만, 미국의 핵무기 사용 역시 용서될 수는 없다. 실제 미국의 원폭 투하로 희생된 70만 명의 피해자(원폭 투하 후 3개월 이내 사망자 수는 히로시마 12만 명, 나가사키 7만 5천 명으로 추산, 생존자도 후유증에 시달림) 중 90%이상이 민간인이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인이 7만 명 정도 포함돼 있다. 

히로시마·나가사키는 어떻게 평화의 도시가 됐나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에 세워진 원폭위령비. 해마다 8월 6일, 이곳을 배경으로 하여 평화기념식전이 열린다. 비석에는 "편안히 잠드소서. 잘못은 되풀이하지 않을 테니까."라고 쓰여 있다.
▲ 히로시마 평화공원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에 세워진 원폭위령비. 해마다 8월 6일, 이곳을 배경으로 하여 평화기념식전이 열린다. 비석에는 "편안히 잠드소서. 잘못은 되풀이하지 않을 테니까."라고 쓰여 있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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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원자폭탄이 떨어진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불지옥 속에 함께 있었으면서도, 6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인 피폭자와 일본인 피폭자의 처지가 너무나 다른 것은 왜일까. 전후 65년째를 맞이하는 일본에서는 피폭 도시 히로시마, 나가사키는 '평화의 도시'가 됐다. 원폭 관련 시립 평화자료관은 물론이고, 추도시설과 사립 평화자료관과 연구소도 양 도시에 집중되어 있으며, 해마다 8월뿐 아니라 연중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원폭사진전, 원폭 시집과 증언록, 수기집, 원폭 영화와 만화, 드라마는 물론이고, 원폭 피해자가 자신의 체험을 견학자나 어린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는 '체험 증언' 활동은 일상화되어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지역 매스컴은 하루도 빠짐없이 원폭과 관련한 뉴스를 집중 보도한다. 언론 자체가 그것이 히로시마, 나가사키 언론의 가장 큰 사명이라 생각한다.

평화공원과 자료관, 원폭피해 유적지 필드워크는 두 피폭도시의 대표적인 관광상품이 되었다. 수학여행단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원폭의 현장을 배우러 찾아오며, 해외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세계 유일의 실제 핵무기 피해국'이라는 일본의 현장을 보고 피해자를 만나러 온다. 유력한 정치가와 인사들도 곧잘 온다. 그럴 때면 항상 매스컴이 보도를 한다. 

일본인 피폭자는 '원호법'에 의해서 피폭자 수첩을 가지고 있으면, 병원비는 어떤 항목이라도 전액 무료다. 살아있는 피폭자 말고, 이미 고통 속에 죽어버린 피폭자에 대한 보상이 가장 큰 문제이며, 생존 피폭자 중에도 법에 의한 피폭자 기준 때문에 피폭자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남아 있어 아직 행정의 한계점이 지적되고 있으나, 피폭자에게 국가가 치료를 보장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반면, '세계 유일의 피폭국 일본'이라는 구호에 가려, 실제로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은 원자폭탄 피해자를 가진 나라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일제 시대에 지역 살림이 완전히 파탄나서 일본으로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도일했던 사람들이나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사람 등 히로시마 원폭피해자가 많다고 해서,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리는 합천의 상황은 어떠한가. 합천은 평화의 도시, 평화의 지역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가. 그러한 지역으로 성장할 기회조차 있었는가.

합천의 원폭피해자, 그리고 대구, 부산, 서울과 전국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국내 원폭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폭 체험을 말하고 호소할 수 있는 기회를 얼마나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또 평화교육시설이나 평화자료관도 얼마 없고,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말하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가족과 자녀에게 피해를 끼칠까 봐 두려워 숨죽여 지내야 하는 현실은 또 얼마나 한일 양국 피폭자의 차이를 보여주는가.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일본에 다녀와서 원폭피해자 복지기금을 받아온 이래, 대한적십자가 국내 피폭자의 건강검진이나 의료비 지원, 복지시설 건립 등을 했다. 2002년 곽귀훈씨가 일본에서 재판에 승소하여 한국 피폭자도 일본 정부로부터 피폭자 건강수당을 매달 지급받게 되는 진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한국인 원폭피해자는 일본인 피폭자와는 달리 45년 이상의 세월 동안 사회에서 버려진 채 죽어갔다. 너무나 험난한 고개를 넘어 여기까지 살아온 분들이 현재 원폭피해자협회에 등록된 분들을 기준으로 보면 약 2600여 명이다. 

