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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올린 <작은 후원이 늘 미안하지만…>이라는 글에서 내 경제 형편이 일정 부분 소개되었습니다. 이 나이에 이르도록 재산이라곤 겨우 '쥐뿔' 정도 지니고 산다는 게 조금은 부끄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떳떳함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왕 내 경제 사정을 노출한 김에 더욱 확실하게 온전히 고백하고자 합니다. 

 

 <1>

 

선천적으로 이재(理財)에는 눈이 흐리고 물욕을 타고 나지 못해 어느 자리에서도 재테크와 관련해서는 아무 얘기도 하지 못합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을 제일 못했습니다. 지금도 숫자 외우는 것을 못해서, 머릿속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전화번호는 다섯 개도 안 되고, 지금 가지고 있는(지난달 초에 새로 구입한) 자동차 넘버도 아직 외우질 못하고 있습니다.

 

참 부끄러운 얘기지만 환갑 넘은 나이에 이르도록 제대로 '재물 맛' 한번 누려보지 못했고, 땅 한 평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가진 것이라곤 시골의 아파트 한 채와 자동차 한 대 뿐입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의 월급과 삼류작가 처지인 내 쪽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고료가 수입의 전부입니다.

 

아, 또 한 가지가 있군요. 베트남전쟁 고엽제 후유증 판정을 받아 2003년부터 받고 있는 국가유공자 보상연금이지요. 처음엔 7급으로 월 20여 만 원씩 받다가 환갑을 먹으면서 50여 만 원으로 올랐는데, 2008년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사고 때 과로로 병을 얻어 죽을 뻔하고 살아난 후 신장이 많이 손상되어 6급으로 상향 조정되면서 지난해부터 월 120만원씩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장을 잃지 않기 위해 금주와 음식 절제 등 갖은 애를 다 쓰면서도 매월 50여 만 원씩 약값으로 지출을 하니, 지출할 돈이 있는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가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처지에서, 또 나이도 마흔이나 먹은 신세로 간신히 면 총각을 했습니다. 서른네 살 먹은 처자와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고 두 아이를 얻었습니다. 가장 정직하고 빤한 수입으로 노친 모시고 두 아이 잘 기르며 알뜰살뜰 살다가 그만 손재수에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10여 년에 걸쳐 1억 5천만 원의 '보증 빚'을 갚았습니다. 매월 빚잔치를 하느라 스트레스도 참 많았지요. 얼추 빚을 갚았을 때부터는 태안성당 성전건축을 거드는 일에 지출을 많이 했습니다. 수년에 걸쳐 도합 6천 여 만원을 봉헌했지요.

 

천주교회에서는 교무금이든 성전건축 기금이든 누가 얼마를 내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신부님과 사무장은 혹 알겠지만 일체 발설을 하지 않고 아는 체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주교회에서는 신자들의 헌금액도 '하느님만이 아신다'는 말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태안성당 성전건축을 담당하셨던 신부님이 다른 본당으로 옮겨가신 후 통화를 한 번 한 적이 있는데, 내가 모든 신자들 중에서 성전건축 기금을 가장 많이 봉헌했다고 하시더군요. 재산이라고는 쥐뿔도 없이, 오랜 세월 보증 빚을 갚느라 쪼들리며 살아온 내가 가장 많은 금액을 봉헌했다니,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그런데 2006년에는 23평 연립주택에서 벗어나 지금 살고 있는 32평 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집값은 1억1800만 원이었는데, 모든 비용을 합해 1억 5천은 들었지 싶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많이 놀랐지요. 초등학교 교사인 집사람 월급만 가지고 큰 손재수 속에서 겨우겨우 사는 줄 알았는데 새 아파트를 장만하여 이사를 하니,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시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2>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건 맞는 말일 것 같습니다. 나도 좀 돈을 벌었습니다. 그랬기에 1억 5천만 원의 '보증 빚'을 갚고, 성당 성전건축에 도합 6천여 만 원을 봉헌하고, 새 아파트도 장만할 수 있었지요. 마누라 월급만 가지고는 어림없는 일이지 싶습니다.

