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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독서가'로 이름난 정혜윤 CBS 라디오 PD.
 '매력적인 독서가'로 이름난 정혜윤 CBS 라디오 PD.
한여름의 끝자락에 열리는 '고전 명작소설 읽고 수다떨기' 강좌를 준비하면서 남은 시간 동안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3편을 읽고 있습니다. <1Q84> 3편이 나오기 일주일 전에 저는 1, 2편만을 읽은 상태에서 <1Q84>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제가 예견한 대로 (<1Q84> 3편의) 글이 흘러갈까 독자로서 궁금하기도 하고, 혹은 틀렸을까 조마조마합니다.

하루키가 던진 질문을 내가 다시 던져본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상실의 시대>를 읽은 지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나는 아직 불이 켜 있던 아파트의 불이 꺼지던 순간을 지켜보다가 뒤돌아서던 발길 같은 것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불빛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 우리에게 삶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었을까? 앞날이 마치 불빛이 꺼진 아파트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 우리는 그때도 아파트와 도시와 곧 가버릴 청춘을 육체의 눈이 아닌 영혼의 눈으로 볼 수 있을까?

거대한 것들의 시대는 갔고, 영웅과 모험과 혁명과 열렬한 논쟁과 모색의 시대도 갔고, 세상은 가볍고 변덕스럽고, 반짝거리되 찬란하지 않고 그래서 우리의 열정과 소망과 성취 역시 작아졌을 때 그때도 우리는 무의미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그때도 또다시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이란 것을 입 밖으로 내어 물어 보아야 할까?

하루키는 이런 상실감의 시대에 뜻밖의 방식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보게 만들었다. 그건 새로운 처세술의 등장과도 같았다. 매달리지 않으면서 연애하고 예의를 지켜 섹스하고 감상적으로 자포자기하지 않으면서, 자기 연민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에게 냉정하면서도 타인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열고, 속물이 되지도 존재를 내세우지도 않으면서 세련된 문화적 취향을 갖고. 세상에 절규하지 않으면서도 내부의 빈 공간을 서둘러 무의미로 채우지 않고. 그래서 우리는 마셔버린 맥주, 피워버린 담배, 싱거운 농담을 마치 순수와 뒤섞인 상실의 풍경으로 보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격렬한 비애감이나 환멸이나 타락이 없는 그의 그런 상실 앞에 위안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런 위안은 우리의 지평선을 확장시켜주는 위안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런 위안은 다른 가능한 세상에 대한 아플 정도의 갈망 없이,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게 만들고 결국 뭔가에 대한 회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외는 언제 생길까? 세계가 오로지 내 속에만 존재할 때도 생기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1969년 혹은 1973년, 1984년은 역시 아무래도 좋은 해이지 않을까?

<상실의 시대> 이후 일본 경제의 거품은 꺼졌고 옴 진리교, 지하철 사린 가스 테러 사건, 고베 대지진 등이 터졌다. 하루키는 고베 대지진과 지하철 사린 가스 사건이 거품 경제가 무너지고 '앞으로 앞으로'를 외치던 시대가 퇴색하고 일본이란 나라의 존재 방식이 심각하게 문제되던 시기에 터졌던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1Q84>에는 자신이 어떤 사회에 속해있는지 혼란스러워하고 의심하기 시작하는 두 남녀 주인공이 나온다. 자기가 속한 시스템을 의심하는 두 남녀 주인공의 굳게 잡은 손의 기억이 소설을 끌고 간다. 사랑이 없으면 이 세상은 모두 가짜라는 노래가 낮게 깔린다. 그렇다면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할 아직 정체가 확실치 않은 적인 리틀 피플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상한 구호를 외치며 마치 일곱난쟁이처럼 실을 자아 공기 번데기를 만드는 리틀 피플의 말 없고 기계적인 노동은 섬뜩하고 불길한 느낌을 준다. 그들은 이름이 없고 질문이 없다.

하루키는 <1Q84>에서 '1984년은 어떤 해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져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실의 시대에서 위안을 받던 그 시절의 나 역시,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그 사이에 수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 나를 아프게 한다. (<씨네21>)

<1Q84> 3편을 읽는 오늘 밤, 그는 아직은 서성이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난 뒤 친구들과 하루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런 말이 나왔어요. 하루키의 남자 주인공들은 마치 이제는 헤어지고 만 옛 애인과도 같다. 그렇지요. 쓸쓸함 불빛 아래서 고독하고 선량하고 내면이 깨끗한 젊은 남자를 떠올려 본다면 그건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의 주인공들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속물이 되지는 않은 채 자신을 위로할 취향을 간직하고 거기에 몰두하는 남자. 그러나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믿고는 있는, 진심은 마음속 깊은 곳에 넣어두고 있는 하루키의 주인공은 <1Q84>에 이르러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1Q84> 3편을 읽는 오늘 밤, 그는 아직은 서성이고 있습니다. 아직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굳게 손을 잡았던 아오마메의 확신에 가득 찬 눈동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동안 말로 표현하지 못한 진심들을 누군가와 나누려 하고 있는 듯합니다. 저는 하루키가 한 시대의 풍경, 곧 한시대의 풍경이 될 우리들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 것처럼 이번 <1Q84>에서도 또 다른 한 시대를 우리보다 앞서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

순정으로 굳게 연결된 두 사람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속의 전사들처럼 악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뚫고 나가려는 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서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1Q84>가 사랑 이야기라면 저는 그 사랑 이야기는 두 사람이 함께 진리를 생산하는 사랑이야기이기를 기대합니다. 마침 덴고의 유일한 사랑, 아오마메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만나기 위해 이 세계에 왔어. 우리 스스로도 알지 못했지만 그게 우리가 이 곳에 들어온 목적이었어. 우리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을 통과해야 했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며 설명할 수 없는 일, 기묘한 일, 피비린내 나는 일, 슬픈 일, 때로는 아름다운 일. 우리에게 시련이 주어졌고 그것을 뚫고 나왔어... 하지만 지금은 위험이 닥쳐오고 있어."

그 위험은 우리에게도 닥칩니다. 우리도 사랑으로 뚫고 나가야 하는 밤입니다. 사랑을 믿는 마음으로 뚫고 나가야 합니다.

※ 이 글을 쓴 '매력적인 독서가' 정혜윤 PD와 함께 하는 '고전 명작소설 읽고 수다떨기' 강좌가 오는 24일부터 4주 동안 열립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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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1Q84 1~3 세트 - 전3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2010)


태그:#정혜윤, #1Q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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