원폭 피해의 대물림 현상, 즉 혹시 부모의 피폭의 영향으로 나타난 건강 문제나 후유증을 포함하여 가난과 무학, 결혼과 취직 차별, 사회적 소외와 심리적 고통 등은 일본에서도 비슷하지만, 일본의 피폭2세의 사정은 그래도 한국보다는 좀 낫다. 물론 일본 피폭자의 자녀들은 부모 세대와는 달리 법적으로 의료비 지원을 보장받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기본적으로 '원폭'이 하나의 국민적 경험, 국가적 기억이며 학문이고 하나의 부문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학생 시절부터 원폭피해에 대해서 공부할 기회를 갖는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도 원폭피해자에 대한 방치와 차별이 강하게 존재해 왔기 때문에, 원폭피해자도 그 자녀들도 괴로운 삶을 감내해야 했다. 전쟁 책임자인 일왕이 침략전쟁의 희생자였던 원폭피해자들에게 "전쟁 때였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며 참을 것을 강요했다.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꺼내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적으로 '피폭자' '원폭' '피폭2세'라는 단어가 많이 알려짐에 따라, 피해자들도 자신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 전보다 수월해졌다. 들어주는 사람도 많다.

반면 한국에서는 원폭피해자 자신은 물론이고, 2세 '환우'들조차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고 숨죽여 지내고 있다. 괜히 말해봤자 자신의 아픔을 누가 해결해주지도 않거니와, 건강한 다른 자녀와 형제들까지 "원폭 피해자들이나 2-3세는 전부 환자다"라는 편견이 확산돼, 피해자들을 더욱 괴롭힐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폭피해자 중에는 아픈 자식의 병에 대해서 '원폭 피폭의 영향은 아닐까"하고 생각하는 부모도 많다. 하지만 아프지 않은 다른 자식을 위해서 드러내지 않거나 부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픈 2세들도 자신의 병에 대해서 미심쩍어 하면서도 자신의 '원폭 2세 환우'로서의 커밍아웃이 다른 형제들에게 폐를 끼치고 파문을 일으킬까봐 참는 경우도 많다. 항상 건강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지만, 지금 당장을 살아가기도 너무나 현실이 버거운 것도 이유 중 하나다. 

일본에서 피해자가 피해를 말할 수 있는 것과 한국에서 피해자가 피해를 말할 수 없는 배경 속에는 분명한 원인이 있다. 그것은 사회가 핵무기에 대해서, 원자폭탄 피해에 대해서 얼마나 공부하고 관심을 갖고 사회적인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차이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한국 사회에서도 원폭피해자나 그 자녀들이 힘겨운 병을 가지고 고생을 할 때 아래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아픈 사람이 나쁜 게 아니잖아요. 병들어 고생하는 분들에게 책임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분들을 아프게 한 사람,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든 쪽이 나빠요. 그러니까 온 사회가 아픈 분들과 함께 싸워줘야 하고, 아픈 분들의 병은 사회가 같이 치료를 보장해야 해요. 그럼으로써 아픈 사람을 살리고 원폭피해자나 자녀들도 더 건강해질 수 있죠. 피해자가 피해를 말하는 건 참 힘든 일이지만, 피해자의 아픔을 사회가 같이 해결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면 원폭피해자도 다양한 의료적 혜택 속에서 건강에 대한 불안으로 고통받지 않아도 되고, 차별 받지 않고 살아도 되는 거죠."