 

나는 인기 작가가 못돼서(사실은 역량이 부족해서) 인세 수입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책이야 몇 권 있지만, 인세 수입과는 아예 인연이 없습니다. 그래도 글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수입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창피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찌어찌 나이를 먹고 보니 이제는 더욱 별 볼 일 없게 되었습니다. 야망도 의욕도 없고 무안한 마음뿐입니다. 괴테가 여든 살에 <파우스트>을 완성했고, 톨스토이가 78세에 <부활>을 쓴 사실을 상기하며 희망을 가진 적도 있지만 건강을 잃은 후로는 그런 말도 일체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글을 씁니다. 아직은 맡고 있는 고정 지면도 있고, 가끔은 여기저기에서 조각 글 청탁도 와 주고, 자발적으로 쓰는 경우도 있고, 하여간 뭐가 됐든 열심히 부지런히 씁니다. 한가롭게 놀지는 않는 거지요.

 

일찍이 아내와 타협을 본 일이 있습니다. '보증 빚'을 얼추 갚아갈 때였지요. 우리 집의 기본적인 살림비용, 아이들 교육비, 공과금과 교무금, 자동차 보험료와 두어 개 적금 치르는 일은 아내의 교사 월급으로 해결하고, 내가 버는 돈으로는 신문과 잡지 구독료, 여러 단체들의 회비와 후원회비, 이런저런 성금, 경조사비, 또 가끔 갖는 가족 외식비용 등을 충당하기로 한 거지요.

 

내 쪽의 수입이 일정하지도 않고 또 지속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매월 정확히 구분을 해서 지출을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들쑥날쑥이나마 용케 충당을 한 것 같습니다. 2000년대로 들어서서는 매월 빚잔치하던 금액이 대폭 줄고 또 끝난 데다가 내가 국가유공자로 지정된 덕도 있고 해서 우리 집 경제 사정은 조금씩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태안성당 성전건축 기금 쪽에 최선을 다하고 또 집 장만을 준비하는 가운데서도 '천주교 인권위원회' 등 여러 뜻 있는 단체들과 여러 곳 천주교 성지들에 보내는 후원회비, 여기저기에서 간헐적으로 들어오는 도움 요청 등에도 나름대로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또 집 장만에 따른 어려움이 해소된 다음부터는 생활이 어려운 한 처가붙이의 대학등록금에 보태라고 학기마다 100만원씩 보내는 일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내게도 대학생 자녀가 둘이나 되어, 아이들 생활비와 용돈과 집 월세로 매월 120만 원 이상 지출을 하고 살지만, 내가 국가유공자인 덕에 아이들 등록금 쪽으로는 부담이 없는 대신 힘껏 나누며 살자는 생각이지요.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동산 투기 같은 것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거니와, 내가 돈 좀 있는 사람인 줄로 오해를 한 이들로부터 두어 번 투기 권유를 받은 적은 있지만 아예 귀담아듣지도 않았습니다.

 

내게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져서 땅을 살만한 돈이 생기더라도 나는 한평생 땅은 갖지 않고 살 마음입니다. 내 아이들에게도 다른 것은 다 가져도 땅은 갖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연의 일부인 땅만큼은 하느님의 것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생각이지요. 이 세상에서 땅을 가진 것만큼 하늘나라에서는 차지하는 것이 적을 거라는 말도 합니다.

 

내 선친께서도 평생 동안 땅 한 평 가져보지 못하셨지요. 그래도 아버님은 돌아가신 후에는 두어 평의 땅을 차지하고 누워 계신데, 나는 죽어서도 땅을 갖지 않기 위해 1995년 가톨릭중앙의료원에 시신을 기증해 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내도 마찬가지지요.

 

나는 주식투자 같은 것도 한 번 해본 적이 없는데, 위험부담도 클 뿐만 아니라 설령 돈을 번다하더라도 투기로 돈을 버는 것은 '불로소득'의 범주 안에 드는 것이어서 온당치 못하다고 봅니다. 하긴 뭐, 나 같은 사람만 산다면 나라의 경제발전은 아예 물 건너가겠지요.