한국의 원폭피해자는 다 어디로 갔을까

원폭이 투하된 후의 히로시마의 거리와 사람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재현 전시물.
▲ 히로시마 평화기념 자료관 원폭이 투하된 후의 히로시마의 거리와 사람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재현 전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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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피해자의 과거의 피해는 이미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앞으로의 피해는 사회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이미 고령화된 원폭피해 생존자에 대해서도 그렇고, 원폭 2세 '환우' 혹은 건강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건강에 대한 불안을 안고 있는 이들. 또 원폭2세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억울한 일을 당할까봐 걱정하는 더 많은 건강한 원폭2세 분들에 대해서도, 이 사회가 그때 그 원자폭탄에 대해서, 그리고 원폭 피해에 대해서, 또 핵무기에 대한 인식을 얼마나 깊이 가지고 행동하는가에 따라서 앞으로의 피해자는 차별을 두려워하지 않고, 건강을 걱정하지 않고, 더 나은 상황 속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8월 2일, <지식채널 e>가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를 주제로 하여 한국인 원폭 2세 '환우'였던 김형률씨(관련기사 보기)의 삶과 한국 원폭 2세 피해자들의 아픈 현실을 짤막한 영상으로 소개하였다. 한국은 올해 '강제병합 100년' 혹은 '국권침탈 100년', '국치 100년'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지난 역사를 조명하고, 피해자들의 삶도 조명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의 올바른 한일관계에 대해서나 해결과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진정으로 우리가 역사를 성찰하고 미래의 평화를 말하고자 한다면 피해자에게 정의와 인권을 되찾아 주는 것이 가장 급선무다.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먼저는 피해자의 아픔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도대체 피해자의 실태가 어떠한지 조사하고 규명하는 것과 동시에, 피해자가 더이상 피해자만으로 남아있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자존을 회복할 수 있도록 사회가 함께 노력하는 일이다. 참고로, 합천에는 올해 3월 원폭2세 환우들을 위한 최초의 시설인 '합천 평화의 집' 이 문을 열었다. 꼭 한 번은 방문해볼 것을 권한다.

우리 사회에서 원폭피해자의 삶이 조명되지 못한 배경에는 역시 원폭은 일본을 패망시킨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으므로, 원자폭탄에 대한 혐오감과 분노가 부족했던 점에도 큰 원인이 있다. 그리고 한국전쟁과 분단,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더욱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시된 분위기에서 핵무기의 피해를 말하는 것은 먹혀들 수 없었다. 더욱이 한국 역시 미국과의 강력한 동맹으로 구축된 나라이므로 원폭피해자의 목소리가 사회에 널리 확산되면, 그것이 핵무기 투하 책임국인 미국에 대한 공격이 되고 반미감정으로 확산될 수 있으므로 이 역시 피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민주화와 남북의 화해가 동반되지 않고서는 사회 각 영역의 다른 인권 문제도 해결되기 어려웠던 시절을 우리는 오랫동안 살아왔다. 지금 인권의 문제를 말할 수 있고, 사회적 소수자, 약자의 목소리가 예전보다 더 많이 나올 수 있게 된 것은 민주화와 남북화해, 평화와 인권 문제, 원폭피해자 문제가 함께 가는 문제이기 때문이리라.

한국에서는 일본이 원폭 피해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가해자였던 역사를 잊어 버리고 순식간에 피해자로 둔갑해 버릴 수 있다며 우려를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일본도 늘상 원폭 피해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100년 전 혹은 더 거슬러 올라 메이지 유신 때부터 계획적으로 준비한 조선과 아시아 침략에 대해서 깊이 공부하고 성찰하는 100년을 맞이해야 한다.

일본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와 원폭 투하까지의 과정을 정리한 연표.
▲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와 원폭 투하까지의 과정을 정리한 연표.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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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NHK는 일본식으로 말하면 '종전 기념일'인 15일을 하루 앞두고, 한국과 일본의 양국 청년들을 패널로 불러들여서 장장 3시간에 가까운 토론회를 펼쳤다. 이는 중요한 시간대에 방송을 탔다.

대다수의 일본 젊은이들은 식민지배나 일본의 전쟁이 나빴다고 말하며, 한일 양국이 사이좋게 평화롭게 지내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젊은이들 중에는 "한국도 피해자일 뿐만 아니라, 어떤 나라에 대해서는 가해자의 입장이기도 하지 않는가"라든가, "일본의 역대 총리들이 공식적으로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를 했는데도 한국에서는 계속 사죄하라고 한다. 누가 누구에게 사죄를 하기를 원하는 것인가.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일본이 아무리 사죄를 해도, 계속 반일감정을 버리지 않는 것 같아서 그런 것을 보면 한국을 좋아할 수가 없다"는 목소리도 꽤 있었다. 

한 일본인 청년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살해하거나 한국 사람들을 괴롭힌 것은 미안하다고 생각한다. 100년 전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이 난립하던 시대였고 일본도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식민지화한 것은 나쁘지만, 그러나 일본도 강대국의 먹이, 즉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에서 배울 수 있는 진실은 정반대다. 일본은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가해자가 되었다고 하지만, 가해자가 됨으로써 피해자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결국 피해자가 되었으나, 그보다 더 오랜 시간 가해자였으며 전후에도 미일동맹 아래 다시 가해자의 처지에 섰음도 알 필요가 있다.

한국도 일본도 중국도 미국도 어느 땐가는 피해자가 되고, 어느 땐가는 누군가에게 가해자였던 적이 있다. 그러나 한일 관계, 중일 관계에 있어서, 아시아 각국에 대해서 일본은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이 자국의 폭력의 역사, 가해의 역사를 올바르게 아는 것은 한국인의 몫이며, 일본인은 일본의 침략사와 가해의 역사를 공부하고 피해자의 아픔을 마음에 새기는 위에서 핵무기 폐기를 말해야, 아시아와 세계 민중이 함께 할 수 있다. 

또한 꼭 일본 청년에게만은 아니고 누구에게든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때 그 침략과 전쟁, 제국주의 정책, 군대와 학살, 강간과 폭력, 차별과 학대는 일부 군부의 잘못이라거나 시대가 그러한 때였다거나, 국가와 정부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의 힘없는 시민 개개인도 결국 전쟁의 피해자일 뿐이라는 말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전쟁과 폭력과 거대한 불의는 피해자는 늘 가장 약한 사람들이 짊어져 온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미국인도 "그건 국가가 잘못한 거야"라는 말 뒤로 숨어 버린다면, 그것은 결국 개개인은 역사의 주체가 아니므로, 역사를 바꿀 수도 없고 역사의 혁명과 진보도 없으며, 역사를 바꾸는 것은 국가일 뿐이라는 논리와 무엇이 다를까.

자신을 역사의 주체로 두고 세계와 역사를 바라본다면, 선배 세대가 저지른 잘못도 그리고 동시대 우리나라가 아닌 타국이 저지른 잘못이라도, 전쟁과 학살과 폭력의 희생자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것은 인간된 도리가 아닐까. 그래야 역사속의 주체인 우리 개개인이 거대한 폭력과 불의를 막고, 이 세계를 좀더 인간이 인간답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로 만들어갈 희망도 존재하는 것 아닐까. 역사를 반성하고 역사 속의 자기 사회와 자기 존재를 성찰하는 힘으로부터 미래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힘도 생기는 것 아닐까.

원폭의 역사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은, 일본 사람들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원폭을 투하했던 범죄국가 미국은 지금 9.11의 피해자라면서 또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 전쟁을 시작한 부시 대통령은 피해자가 될 것 같으면 먼저 때려 부수겠다는 '선제공격론'을 내세웠다. 미국은 지금껏 얼마나 많은 땅을 짓밟고 피를 뿌렸나. 전쟁이든 핵무기든 결국 폭력은 보복의 악순환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그 피해는 항상 폭력의 '수행자'가 아닌, 전쟁도 핵무기도 차별도 억압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비무장 민간인, 그중에서도 가장 약하고 약한 사람들이 치르고 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용기와 지혜가 과연 우리에게는 있는가.


태그:#강제병합 100년 피해자, #한국 원폭2세환우, #원폭피해자, #역사문제 갈등, #국치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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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주부이자, 엄마입니다.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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