 

 <3>

 

물욕도 없고 이재 능력도 없이 평생을 그럭저럭 살아왔지만, 또 한때는 엄청난 손재수 때문에 눈물겨운 고생도 무성했지만, 남에게 신세진 일은 거의 없습니다. 다른 이에게 보증을 부탁한 적도 없고, 빌린 돈이나 외상값 등을 떼어먹은 적도 없고, 뭐가 됐든 부담을 준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 구독을 하는 것들이 꽤 많은 편입니다. 특히 천주교 매체들은 거의 구독합니다. 모두 밥 그릇 비우듯이 읽지는 못하지만, 마누라가 열심히 읽고, 노친도 읽으시는 게 있고, 내 아이들과 주말마다 밥 먹으러 오는 동생과 고교생 조카 녀석이 시사 주간지 등에 관심을 가지니, 받아만 놓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천주교계 월간지들을 거의 모두 구독하게 된 것은, 그 잡지들에 글을 쓰고는 원고료를 구독료로 처리해주기를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원고료 대신 그 금액만큼 책을 보내달라고 해서 그 책을 여러 친지들과 교우들에게 선물한 적도 여러 번입니다.

 

내가 일간지와 시사 주간지들과 월간지들을 계속 구독하는 것은, 그것도 공동선 확충에 힘을 보태는 '열정'의 표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신장시키려는 의지에 동참하는 것이고, 또 하느님 사업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내가 여러 인쇄 매체들을 고루 구독하는 것에 대해 노친과 아내는 반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내가 한 말은 "담배 값 대신"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젊은 시절에는 담배를 꽤 많이 피웠습니다. 마산화력발전소와 남양만 간척공사장에서 생활할 때는 아침에 눈을 뜨면 담배부터 찾는 게 버릇이었습니다. 하지만 마흔 나이에 혼인을 하고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아이를 위해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 세월이 24년을 넘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담배 값으로 인쇄 매체들의 구독료를 해결한다는 거지요. 

 

노동자 생활을 할 때는 더러 화투장을 잡기도 했지만, 작가 명색을 지니게 된 이후로는 초상집이든 어디든 화투장 잡고 앉아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가끔 처갓집에 갈 때도 처가붙이들의 화투판에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술은 좋아했습니다. 지금처럼 막걸리가 유행을 이루기 훨씬 전부터 막걸리를 즐겼습니다. 막걸리가 푸대접 받는 상황을 슬퍼하며 없는 막걸리를 찾아 밤거리를 헤매기도 했지요. 허지만 이제는 건강문제 때문에 막걸리도 인연 없는 사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술도 담배도 멀리하고, 즐기는 잡기도 하나 없이, 돈 모으는 재미는 죄악시하며, 재미없이 삽니다. 유일한 취미는 오후마다(요즘에는 저녁에) 한두 시간씩 걷기 운동을 하며 묵주기도를 하는 거지요. 걷기를 하며 묵주기도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도 할 수 있으니, 걷기 운동은 내게 '일거삼득'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공부시켜 주기만 하면 된다고 봅니다. 물려줄 재산도 없으려니와, 아이들에게 일찌감치 재산은 못 물려준다는 말을 해놓고 있습니다. 마누라는 교육공무원 연금으로, 나는 국가유공자 보상연금으로 노후를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될 터이니, 생각하면 그것도 과분한 은총이지 싶습니다.

 

타고난 성품으로나 현실적인 조건으로나 다분히 '청빈'한 상태일 것 같습니다. 나는 문청 시절부터 '청빈'이라는 말을 좋아했습니다. '청빈하게 살자'는 다짐을 하곤 했지요. 나는 적당히 부유하고, 적당히 가난합니다. 올곧게 '청빈'을 추구합니다. 감히 '무소유'의 경지까지는 가지 못하더라도 청빈하게는 살 수 있으리라는 특이한 소망을 오랜 세월 품어왔습니다. 그것은 결국 나 같은 세속생활인에게는 '무소유'에 대한 소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로 가기 위한….


태그:#세속생활인, #무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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